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냄새·사람냄새 어우러진 길
한약냄새·사람냄새 어우러진 길
  • 전재훈 기자
  • 승인 2013.01.0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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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예찬] 서울 약령시와 경동시장

골목에는 삶이 익어간다. 숱한 이의 발자국들이 포개지며 만든 애환이 서려있기 있기 때문이다. 처음 발길을 한 낯선 지역이라도 오래된 골목에 들어서면 사투리가 절로 나올 듯하다. 골목은 이웃들의 정겨운 수다가 길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어느 골목이든 언젠가 본 듯한 기억이 어리지 않는가. 마치 고향집 고샅에 들어서는 기분. ‘엄니!’ 하고 소리치며, ‘내 새끼 오나!’ 하며 반겨줄 듯한.
장터에도 겨울이 왔다. 때 아닌 맹추위로 세상을 얼게 한 12월 10일, 서울 약령시와 경동시장을 찾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병고에 시달린 백성에게 구원의 손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로 나오자 한약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누군가는 한약 달이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온몸에 기운이 팍팍 돈다고 한다. 쌉싸래한 한약 냄새를 따라 발길을 옮긴다. 절의 일주문을 닮은 서울약령시 관문은 예스러운 정취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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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민족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고 국민복지 향상에 공헌하여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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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발짝이나 옮겼을까. 보제원 기념비가 눈길을 잡는다. 조선 시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의술과 탕약을 베풀었던 보제원의 터가 지금의 서울약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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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제일의 약재시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람들이 많지 않다. 약재상점과 약방이 모인 골목에만 드문드문 약재를 흥정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한의원과 약국이 모여 있는 골목 안쪽으로 찬바람이 밀려든다.
 
“요즘 경기도 안 좋고 추워서 장사가 안돼요.”

약재 상인들이 입을 모은다.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기가 시민들의 호주머니를 꽁꽁 얼어붙게 했고, 약령시 골목을 더욱 쌀쌀하게 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을 지킨다. 자신의 약을 먹고 환자의 병이 호전됐다는 소식이 그 이유다. 보제원이 가난한 병자들을 돌봐 준 마음이 상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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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까지 잠근 패딩 잠바에 모자, 장갑, 털신으로 중무장한 채 예덕나무를 작두로 썰고 있는 약재상인 황병태(60)씨. 차림새와 달리 그의 손놀림은 날래다. 마치 환자의 병마를 싹둑 잘라 버리겠다는 듯 작두질이 힘차다. 슬며시 말을 걸었다. 무뚝뚝하게 요즘 시장 경기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
 
“장사 안 돼.”
 
모닥불에 녹는 꽁꽁 언 손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재래 약재상이 즐비한 약령시 골목에서 건널목 하나를 건너면 경동시장이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경동시장은 기와지붕을 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 같다. 까만 기와 위로 하얀 눈이 소담히 쌓여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상인들은 비닐로 바람막이를 하고, 빈 깡통에 모닥불을 지펴 언 몸을 녹이고 있다. 허연 입김을 뿜으며 시장 통을 지나는 시민들은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잰 발걸음으로 지나친다. 서로의 몸을 포갠 채 겨울을 이겨내는 무가 길바닥에 뒹굴고 있다. 알록달록 플라스틱 광주리에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소복하게 담긴 찰보리, 서리태, 강낭콩, 찰흑미는 어서 누군가의 집으로 입양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경동시장은 약령시의 가까운 벗답게 약재상들도 함께 있다. 개똥쑥, 빼빼목처럼 이름만 들어도 웃음을 자아내는 약재부터 진시황이 찾았다는 불로초까지 수십 가지의 약재가 반듯하게 오와 열을 맞춰 손님을 기다린다.

골목에서 만난 할머니의 손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경동시장 한쪽에는 마늘 파는 골목이 있다.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마늘을 까고 있다. 그곳에서 손정자(70) 할머니 만났다. 깊게 파인 주름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지만 인자한 미소는 그 주름까지 아름답게 한다.

손 할머니는 1킬로그램 당 2천 원을 더 벌기 위해 맨손으로 마늘을 깐다. 할머니 손등은 주름을 따라 하얗게 갈라져있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추위에 부르튼 것인지, 칼에 베인 것인지 성한 곳이 없다. 손톱 끝에는 까만 피가 맺혀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 자리에서만 이삼십 년 있었어. 여기서 자식 키우고 다 했지.”

그냥 손이 아니다. 할머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엿한 직업군인 아들을 키워낸 손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들에게 용돈을 건네는 손이다.할머니는 봄을 기다린다.

“개시도 못하고 가는 날도 있고 몇 십 만원 파는 날도 있고. 지금은 김장철이 끝나서 단골 빼고는 손님이 많이 없어요. 봄이 되면 나아지긴 할 텐데….”

온몸을 칭칭 싸맨 상인들을 만나고 돌아서는 길,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할머니의 손이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