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꽃씨’를 심는 사람
‘인권꽃씨’를 심는 사람
  • 김정경 기자
  • 승인 2012.09.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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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오늘도 ‘인권 대한민국’을 꿈꾼다
[플러그人]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람과 사람 사이엔 섬’이 아니라 박래군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는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어떤 인터뷰를 하느냐?”고 물었고, “그냥,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그간의 활동들에 대해 들려주시면 돼요.”라는 기자의 대답과 함께 인터뷰는 시작됐다.

분명, 박래군의 인생 이야기를 듣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간 자리였고, 모든 질문의 앞머리도 ‘선생님께서는…’ 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는 유명인부터 이름 모를 노동자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그렇다. 박래군의 삶은 시간에 따른 연대기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인생의 매 순간마다 그가 만난 ‘사람’으로 기억되고 기록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것이 시작이다

소설가가 꿈이던 청년은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하기도 전에 연세문학회를 찾아가 회원이 됐을 만큼 문학에 열의를 보였다. 입학 후 1년 내내 학교 수업은 뒷전이었지만, 문학회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원고지에 습작 하는 것만큼은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문학과 사람에 취해 지낸 결과, 박래군은 대학 1학년 때 학내 문학상 공모에서 ‘땅강아지’라는 제목의 리얼리즘 농민소설을 써내 당선된다. 

“이제 제대로 등단도 해야지 하면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악의 무리들이 손을 뻗쳐 온 거죠.”

그가 말하는 악의 무리는 다름 아닌 ‘될성부를 떡잎’을 알아 본 운동권 선배들이었다. 부조리한 당시의 시대상도 문학청년을 흔드는데 한몫했다. 그때부터 박래군은 소설을 접고 학생운동의 길로 빠져든다. 잠시 접는 줄로만 여겼던 문학의 꿈은 그렇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인 ‘인권운동’의 길로 들어 선 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88년 6월 4일,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이 “광주학살의 원인을 규명하라! 광주는 살아있다!”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 했고, 이틀 뒤 그는 동생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열사나 의문사 가족들이 모여 있던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의 회원이 된다. 유가협의 일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88년 10월에 유가협 어르신들이 종로 기독교회관에 모여서 135일 간 기록적인 농성을 했었어요.  그런데 간사 한 명이 농성 지원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좀 도와주게 됐는데 하다 보니 어머니, 아버지들과 정이 들어버린 거예요. 도저히 발을 못 빼겠더라고요. 그렇게 발목이 잡혀서 유가협 사무국장으로 5년 간 있었죠.”

인권활동가이자 기획자

이후 그는 ‘인권운동 사랑방’으로 활동 영역을 옮긴다. ‘유가협’ 에서 ‘사랑방’으로의 이동은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지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80년대 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인권하면 양심수 석방, 고문 근절 같이 정치적인 탄압과 관련한 인권으로만 좁혀져 생각돼 왔어요. 그런데 87년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인권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이 시작됐던 거죠. 1993년 3월에 사랑방이 만들어지는데 그간의 좁은 인권 개념에서 벗어나 시민정치적 권리나 사회경제, 문화적 권리까지 폭넓게 끌어안게 되죠.”

박래군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활동이 인권의 개념과 인권운동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현재 그는 인권재단 사람을 통해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사실 요즘은 인권 운동 지원을 위한 재정 마련이란 본업보다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에 불려 다니느라 더 바쁘다.

문제는 불려가기만 했다하면, 일을 하나씩 만들어 떠안고 온다는 거다.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개의 문>의 내부 시사회를 보고는 ‘일반 극장에도 상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배급위원을 조직하는가 하면, 쌍용자동차 문제를 비롯한 지지부진한 투쟁들에 신선한 활력을 넣어보고자 희망지킴이를 조직하고, 밥 콘서트, 북 콘서트 등 다양한 방법의 이벤트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쯤하면 인권 활동가이기 이전에 전방위 기획자 수준이다.

이 낙관적인 기획자 앞에 ‘불가능할 것 같다’, ‘어려울 것 같은데’ 라는 주위의 생각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머릿속으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일단 입으로 내뱉고,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 인권재단 사람

인권이 숨쉬는 집짓기       
              

하지만 박래군이 최근 가장 중점을 두는 일은 조금은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인권센터를 짓는 일이다. 하나는 옛 남산 안기부터를 인권, 평화가 숨 쉴 수 있는 평화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시민의 힘으로 인권센터를 건립하는 것이다.

현재 남산 안기부터 사용은 서울시와 이야기가 잘 되고 있어, 2014년 하반기 쯤에는 공간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시민의 힘으로 만드는 인권센터는 지난 2010년부터 10억 원을 목표로 기금을 모으고 있으며 현재 5억 원 가량이 모인 상태라고 말한다.

“인권센터는 시민들이 원하면 언제든 와서 강좌나 세미나를 통해 인권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될 거예요. 소수의 인권활동가들에게만 맡겨 놓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인권 문제를 직접 감시할 수 있도록 자립적으로 인권활동을 할 수있는 역량을 키우게 하자는 취지인거죠. 한편 흩어져 있는 인권단체들이 함께 모여서 상호교류하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람이 좋다!

지금은 과거를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인권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 과정에서 감옥도 수없이 드나들었다.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그를 지금까지 인권활동가로 이끈 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사람들의 힘이에요. 제가 공감을 너무 잘 하는 것 같아요.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 일 같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요.(웃음) 몰랐으면 모르는데 그 걸 듣고는 외면하지 못하겠어요. 인권 활동가들만 느끼는 묘한 그런 게 있어요.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힘없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또 선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 통해서 저도 배우고, 그런 관계에서 힘도 얻고요. 그런 것들이 나를 끌어오는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신뢰, 사람을 만나면서 얻는 기쁨, 이런 것들이 없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는 전진과 퇴보를 반복해왔다지만 그래도 큰 그림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인권은 상승선을 그려왔다고 말한다. 정치범들에게 자행되던 고문이 사라진 것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세워진 것도, 과거에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차별문제에 대한 인식도 모두 인권 운동의 성과라고 말이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민간인 사찰 문제를 비롯해 우리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인권 과제가 여전히 많다.

“원래 국가인권위 같은 게 만들어 지기 전에 시민 역량이 좀 강하게 돼 있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런 기반 없이 국가인권위가 만들어지니까 국가가 저지르는 인권침해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면죄부를 발행하는 짓을 해요. 그런 국가인권위를 견제하고 감시하고 견인하려면 그만큼 시민사회의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시민들의 힘을 모아낼 기지를 만들자는 거예요.”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카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마틴 니뮐러 목사의 고백은 우리사회에서 인권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는 내 일로 닥쳤을 때만 인권을 말한다. 하지만 박래군이 꿈꾸는 인권대한민국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민감성을 느끼고, 인권이 곧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이다.

“사람이 존중받는 그런 세상, 그런 상식의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인권은 한계가 있는데 모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자연을 함부로 하는 다시 말해 자연을 지배하는 논리로 이야기 될 수도 있거든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사는 거죠. 내가 못하더라도 이후 후배들이 바탕을 다져줄거라 생각하고, 저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뭔가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인권꽃씨’를 심는다. 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말이다. 그가 심어준 꽃씨를 키우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 꽃이 필 때 쯤엔 그가 꿈꿔운 인권 대한민국이 현실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