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그리고 요리가 사람을 만들었다
불, 그리고 요리가 사람을 만들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2.12.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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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만 먹어서는…진화 원동력은 ‘요리’
160~180만 년 전부터 인간 뇌 급격히 커져

동아사이언스 기자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이번 달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각종 송년 모임도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리가 많다. 부드러운 스테이크,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달콤한 케이크와 빵 등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 이런 먹는 즐거움은 오직 인간만이 누리는 특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익혀 먹는’ 음식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2007년 미국 하버드대 리처드 랭엄 교수가 주장했던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최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다. 요리가 어떻게 오늘날 인간을 만들었는지 소개한다.

‘고기를 굽고 채소를 삶고 국을 끓이고….’ 엄마의 손을 거쳐 밥상에 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시뻘겋기만 하던 쇠고기는 맛있는 구이로 변해있고, 쓴맛이 돌던 채소들은 고소하고 짭짤해졌다. 날것으로는 비려서 먹을 수 없던 조개는 국물 속에서 시원한 맛을 내고 있다. 한 숟가락만 먹어도 온몸에 힘이 도는 그런 음식들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를 길러준 맛들이다.

요리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맛뿐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불을 발견한 인간을 인간답게 이끌어줬다는 점이다. 맛있고 소화 잘 되는 음식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됐다는 이야기다. 대체 인간 진화와 요리에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거대한 뇌’는 배고프고 소화기관은 작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약하지만 지적능력이 있어 어떤 동물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이런 지적능력이 ‘거대한 뇌’에서 나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뇌 크기를 비교하면 인간이 침팬지보다 2.4배 더 크고, 뇌신경도 인간은 평균 86억 개로 침팬지(28억 개)의 약 3배에 달한다.

뇌의 무게는 약 1.3kg로 전체 몸에서 2%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뇌가 쓰는 에너지는 우리 몸 전체가 쓰는 에너지의 20%를 차지한다. 거대한 뇌를 가진 인간이 다른 영장류나 동물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실제로 에너지를 만들어 온몸으로 보내줄 인간의 소화기관은 다른 동물보다 작다. 다른 영장류의 소화기관 무게에 비하면 60%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이 상태에서 인간 조상은 침팬지 크기의 뇌와 몸집을 가진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어떻게 조달했을까.

하버드대 영장류 연구가인 리처드 랭엄 박사는 이 질문에 ‘인간 조상인 직립원인(Homo erectus)의 뇌는 약 160만~180만 년 전에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기와 덩이뿌리 채소를 불에 굽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요리를 하면 음식물이 소화되기 좋은 상태로 변하기 때문에 소화기관에서 칼로리를 더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랭엄 교수팀은 같은 크기의 쥐와 비단뱀에게 날고기와 익힌 고기를 주는 실험을 실시해 ‘동물도 날고기 대신 익힌 고기를 주면 빨리 성장한다’는 걸 밝혔다. 이를 통해 익힌 고기가 날고기보다 소화하는 데 에너지를 적게 쓴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 스미소니언 박물관
익혀 먹자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섰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연방대의 수자나 에르쿨라누 호우젤 박사 연구팀은 랭엄의 ‘요리가설’을 지지하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영장류를 대상으로 커다란 뇌와 몸집을 유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 비용을 계산한 결과 음식을 날 것으로만 먹어서는 지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22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인간이 날 것만 먹고 뇌에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려면 하루 중 9시간 이상을 먹기만 해야 한다.

에르쿨라누-호우젤 박사팀은 요리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음식을 날 것으로 먹으면 영장류 뇌나 몸집이 커지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진은 영장류 30종과 포유류 30여 종의 뇌신경 수를 셌다. 그 결과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뇌 크기가 뇌신경 수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고, 뇌신경 수는 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칼로리) 양과 직접 연관된다는 것.

연구진은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음식을 날 것으로만 먹을 때 뇌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칼로리를 섭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다. 그 결과 고릴라는 8.8시간, 오랑우탄은 7.8시간, 침팬지는 7.3시간, 인간은 9.3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을 살펴보면 ‘요리하지 않는 날 것을 먹고 영장류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가 보인다. 다른 영장류들은 날 것을 먹고 에너지를 얻느라 7~8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인간은 요리를 하게 됨으로써 칼로리 섭취에 필요한 시간을 줄였다. 그 결과 인간은 지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대한 뇌를 갖도록 진화할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많은 뇌신경을 가지게 된 것도 요리로 음식물 섭취의 질적인 변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불로 익힌 음식들은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조직이 파괴돼 우리 소화기관이 흡수하기 좋은 형태로 바뀐다. 그 덕분에 인간은 오랫동안 음식을 소화시키지 않고도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진은 직립원인이 불을 사용하지 않고, 요리라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직도 원숭이의 뇌 크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에르쿨라누-호우젤 박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엌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며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서게 해 준 것이 요리”라고 말했다.

물론 랭엄 박사의 주장처럼 인류가 160~180만 년 전부터 불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발견된 150만 년 전의 불 탄 석기 등도 자연발화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로 거대한 뇌를 유지하는 데 요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명백히 밝혀졌다. 정성스러운 요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