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2004년, 저물 줄 모르는 문제들
저물어가는 2004년, 저물 줄 모르는 문제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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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공화국 + 지역경제 고사 + 넘쳐나는 빈곤층

#1. 2004 대한민국은 ‘시위의 종합전시장’ 
2004년 대한민국은 시위의 종합전시장이 됐다. 택시기사들이 LPG 가격 인하를 외치고, 식당주인들이 솥을 집어던졌다.

 

집창촌 여성들이 거리에 누웠고, 사학재단 관계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종교인의 시국선언과 궐기대회는 멈출 줄 모르고 이어진다. 시위 방식도 극단적으로 변했다. 양계업자가 허약체질의 토종닭을 집어던지고 장애인들은 스스로의 몸에 사슬을 묶고 있다.

 

노동자, 교육자, 재향군인, 자영업자, 종교인, 사회원로, 농민, 노점상, 시위에 나서는 층의 경계도 사라지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사회갈등 조정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11월도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20일, 여의도 국회 앞에는 12개나 되는 천막농성장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정기 국회가 열리는 때면 언제나 한두 동의 천막농성장이 있어왔지만 올해는 유난히 많다.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 국가보안법 철폐, 장애인 이동권 보장법 제정과 장애인 교육예산 확보, 의료시장 개방 반대, 성매매 종사자들의 생존권 보장시위에 군 의문사 진상 규명에 이르기까지 알록달록한 천막만큼 요구도 다양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천막이 늘어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여의도 시민 공원이 나온다. 인라인과 자전거를 즐기는 인파들 사이로  네 동의 천막이 늘어서 있다. 비정규직법안·한일 FTA 반대를 내걸고 있는 한국노총 지도부의 대형 농성장과 고속도로 민영화 반대 플래카드로 도배한 도로공사노동조합의 천막 옆으로, LPG세 인하를 요구하는 택시 노동자들의 농성장, 고용연한 철폐를 주장하는 농협중앙회 민주노조, 스톡옵션 중단을 요구하는 하나로통신 노동자들의 철야농성장이 있다.


하나 둘씩 한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할 마당에 오죽했으면 길거리로 몰려나왔겠냐는 게 이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2004년은 저물어가지만 이들의 문제는 쉽게 저물지 않을 듯이 보였다. 언제까지 천막 농성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명확한 기한을 제시하는 단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모두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이러다가 갈등이 구조화 되고 시위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 행동 양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울대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갈등 조정의 최상위 기구인 국회 앞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천막은 정부와 정치권의 갈등 조정 기능 상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2. 0.7평, 하루 4천원의 삶에 닮긴 절망


영등포역 일대에 밀집된 백화점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되고 있다. 밤이면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소비와 유흥의 도시.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 옆으로 난 샛길로 몇 발자국만 내딛으면 ‘딴 세상’이 흉한 얼굴을 드러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기에는 좁은 골목, 라면 상자를 이어 붙여도 그보다는 훨씬 튼튼하게 붙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허술한


판자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곳. 이른바 ‘벌집촌’으로 불리기도 하는 쪽방촌이다. 현재 영등포역 주변에는 530개 정도의 쪽방이 있다. 서울시내 쪽방촌 중에서도 가장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곳에는 현재 500여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월세는 보증금 없이 13만원~18만원 정도고 일세는 4천원이지만 그나마 요즘엔 월세 거주자는 줄고 돈이 있을 때마다 들어와서 하루 묵고 가는 사람이 많다.


거주자들은 대부분 독거노인, 장애인, 주변의 윤락여성, 알콜중독자, 노숙자, 실직가장 등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로 마주친 중년 남자는 다짜고짜 천원만 내놓으라고 했다. “밤새 소주를 네 병이나 깠더니 뜨끈한 라면 국물이 먹고파서”다. 돈을 주면 자신이 사는 곳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그는 라면을 산다고 가서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이 열려있는 방을 찾아들어 갔다. 0.7평 짜리 방은 몸을 비스듬히 해 머리를 숙여서야 겨우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때가 꼬질꼬질 낀 요강과 함께 놓여 있는 밥그릇, 군데군데 담뱃불로 난 구멍이 가득한 이불뭉치 속에서 누워있다기 보다는 ‘이불과 엉켜있던’ 중년의 사내가 얼굴을 내민다. 아침에 일거리를 구하러 나갔다가 허탕을 쳤다는 이 사내는 지난 IMF 때 실직하고 밑바닥을 전전하다 쪽방촌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재산인 ‘몸뚱이’를 밑천 삼아 가끔 막노동 자리를 찾아 나서지만 실패하기 일쑤라고 했다. 거처도 일정치 않고 몸도 성칠 않아서 정부에서 운영하는 취업 알선 제도는 이용하지도 못한다. 운 좋게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았다고 해도 당장 내일 방값 걱정 때문에 월급으로 임금을 주는 업체는 지레 포기하게 되는 게 이들의 현실이다.


옆방에 사는 김할머니는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껌을 주섬주섬 챙기며 중얼댄다. “오늘 방세 내려면 또 가서 껌 몇 통을 팔아야지, 아이고.” 김할머니는 자식들이 다 있으면서도 이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연에 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고함을 친다.


“이보시오, 올 봄에 여기 꼭 다시 와 보쇼. 여기 살던 사람 반은 아마 얼어 죽고 없을 거요. 겨울만 되면 꼭 한 번씩 와서 카메라 들이미는데 다음번엔 봄에 와서 송장 나가는 것도 좀 보란 말이요.” 섬뜩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난 겨울 전국적으로 동사한 사람은 300여 명이나 된다.

 

하루만에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다 봤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쪽방촌을 빠져나오는데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영등포역 일대를 전전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아, 쪽방촌마저 갈 수 없는 저이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몇 발짝을 더 떼니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높은 빌딩 숲이다. 빌딩 숲에 겹겹이 둘러싸인 쪽방촌의 흔들리는 삶들은 2004년 한국사회의 현실을 증거하고 있다.
 

#3 점점 더 벌어지는 지역경제 격차
2004년 한국경제의 주요 화두는 ‘양극화’였다. 내수와 수출, 전통제조업과 IT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 회복 불능의 상태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경제의 지역간 격차까지 가세하고 있다. 3/4분기 경기와 충청 등 중부지역의 제조업생산이 호조를 보인 반면 제주와 부산지역의 생산은 감소하는 등 지방 경제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
한국은행이 11월 발표한 ‘최근 지방금융경제 동향’에 따르면 3/4분기 지방의 제조업생산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2.0% 증가해 2/4분기에 비해 증가세가 둔화됐다.

 

권역별 성장률을 살펴보면 대전·충청이 22.3%로 증가율이 가장 높았고, 이어 △인천·경기 17.3% △부산·울산·경남 12.3% △대구·경북 11.8% △광주·전라 7.2% 등의 차례로 지역간 격차가 상당했다.


고용사정도 지역별로 크게 차이가 났다. 경기지역은 취업자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1만7000명이 늘어났으나 광주·전라권 취업자수는 1만3000명 증가하는데 그쳤다.

지역의 제조업 생산이 저하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환율과 원자재난까지 겹쳐 수출경기마저 축소되면서 업종을 전환하거나 중국행 보따리를 싸는 업체가 크게 늘고 있다.


연관 산업과 제조업 기반의 붕괴, 이로 인한 지역경제의 파탄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11월 초, 대구지역의 섬유산업 관계자들이 ‘더 이상 지역에서 장사를 못해먹겠다’며 궐기하고 나선 것은 지역경제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어느 곳 하나 성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경제의 기본 단위인 지역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4 절대 빈곤층의 ‘절대’ 증가


경제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절대 빈곤층도 함께 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 실태조사 결과 절대빈곤층이 전 국민의 10.4%인 494만 명으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가운데 한 명은 당장 먹고 살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소득이 4인 가족 기준 월 106만원인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 385만명. 건강보험을 내지 못해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구도 172만가구나 된다. 전기세를 연체하고 있는 가구는 89만3272가구. 한전은 전기료 체납가구가 사상 최대를 기록, 외환위기 때보다 1.5배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다.


최근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부설 빈민상담센터 직원들은 하루에도 200통씩 걸려오는 도움 요청 전화 때문에 바깥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다.

 

이 센터의 이선정 연구위원은 “지난해 이맘때쯤에는 하루 평균 20~30통의 전화가 걸려왔던 걸로 기억한다”면서 “5개월치 상담전화가 한꺼번에 걸려올 만큼 빈곤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말한다.


최근 이곳에 걸려오는 상담전화의 유형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많은 것이 노령연금 수령에 관한 상담인데 특이한 것은 수령 당사자보다 자식들이 전화를 더 많이 걸어온다는 점이다. 이선정 연구위원은 “본인들이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안 되니까 노령연금이라도 타게 해 주려고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두 번째로 많은 것은 미혼모 가정이나 편모가정의 도움요청인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의 십중팔구는 신용불량자다. 이 외에도 자녀의 보육급여나 교육급여 등 실제 생계와 관련된 상담 전화가 많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차상위 빈곤층의 문제도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류소장은 “적어도 보건복지부 통계의 2배 이상의 저소득층이 있다”면서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보다 단지 몇 푼을 더 벌어서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하는 차상위 빈곤층의 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갈등과 끝간 데 없이 치닫는 양극화, 늘어나는 빈곤층의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2004년 달력이 겨우 한 장 남았지만 섣불리 ‘희망의 새벽’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세밑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