저가경쟁 위한 유해물질 남용에 제동 걸다
저가경쟁 위한 유해물질 남용에 제동 걸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2.07.3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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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소비자-시민사회, “유해물질 줄이자” 합의
사업장 울타리 넘어 전체 노동자에 혜택
[특별기고] 금속가공유 유해화학물질 가이드라인 협약의 의미

노동환경연구소
산업위생실장
발암물질 없는 사회만들기 국민행동 준비위원장 직무대행
7월 16일 오전 11시 금속노조 4층 회의실에서 금속가공유의 유해화학물질 가이드라인 협약식이 열렸다. 금속가공유 제조기업 8개사와 금속노조, 그리고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을 대표해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환경정의가 협약서에 사인했다. 화학물질 제조기업과 화학물질 사용자인 노동자, 그리고 제3자인 시민사회단체가 유해물질 저감에 합의한 것인데, 이러한 협약은 국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며 해외에서도 흔하지 않은 사례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가이드라인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글에서는 이번 협약의 준비과정, 협약의 내용과 의미, 그리고 금속노조와 발암물질국민행동의 향후 계획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화학제품에 대한 불신 깊어

출발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속노조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발암물질조사를 하면서 총 87개 사업장에서 1만3천 종의 화학제품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화학제품의 발암성, 생식독성, 변이원성, 잔류성/농축성, 그리고 환경호르몬까지 포함하는 고독성물질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제품에 해외의 금지물질이 사용되는 문제를 발견했다. 금속노조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이러한 제품을 불량제품으로,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불량기업으로 구분했다. 불량기업에게는 금속노조가 공문을 보내서 해외의 금지물질을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것인지 물어보고, 사용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불매운동까지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금속노조 소속 지부·지회의 안전보건 담당자들은 불량제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다른 기업의 다른 제품에 대해서도 ‘불량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기업에서 정말로 금지물질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맞는지 제품 성분 분석을 요구하는 지부가 등장했다. 이것은 화학제품에 대한 노동자들의 깊은 불신이 낳은 결과였다.

이미 해외의 금지물질 사용을 중지한 기업마저도 의심을 받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금속노조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판단했다. 고민 끝에 금속노조와 화학물질 제조기업간의 협약을 공식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화학제품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유해물질을 저감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이끌어내기로 했다.

협약 참여 문은 열려 있다

우선 금속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금속가공유부터 협약을 추진했고, 결국 국내 금속가공유 시장의 70~80%를 점유하고 있는 범우화학공업, 한국하우톤 등 8개 회사가 협약에 참여하게 됐다. 협약 준비를 위해 우선 간담회를 개최해 금속가공유 제조기업의 요구사항을 수렴했다.

기업에서는 유해물질 사용을 줄이고 안전한 물질을 사용하려면 제품단가의 상승이 불가피한데, 그래도 되겠느냐고 금속노조에 질문했다. 금속노조에는 현대차, 기아차, 만도 등 금속가공유를 소비하는 대규모 사업장들이 가입돼 있기 때문에, 금속가공유 제조기업에게는 금속노조의 입장이 중요했다. 금속노조는 사업주들과 의논해 안전한 제품 구매에 적극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의 건강을 희생해 저가 경쟁을 하는 것은 금속노조로서도 동의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금속가공유의 유해물질 가이드라인 초안은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작성했다. 가이드라인에는 우선 사용제한 물질 목록이 포함됐다. 해외에서 이미 금지한 물질인 짧은사슬염화파라핀은 물론이고, 천식을 일으키는 에탄올아민, 생식독성과 수생생태계에 피해를 주는 보린산, 환경호르몬인 알킬페놀 등이 목록에 포함됐다.
가이드라인은 매년 개정되며, 내년에는 금속가공유가 썩지 않도록 첨가되는 방부제의 유해물질에 대해 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사용제한 물질로 합의된 물질에 대해서는 금속노조와 기업들이 공동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유해물질 사용을 얼마나 저감시켰는지 사회에 공개하기로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금속가공유 제조기업 중에는 국내 기업도 있지만, 해외에 본사가 있는 기업도 있었다. 훅스라는 기업은 독일 본사에 가이드라인을 보고하고 본사로부터 한국의 노력에 대해 환영한다는 답변을 받아오기도 했다. 결국,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만든 초안 그대로 가이드라인이 합의됐다.

현재, 시장의 70~80%를 점유하는 기업들이 협약에 동참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협약에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는 모든 기업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기로 했다. 언제든 협약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오면 불이익이 없도록 조치할 계획이다.

제조기업·사용기업·노조 공동 노력 필요

가이드라인 합의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정부의 거북이 규제로 인한 노동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게 됐고, 저가경쟁으로 인한 유해물질 남용에 제동을 걸게 됐다. 또 안전한 대체물질이 있을 경우 이를 적극 도입할 수 있는 틀이 제조기업과 소비자인 노동조합 사이에 만들어졌다.

정부가 유해물질을 금지하거나 사용을 제한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더디다. 특히 해외의 금지물질조차도 수년 뒤에야 규제가 도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운동이 발생한다. 하나는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선운동이고, 또 하나는 불량기업과 불량제품을 감시하고 몰아내는 소비자운동이다. 이번 가이드라인 합의는 향후 국내의 유해화학물질 사용제한 범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고, 유해물질을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기업의 인식을 확산시키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멋진 의미가 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의 건강을 지켜내는 것은 보통 사업장의 울타리를 넘기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노동조합의 힘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유해물질을 상대적으로 덜 쓰고,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는 유해물질을 감시하지 못해 무방비로 더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금속노조는 이번에 제조기업과의 협약을 맺음으로써, 15만 조합원뿐 아니라 160만 금속노동자 전체를 위한 일을 해냈다.

이번 가이드라인 합의는 금속가공유 제조기업과 소비자인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소비자인 사용사업주의 역할이 요구된다. 자신의 가족인 노동자들에게 유해물질 노출을 저감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안전하게 설계된 제품을 고르고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자동차 완성사를 비롯한 모든 금속사업장 사업주들이 이러한 노력을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지금 시너와 세척제 데이터베이스를 검토하고 있다. 유럽에서 금지를 검토하고 있는 물질들이 국내 유통 제품에서 다수 확인되었다. 조만간 시너 가이드라인과 세척제 가이드라인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시너와 세척제를 제조하는 기업의 협조를 당부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