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것도 아닌 길
누구의 것도 아닌 길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4.0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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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골목과 아래위로 이어진 계단 끝 쓸쓸한 대문
재개발로 사라지는 해 질 녘 골목, 빛바랜 삶의 흔적
[골목예찬]
한남동 해맞이길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부서진 담벼락과 헝클어진 입구의 집들은 어김없이 비어 있었다. 콘크리트 더미에는 이미 체온이 사라지고 없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누런 방문만이 그곳에 존재했던 누군가를 짐작케 했다. 언제부턴가 해맞이길은 만남보다 떠남이 익숙했다.

양팔 너비의 골목, 그만큼의 하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당신이 한남동을 부촌으로 알고 있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남동에는 재벌가와 연예인들의 집이 많다. 남쪽 한강의 ‘한’ 자와 북쪽 남산의 ‘남’ 자를 따서 지은 동네 이름처럼 풍수지리로 배산임수형의 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한남동이 있다. 강 너머에서도 보이는 언덕 꼭대기의 십자가 아래로 2~3층의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골목길로 남은 해맞이길 속 한남동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한남역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면 해맞이길이 시작된다. 골목 초입부터 가파른 언덕이다. 정작 해맞이길에서는 해를 맞이하기가 힘들다. 미로처럼 이어진 좁은 길엔 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골목도 있다. 머리 위로는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들로 가득하다. 양팔을 벌리면 손끝이 벽에 닿는다. 고개를 들면 딱 그만큼의 하늘만 보인다.

해맞이길에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하수도를 흐르는 물소리만 들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높이의 가로등은 노을빛을 내뿜으며 저녁을 알렸다. 조심스레 걸어도 발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골목길에는 누구의 것도 아닌 쓰레기와 한겨울 경사진 길에 뿌려놓았던 연탄재의 흔적만 남았다. 길가에 내어놓은 장독대와 화분들로 누군가의 존재를 짐작했다. 짐을 내려놓고 계단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는 아주머니의 머리 위로 퇴근길의 한남대교와 고층빌딩이 솟아있는 강남이 보였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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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쯤 올랐을까. 탁 트인 도깨비시장이 나왔다. 비로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얼굴들은 서로 어디 가는지를 묻고, 삼삼오오 모여 종이컵에 소주병을 기울였다. 좁은 골목에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자동차들도 지나다녔다. 길가 양쪽으로 늘어선 좌판에는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채소와 반찬거리가 즐비했다.

마을 꼭대기의 도깨비시장은 딱 백 발짝이었다. 도깨비처럼 열렸다가 닫혀서, 혹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모였다가 한순간에 빠져나가서 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다. 하지만 저녁 찬거리를 준비할 무렵에도 장 보는 이들은 서너 명뿐이었다. 아이들로 떠들썩했을 ‘왕자문방구’와 잔치를 앞두고 들떴을 ‘도깨비 떡 방아간’은 빛바랜 간판만 매단 채 문이 닫혀 있었다.

한남동 일대는 뉴타운 개발 사업으로 술렁인 지 오래다. 해맞이길 주변도 뉴타운 구역에 포함됐다. 골목 곳곳에는 재개발을 알리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용산구 한남1동 568-260 17통 5반’이었던 누군가의 주소는 ‘3-18’번의 관리 대상이 됐다. 해맞이길 일대는 계획대로라면 4~5년 후엔 재개발이 끝나고 전혀 새로운 곳이 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해맞이길도 더 이상 해맞이길이 아니다. 2009년부터 정부는 전국의 도로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길을 좀 더 찾기 쉽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해맞이길도 ‘대사관로 ○○길’, ‘장문로 ○○길’ 등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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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은 끊긴 듯하면 이어지고, 연결된 듯하면 막다른 곳이 나왔다. 아래위로 난 계단 끝이면 어김없이 대문이 나타났다. 한 집 건너 빈집이었다. 녹이 슬고 찌그러진 대문 사이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해맞이길은 이름만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구불구불 이어진 길의 틈바구니에서 삶을 꾸리던 그네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허물어진 집터에는 이야기들도 함께 묻혔다. 해맞이길은 이따금 추억을 사진에 담으려는 이들에게 풍경으로만,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 정거장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젠 존재하지 않을 그 골목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회색 담벼락 위의 빨간 조화만이 그 모습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