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업 경영권 방어 저지선 무너지나
주요기업 경영권 방어 저지선 무너지나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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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M&A, 한국경제 통째로 삼킨다
본지 입수 ‘우량 기업 적대적 M&A 시나리오’
영국 헤르메스 펀드 “삼성물산 인수 후 전자에 손 뻗는다

 

"포스코, 국민은행, KT와 같이 국민들이 심리적으로 국민기업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본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남미 순방길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시장에서 다양한 해석을 불러왔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적대적 M&A에 대한 대응책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역으로 우리기업의 경영권 방어선이 이미 무너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흘러나왔다.
 
 

“최후 목표는 삼성전자다”


문제는 노대통령의 언급처럼 ‘심리적 국민기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민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대기업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지난 9월, 삼성 SDI가 삼성물산 주식 700억원어치를 사들이자 시장에서는 ‘삼성그룹의 사정이 급해졌다’는 분석이 나돌았다. SDI는 출자 이유를 ‘자금운용의 효율성’이라고 밝혔으나,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증권전문가들은 SDI가 삼성물산의 주가 상승으로 부담이 큰데도 주식매입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삼성물산의 경영권 방어에 ‘적신호’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소버린의 SK(주) 경영권 인수 시도가 있었던 지난 3월, 영국계 연기금 투자펀드인 헤르메스가 삼성물산 지분 5% 매입을 공시했다.

 

이로써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로 떠오른 헤르메스는 ▲삼성전자 주식 592만주(시가 2조6천억원) 매각 ▲상사부문 철수 또는 분리매각 ▲삼성물산 우선주 465만주 (시가 381억원) 매입 소각을 요구했다.

 

지분 매입과 동시에 우선주 소각 등의 요구는 예상된 것이었지만복병은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헤르메스가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

 

본지가 10월초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헤르메스는 삼성물산측에 “향후 1~2년 내에 삼성전자를 지배하기 위해 최대 주주인 삼성물산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가 반드시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삼성물산 경영권 장악 후 삼성 브랜드 50%를 일본 SONY사에 팔아넘기는 외국 투자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억지주장은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헤르메스는 영국계 연기금 전문운용회사로 세계적으로 410억 파운드(약 86조원) 규모의 자금 운용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삼성물산 주식 50%를 보유하는 데 드는 자금은 약 8억 달러로, 삼성물산 주식 50%를 보유하면 삼성전자 주식의 4%에 해당하는 592만주를 지배할 수 있다”고 전했다.

 

툭하면 경영권 협박, “우리사주제도도 없애라”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경영진 교체 협박도 있다. 운용자산 7억 달러, 유럽 최대규모의 헤지펀드인 TCI는 11월
초 기업설명회를 위해 영국을 방문한 KT&G 곽영균 사장을 만나 자사주를 모두 소각하지 않으면 다른 외국계 기관들과 연합해 경영진을 갈아치우겠다고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KT&G가 소유하고 있는 자사주는 14%로 이를 모두 소각하면 주당가치가 크게 높아져 주가상승에 따른 차익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KT&G 관계자는 “실제 경영권보다는 배당 차익을 챙기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TCI 펀드가 KT&G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한 것은 이 회사가 중장기 자사주 매입·소각 계획을 밝힌 올해 초 이후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 KT&G는 2008년까지 전체 주식 가운데 24%를 자사주로 사들인 뒤 14%를 소각하고 10%는 남겨서 우리사주조합 등에 분배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TCI 펀드는 우리사주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7%에 이르는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언급하면서 ‘근로자와 경영진이 연합해서 경영권을 지키려는 것은 불공정한 조치’라고 불만을 토로한 것.

 

KT&G 노동조합의 이청호 기획국장은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지속적으로 늘려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나온 요구라서 당황스럽지만 일단은 사실관계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회사는 일단 단기차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주식시장에서는 다른 진단도 나온다.

 

한 애널리스트는 “KT&G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격 때문에 단순한 단기 차익 챙기기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담배판매가 사실상 전매로 이루어져 수익이 안정적이고 수입자체도 국세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애널리스트는 “경영권 위협이 단순히 단기 차익을 노리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고 해도 KT&G의 외국인 지분율이 56%에 이르기 때문에 경영진 교체 요구에 태연할 수 만은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속속 갖춰지는 적대적 M&A 유발 동기

 

97년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개방에 따른 외국인 투자의 증가는 적대적 M&A 유인을 지속적으로 키워왔다
 

현재 시가총액 상위 20개사의 외국인 보유주식은 116.8조원 규모로 총 주식 보유비중의 70%를 넘어섰다. 외국인이 2대 주주로 있어 경영권을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는 상장사만해도 138개에 이른다. 외국 자본이 마음먹고 덤벼든다면 경영권이 넘어가는 회사가 속출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정학적인 위험 때문에 우리 기업의 주식이 저평가 되어 있는 것도 외국자본이 군침을 흘리는 이유다. 일례로 삼성전자 주가수익률은 약 6억으로 외국경쟁사의 평균 29억보다 1/5가량 저평가 되어 있다. 주식을 저가에 인수한 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투자자금 조기 회수는 물론 차익을 실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현실적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보자면 국제 투기자본이 삼성전자를 M&A한 후 뉴욕 등으로 본사를 이전할 경우 상당한 차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의 법·규정 등을 충분히 익힌 것도 유리한 요인이다. 이는 소버린의 SK(주) 주식 보유와 이후 지분 분산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소버린은 작년 상반기에 SK 주식을 매수하면서 보유지분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수준인 14.99%까지 매수했다.

 

왜 하필이면 15%도 아니고 14.99%인가. 당시 소버린이  주식을 15% 이상 보유하게 되면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SK의 SK텔레콤 보유지분이 외국인 지분으로 분류돼 SK텔레콤의 외국인 지분한도가 49%를 넘어 서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SK는 SK텔레콤 지분 20.85% 가운데 외국인 보유지분 한도를 넘어선 12%에 대한 의결권을 잃게 되는 등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 또 SK 텔레콤은 기간통신사업자의 자격을 잃을 수 있어 신규사업 진출 등 영업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LG 경제연구원 박상수 책임연구원은 “외국자본은 자신의 이익에 손상을 받지 않으면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토종기업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이 속속 현실화되면서 여야의원들은 외국자본의 적대적 기업인수에 대한 경영권 방어를 골자로 한 증권거래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재계도 속속 대응책 마련에 나서는 모습이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M&A설이 언론에 등장하고 증권가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 이미 M&A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협상만 남겨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조치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미 위험 수위에 다다른 우리 기업의 경영권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취재여록


‘외국자본의 횡포’가 국내 기업 ‘면죄부’는 아니다


최근 내로라하는 일간지의 경제면은 외국자본의 적대적 M&A우려를 다루는데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99년 주요 일간지의 기사 중 외국자본의 한국경제 잠식을 우려하던 기사가 단 9건이던 것이 2000년 34건으로 늘어 2001~02년에는 40여 건 내외를 유지하다 2003년 113건으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올해에는 5월부터 11월까지 보도 건수만 합쳐도 지난 5년간의 보도량을 육박한다. 모든 언론사가 연합해 공동 캠페인을 벌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 재계 인사는 “포스코가 민영화될 당시에 이미 외국자본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며 “현재 적대적 M&A 방어책으로 오르내리는 온갖 방법들이 등이 모두 당시 경제전문가들과 그룹관계자들에 의해 제기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우리 알짜기업의 경영권을 외국 자본 손에 넘겨주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입장만 되풀이 했고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퍼다 나르기에 바빴다고 쓴소리를 했다.

‘상황이 변했다’는 논리로 면죄부를 받기는 글렀다. 자본시장 전면 자유화와 동시에 이미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다. 게다가 예견된 결과를 놓고도 ‘우리 경제에 별 이상이 없다’는 정부입장만 앵무새처럼 떠들다가 스스로의 발등을 찍었던 IMF 위기의 ‘역사적 경험’까지 있지 않은가.

실제로 취재과정에서 만난 여러 기업의 관계자들과 학자들은 이미 늦었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시바삐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었던’ 지난 경제위기 때의 무거운 짐을 또다시 짊어져야 할지 모른다.

대책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우려스러운것은 언론의 집중 포화 속에서 ‘외국자본은 나쁜 편, 우리자본은 좋은 편’이라는 의식이 은연중에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 자본에 화살이 돌아가면서 재벌의 투자기피와 1인 지배 체제로 인한 경영 부실 등은 은근슬쩍 꼬리를 감췄다. 외국자본은 ‘절대적 악’으로 우리기업의 경영권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켜야 할 ‘최고의 선’으로 등치된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기업이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소홀했던 것도, 내실화는 기하지 않고 덩치와 총수의 지배권만을 키워왔던 것도 모두 외국 자본 탓일까. 그래서 결국 외국자본으로부터 우리기업을 지켜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우리기업의 경영권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외부 환경’ 때문에 ‘내부 개혁’을 잠깐 미뤄야 한다는 ‘상황논리의 정당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간 무수한 상황논리 속에서 재벌 개혁이 미뤄져온 결과 한국 경제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