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노사관계 현실 상기시켜 준 시간
28일, 노사관계 현실 상기시켜 준 시간
  • 김정경 기자
  • 승인 2012.11.01 16:47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화의료원노조 28일 간 파업 종지부
노사관계 정상화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장 1] 이화의료원지부 파업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보름달이 뜨기 전 해결해 주세요.”

이화의료원지부의 파업이 지난 추석 연휴를 앞두고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요구안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노조, 강경한 사측의 대응으로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갈등은 장기로 치달았지만, 노사가 한 발씩 양보하며 타결됐다. 

이번 28일간의 파업은 많은 것을 보여줬다. 병원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산별노조의 역할과 힘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화의료원과 이화의료원지부의 노사관계는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말이다. 이화의료원지부의 파업 28일을 되돌아본다.

ⓒ 보건의료노조

예고된 파업


이화의료원지부 임미경 지부장은 직장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하루아침에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쌓여온 결과라고 말한다. 이화의료원은 지난 2008년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동대문병원을 매각하고 이대목동병원으로 통합한다. 이 과정에서 인력축소는 불가피했고 노조는 사측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임 지부장은 “직원들의 고용승계를 우선으로 하고, 대신 임금부분에서는 양보를 했다”며, “임금은 적고 일은 더 많이 했지만 그래도 병원이 합쳐질 당시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묵묵히 참고 일했다”고 말한다.

병원 정상화와 발전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수익은 연구비 지원, 의료장비 구비와 편의시설 마련 등의 사업에 재투자 됐다. 자연스럽게 직원들의 임금수준과 복리후생은 타 대학병원들과 비교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화의료원노조에 따르면 동대문 병원 당시 ▲ 2004년 주 5일제 1년간 유보 ▲ 2005년 임금인상분 중 2% 발전기금 기부 ▲ 2007년 17년차 이상 호봉승급 동결 ▲ 2008년 동대문 기본급 20.3%, 목동 기본급 6.8% 임금 삭감 등 10년 동안을 양보하고 희생 해왔다고 말한다.

이런 노력으로 이대목동병원은 통합 3년 만에 정상궤도에 진입해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JCI 국제인증을 통과한 여성암전문병원으로 성장했다. 올해 초에는 2016년 완공을 목표로 마곡지구에 1,200병상을 갖춘 제2병원 건립계획도 확정지었다.

문제는 병원경영이 정상화 된 이후에도 직원들에 대한 처우는 개선될 기미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사측은 2011년 고유목적사업준비금으로 70억 원을 쾌척했지만 직원들의 임금은 서울 시내 전체 사립병원 중 여전히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인력부족으로 상시적인 2~3시간 연장근무에 시달렸다.

이화의료원지부는 “사측은 변변한 임금안조차 내놓지 않고 있어 사실상 매년 파업을 잡고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화의료원지부는 작년에도 파업전야제 당일에야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된 바 있다.

ⓒ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도 지부교섭도 거부


보건의료노조(위원장 유지현)는 올해를 산별교섭정상화의 해로 선언하고 “산별교섭 성사 없이 현장교섭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사용자 측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영향력이 큰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은 산별중앙교섭에 나서지 않았다. 그 중심에 이화의료원이 있었다.  

보건의료노조 나영명 정책실장은 “사립대병원 협회장이 이화의료원 서현숙 의료원장이고, 이화의료원은 대각선 교섭 및 지부교섭에도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투쟁거점 사업장이 됐다”고 전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5월 24일부터 산별교섭 상견례, 노사 공동포럼, 노사 간담회를 차례로 실시하고 7월 4일부터 8차례에 걸쳐 본교섭을 진행했지만 이화의료원은 단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6월 29일부터 진행된 지부교섭에서도 불성실한 교섭 태도를 보여 왔다.

이화의료원지부에 따르면 “지부 본교섭 9차례, 실무교섭 10차례, 조정회의 4차례가 진행되는 동안 사측은 본교섭을 5번 불참하고 2번을 일방퇴장”했다. 노사는 4차 조정회의까지 진행했지만 노사 양측 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지난 9월 5일 오전 8시를 기해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병원이라는 사업장의 특성상 응급실, 중환자, 수술실, 신생아실 등 필수유지업무 부서에 필요한 인력을 남겨두고 전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했다.

임 지부장은 “여성을 가장 잘 안다는 이대병원이 서울 대학병원 중 유일하게 직장 보육시설이 없고 보육수당도 지급하지 않는 병원이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다”며, “병원 통합 4년 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일해 왔지만 경영이 정상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규탄했다.

이화의료원지부는 ▲ 임금 8.7% 인상 ▲ 인력충원 ▲ 근로시간 준수 및 초과근로수당 지급 ▲ 보육수당 지급  ▲ 비정규직 정규직화 ▲ 5년 이상 6개월, 10년 이상 1년 무급 안식 휴가 ▲ 급식 끼니당 1,000원 지원 등을 파업 요구안으로 내놓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조 무력화 시도 있었다

파업 20일째를 맞은 지난 9월 24일, 이화의료원지부는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과 창조컨설팅이 정당한 노조활동을 방해하며 장기파업을 유도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창조컨설팅은 그간 SJM, 유성기업, 상신브레이크, 발레오만도 등 민주노조 파괴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 노동계에서는 ‘노조파괴자’라 불리는 컨설팅 회사로 최근 고용노동부가 노무법인 인가 취소 결정을 내리기도 한 회사다. 이화의료원은 지난 2005년부터 심종두 노무사가 대표로 있는 창조컨설팅과 법률자문계약을 맺고 있으며, 파업 기간에는 병원 중간관리자들에 대한 교육도 별도로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는 “영남대 의료원, 유성기업 등의 사업장에서 노조를 파괴하는 데 활용된 소위 ‘노조파괴 매뉴얼’이 이화의료원노조에도 작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가 주장하는 주요사례로는 ▲ 계·과장 등 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파업 대응 방법 교육 실시 ▲ 창조컨설팅 개입 이후 달라진 사측의 교섭 해태 및 파업 장기화 유도 ▲ 조기출근, 감금 등 물리적 방해를 동원한 조합원들의 파업 참가 방해 등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파업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에게 전화와 문자, 가족을 동원해 현장복귀를 종용하는 한편, 파업에 참여할 시에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협박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건의료노조는 “이화의료원지부의 합법파업 현장에서 작동 중인 장기파업 유도 및 부당노동행위의 현장조사 실시와 서현숙 이화의료원장, 장명수 재단 이사장, 심종두 노무사 등 관련 책임자를 10월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국회에 촉구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동자와 병원발전은 별개가 아냐


이화의료원지부는 장기화되는 파업에 대해 “추석 전 타결을 원한다. 사랑하는 환자가 있는 소중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집중교섭을 요구한다”고 밝히고, 사측의 태도변화를 촉구했다.

추석연휴를 앞둔 지난 9월 29일 새벽 6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임무송 서울지방노동청장의 중재 아래 16시간 동안 이어진 마라톤교섭 끝에 노사는 중재안에 합의했다. 10월 2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잠정합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지난 9월 5일부터 28일간 진행된 파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잠정합의안의 주요내용은 ▲ 임금 총액대비 3.7% 인상 ▲ 만 6세 아동에게 월 7만 원의 보육수당 지급 ▲ 인력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 비용 지원을 통해 직원 식당의 질 개선 ▲ 노조 소모임방, 직원휴게실, 바자회 지원 ▲ 쟁의행위를 이유로 징계와 민형사상 책임 불문, 고소고발 취하 등이다.

이화의료원 측은 “이번 협상 타결이 이화의료원의 모범적인 노사문화를 구축하는 전기가 됐으면 하고, 이번 경험을 노사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이화의료원지부는 “잠정합의안이 만족할 만한 결과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번 파업투쟁을 통해 창조컨설팅 심종두 노무사가 개입한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막아내고, 민주노조를 지켜낸 점”을 파업의 성과로 평가했다.

한편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쟁의권과 공익의 조화를 내걸고 시행 중인 필수유지업무제도가 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면서 운영되고 있는지 이번 파업을 통해 현장 사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행 노동법 상에서는 합법적인 파업을 하고 있는 사업장에서는 대체근로를 시킬 수 없지만 필수공익사업장의 경우는 파업 참가 인원의 50% 범위에서 대체근로가 허용된다. 이런 제도로 이대목동병원은 파업 중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운영에 가까운 병원 가동률을 보여 파업의 영향력이 반감됐다.

올해는 보건의료노조가 산별교섭을 정상화 하겠다고 선포한 가운데 벌어진 지부교섭과 파업이었다. 이화의료원지부 파업을 놓고 보건의료노조는 “이화의료원 파업승리에 산별의 모든 역량을 총집중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대와 참여, 물품 후원 등은 지속됐지만 이화의료원을 비롯한 사용자들이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할 만큼의 영향력은 보여주진 못했다. ‘산별의 힘’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임미경 지부장은 파업이 있기 전 인터뷰에서 올해 교섭을 통해 “대등한 노사관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번 파업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노사관계는 여전히 불평등했다. 이화의료원은 경영 위기를 핑계로 임금도, 인력도, 근로조건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고, 산별교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지부현장교섭에서조차도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번 파업은 이화의료원과 이화의료원지부의 노사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임 지부장은 말한다.

“병원의 발전이란 게 단지 병원 규모나 시설만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병원이 발전하는 길이 아닐까요?”

노동자의 행복과 병원의 발전은 더 이상 별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