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행복시대 여는 행복한 위원장
조합원 행복시대 여는 행복한 위원장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3.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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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은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시련의 벽에 부딪쳐도 소통으로 치유받다

지난 2011년 4월 5일, 연세의료원노조 17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이수진 위원장은 ‘조합원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2년 남짓, 이 위원장은 내외의 다양한 사안들을 소화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수진 위원장이 노동조합과 인연을 맺게 된 즈음, 연세의료원 노사관계는 급변했다. 기존의 권위적인 노조는 직선제를 거쳐서 거듭났고, 파업을 거치며 갈등이 극대화됐는가 하면, 3년 만에 노사화합 선언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이수진 위원장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합원들이 바라는 행복은 무엇일까, 이 위원장은 행복한 위원장일까. 꿈 많은 학창시절에서부터 파업 직후 조합원들에게 질타를 받았던 쓸쓸함까지, 이 위원장의 목소리를 옮겨 본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벽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의료원에 입사한 게 1991년이었어요. 들어오고 싶었던 병원이었죠. 신입 때는 일을 배우는 게 우선이니까 정신없이 혼나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한 2, 3개월 트레이닝 받고 일이 좀 익숙해지니까, 그제야 일이 힘든 줄 알겠더라고요.

무엇보다 힘든 게 교대근무더라고요. 밤 근무를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정말 버거웠어요. 지금이야 8시간 근무지만, 그때는 10.5시간이 근무시간이었어요. 아침 교대근무자에게 인수인계하고 못한 일을 마무리하면 12시간 이상 병원에 있을 때도 많았지요. 수간호사가 할 얘기가 있다고 남아 있으라고 하면 꼼짝 없이 붙들려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침 7시 정도 되면 체력에 한계가 와요. 다리는 퉁퉁 부어오지.

병원에 들어간 지 3년 뒤에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낳았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시집을 간 편이었죠. 어린 나이에 일과 가정을 챙기려니까 그동안 힘들었던 건 비교할 게 아니더라고요. 다른 무엇보다, 교대 근무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아이를 맡아줄 시설이 없잖아요. 부모님들의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지방에 계신 시부모님께 한두 달 맡기기도 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아이와 떨어져 살 수는 없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아이를 찾아 왔지요. 그러다가 큰 아이가 7개월 무렵쯤 됐을까, 돌도 안 된 아이를 세브란스 병원 어린이집에 보냈어요. 여기는 그래도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아이를 돌봐주거든요. 밤 10시 반까지. 가보니까 우리 애가 제일 어린 거예요.

어떤 날은 근무 일정이 저녁 근무와 다음날 아침 근무로 짜일 때가 있어요. 간호사들끼리는 이브-데이 근무라고 하는데, 밤 10시에 끝나고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11시. 그러면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다시 병원으로 출근하는 거예요. 그런 날이면 집에 도착해서 아이의 옷을 안 벗겨요. 자고 있는 애를 업고 왔으니까 그냥 그대로 재우고, 아침에 그대로 데리고 나가는 거예요. 기저귀 가방, 우유 가방 들고 아이는 들쳐 업고. 내 몸은 혹사를 하는 데도 기뻤죠.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고 내가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엄마로서 아이한테 참 미안하죠. 아이가 너무 어리고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어린이집에 보내면 사철 감기를 달고 지내요. 밤 근무를 할 때면 병원 근처 직장 동료가 잘 아는 할머니께 아이를 맡기기도 했는데, 애가 밤새 몸이 아프고 보채니까 이 분도 봐주기 어려워하는 거예요. 엄마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할머니께서 신경을 써 주셔도 눈에 안 차는 게 좀 많았겠어요? 그래도 말씀은 못 드리고 혼자 끙끙 앓으며 속상해하는 거지요.

지금이야 분만휴가도 있고 육아휴직도 있다지만, 후배 간호사들이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얘기하는 걸 보면 어떤 때는 화가 나요. 노동조합에서도 남성 간부들이 육아 문제나 정책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 보면요. 자기 문제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걸 이해시키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노동조합도 사실 다분히 남성위주의 문화인 경우가 많잖아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시련

아이를 낳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병원 내 인사이동이 있었어요. 정당한 이동이라면 별 수 없었겠지만, 부당한 이동이었어요. 처음에는 가려고 생각했어요. 억울하지만 힘이 없으니까. 병원을 그만두지 않을 거라면 가란 대로 가야지요. 그랬는데 주변에 아는 분이 노동조합에 한번 찾아가 보라고 그러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다른 직종들도 불이익을 당한다고 노조를 찾긴 어려웠어요. 노조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었고. 용기를 내서 연락을 하고 노조 사무실을 찾아가 면담을 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노사협의회에서 제 문제를 다뤘더라고요. 그렇게 해결이 됐어요. 저를 인사 이동하려던 관리자는 2박 3일간 노무관리 교육을 가게 됐고요.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던 거예요. 말을 안 들었다고 찍힌 거지요. 참 힘들더라고요. 윗사람에게 찍히니까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심하더라고요.

당시의 노조 부위원장님이 제게 대의원을 한번 해보라고 권하시더군요. 1996년부터 대의원을 하게 되었고, 또 조사통계 차장을 맡게 되면서 상근 간부가 되었어요. 처음에 정말 놀라웠던 것이, 단체협약을 처음 읽어본 거예요. 우리 사업장 근로조건이 대부분 단협을 위반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 그러면 그동안 관리자들이 나한테 요구했던 것이 부당한 것이었구나. 그랬는데도 나는 기가 죽어서 무슨 얘기라도 할라치면 혼나지 않을까 눈치를 봤는데.

병원의 문화가 좀 권위적이기도 하지요. 특히나 간호사들 같은 경우에는 군대 다음으로 상하 관계가 확실한 조직이었다고 할까. 그 당시에는 무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부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였지요. 하지만 처음이 힘들지, 내 권리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게 어렵지 않아요. 어설프게 찍히면 힘든 거지만, 확실하게 찍히면 그 다음부터는 안 건드리거든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제게는 2007년 여름의 파업이 정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어요. 파업에 들어가기 전, 사실 제가 기존의 노조를 흔드는 일을 했어요. 상집 간부를 하면서 노동조합이 어딘가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고, 관료화돼 있는데다가 뭔가 오픈 돼 있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던 식당 운영권과 관련된 잡음도 끊이지 않았어요. 간선제였던 당시 집행부에 대해 불신도 커져 갔지요. 결국 현장으로 돌아갔어요. 3년 정도 간호사로서 일에만 몰두하다가 노동조합을 바꿔보자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다시금 관심이 돌아섰지요. 선거는 직선제로 바꾸고, 식당 비리 문제를 해결하고, 그동안 노조에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된 조합원들을 복권시키자는 목적을 가지고 직선제 추진위원회가 발족했어요.

결국 조합원들의 손으로 뽑은 집행부가 최초로 들어서게 되었죠. 그러다보니까 현장에서 기대가 어마어마한 거예요. 당시에 조합원 규모가 3,000여 명이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600명이나 노조에 가입하게 된 거예요. 노조에서는 야심차게 2006년에는 처음으로 병원 내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지요. 그때 제가 사회를 봤는데, 생전 제가 그런 걸 해봤어야죠.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는 대로 조합원들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리고 울분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새 병동을 짓고, 병원은 점점 더 좋아지는데,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병원은 1등 병원 되는데, 직원은 3류 직원 아니냐. 그뿐 아니라,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생기는 일반 직원들의 불만 등이 쏟아져 나오는 거지요.

2005년과 2006년의 임금교섭은 사측이 정말 애를 먹었지요. 조합원들의 단결된 목소리가 하나로 뭉치면서 노동조합의 힘은 극대화됐어요. 사측을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며 10.45%, 7%씩 임금을 인상했어요. 어마어마한 거죠. 2007년에는 사측이 노조에 이렇게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창조컨설팅을 통해 소위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도입하지요.

사실 파업에 들어가기 전에도, 사측이 파업을 유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금씩 돌았어요. 하지만 지난 두 해의 성과에 노조는 방심했지요. 교섭을 해태해서 파업을 유도하고, 직장폐쇄와 노조탈퇴 유도, 손배소 가압류, 각종 징계와 소송. 한 달 간 파업을 하면서 우리도 다 당한 거예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치유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이 참 좋아요. 직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관계라는 게 참 어렵게 되지요. 특히나 업무의 성과를 가지고 냉정하게 불필요한 인간으로 단정 지어지는 직장생활이라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들지요.

2007년 파업 이슈 중 하나가 다면 평가제도의 문제점이었어요. 제도에 대해 관리자들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거예요. 자신은 중간 점수를 줬는데, 이게 누적되어 하위 등급의 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났던 거예요. 내가 일을 잘 못했을 때는 어떻게 개선할 지에 대해서 피드백을 받는 것이 인사고과의 중요한 점이잖아요? 그런데 다면평가가 처음 도입이 되면서 관리자들이 이런 피드백을 주지 못하는 거예요. ‘난 네가 거기에 낄 줄 몰랐다’면서.

불만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죠. 호봉승진이 안 되는 그룹에 끼어 버리고. “너 네들에게는 제도를 바꾸는 거지만,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거다” “내가 50점짜리 인생이냐? 난 죽어라고 열심히 했는데. 그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얘기를 해 다오.”

파업이 길어지면서,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들에 직면하면서, 많은 조합원들이 상처 받았어요. 당시 모 일간지에 이런 칼럼이 실린 적이 있어요. 연세의료원노조는 탈레반인가. 당시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 간 한국인을 살해한 적이 있었거든요. 환자들 목숨 담보로 파업한다는 얘기였죠. 신문을 보고 조합원들이 정말 많이 울었어요.

저라고 마음이 얼음벽일까요. 파업 와중에는 물론이고, 파업이 끝나고 나서도 정말 힘이 들었어요. 누가 말만 시켜도 눈물이 쏟아지던 시기였지요. 저 스스로부터 치유가 필요한 시기였는데, 차마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지요. 첫 아이를 낳았을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난산이라 수술을 했는데, 적어도 세 달은 쉬어야지 상처가 완쾌되거든요. 수술 자리가 아픈데도 병원으로 출근해야 했지요.

여성이, 그리고 모성이 강하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파업이 끝나고 현장을 추스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요. 남들이 돌팔매질하는 자리를 남자들은 대부분 피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걸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욕을 얻어듣는 자리에 가서 해명할 부분은 해명을 하고, 사과할 부분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까 직장생활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참 슬픈 게 사회에 나와서는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전에도 싸움도 하고 그랬겠지만,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미워한다는 것, 상처 주려고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처연하지요.

사실 병원 노동자들이 너무 힘든 일을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이게 같이 일을 하고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정말 일하는 것이 너무 불행한 게 되어버릴 거예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 문제를 치환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보내면서도, 일 이외의 삶이나 관계에서 대리만족을 찾게 되지요. 노동조합이 이런 걸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소통

행복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2011년 연세의료원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조합원 행복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지만, 쉽지만은 않은 화두인 거 같아요. 제 얘기를 먼저 해야겠네요. 노동조합을 알기 전까지 제 가치의 기준은 아주 단순했어요. 돈이나 명예 같은, 명품 백이 몇 개인지, 아파트의 평 수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심을 가지며, 아니면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나 신경을 쓰면서 살았을 거 같아요.

노동조합 일을 하면서도 곧바로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하면 노조에서 도망가서 간호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내 가족과 내 일만 챙기면서 알콩달콩 살 수 없을까 고민했던 적도 있어요. 나보다 힘든 사람들의 어려움이라든지,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말이죠.

노동조합 일을 오래 해 왔고, 그만큼 노동조합과 조합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선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조합원들이 바라는 것은 제가 착각했던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었어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 그리고 그런 일상이 계속되면서 그 와중에 소소한 행복을 찾아나가고 싶어 했던 거죠. 파업 집회의 선두에서 마이크를 잡았을 때처럼, 강성인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파업의 과정이 제 생각이 많이 바뀔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조합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들에 눈을 돌리게 되고, 연세의료원 파업 이후에 생긴 투쟁 사업장,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같은 현장이 남일 같아 보이지 않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직접 현안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얼마나 큰 보탬이 될지 모르겠지만, 십시일반으로 정성과 도움을 모아 드리는 것도 조합원들의 이런 자발적인 참여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조금씩 서로의 고민에 대해 마음을 열어 가고, 작은 공감이 연대의 힘으로 커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오늘을 사는 게 제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