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성장 잠재력 야금야금
한국경제 성장 잠재력 야금야금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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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M&A, “뭐니 뭐니 해도 현금이 최고”
5대기업 설비투자금액 절반 경영권 방어에 소진

주요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하지 않는 현상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5대 기업의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비율은 지난 2002년 말 10.3%, 2003년 말 11.7%에 이어 올 상반기에는 12.6%로 높아졌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포스코, SK 등 매출액 기준 상위 5개사의 현금성 자산은 2004년 상반기 14조4798억원에 달했다. 이는 이들 5대 기업 총자산 114조8000억원의 12.6%에 해당하는 규모다.


반면 설비투자는 지난 2003년 2/4분기 이래 4분기 연속 감소세를 지속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설비투자가 4분기 이상 연속 감소한 것은 2차 오일쇼크 시기였던 1979~81년과 외환위기 시기 등 5차례에 불과했다.

 

치솟는 고배당 요구에 현금 짊어지고도 ‘좌불안석’


기업들은 불확실한 경영상황과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문제를 단골 메뉴로 내세우고 있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다.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따른 경영권 위협이 증가하면서 경영권 방어와 외국인 주주의 고배당 요구를 맞추기 위해 현금을 쌓아두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인의 주식보유 비중이 큰 기업일수록 배당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1월 한국은행이 상장·등록 기업 1560곳을 대상으로 외국인 지분 보유 비중과 배당률을 조사한 결과 외국인 지분이 40% 이상인 기업의 배당률은 41.0%에 이르렀다.

 

외국인 지분율 10% 이내인 기업 평균 배당률 9.0% ▲10~20% 미만 12.0% ▲20~30% 미만 16.7% ▲30~40% 미만 20.6% 임을 고려하면 외국인 지분율과 배당률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을 두고 증권업계에서는 외국인들이 국내 기업의 순이익과 현금보유액의 상당 부분을 배당에 사용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실제로 증권시장에서 통용되는 추천종목에는 ‘현금성 자산 비율이 높은 기업’이 항상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대우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시가총액 대비 현금성자산 비율이 높을 경우 언제든 M&A 가능성이 대두될 수 있고 배당금 여력도 높아 늘 추천 종목에 오른다”고 말했다.

 

점점 거세지는 외국인 주주의 입김 때문에 배당금을 높였지만 높아진 배당금은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원 수석연구원은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 주주는 대부분 단기 투자 이익을 노리고 있어서 기업의 현금보유액이 높아질수록 배당금 확대 요구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경영권방어 총력, 설비투자 생각할 여유 없다


특히 올 상반기에는 상장기업이 경영권 방어와 자사주 보유총액을 늘리기 위해 설비투자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자금을 쏟아 부은 것으로 드러났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004년 상반기 상장기업의 자사주 순취득금액은 3조6천억원으로 시설투자비 8조3천억원의 절반에 다다랐다. 삼성전자를 제외할 경우 자사주 순취득금액(1조6천억원)이 시설투자(2조2천억원)에 육박했다.

 

신규 설비투자는커녕 현금 확보를 위해 기존 설비를 매각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체의 연평균 유형자산 매각액은 15억3천만원으로 외환위기 이전의 8억8천만원보다 훨씬 늘었다. 기업이 설비투자는커녕 오히려 자산을 팔아 현금화하는 이른바 ‘탈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외국인 주주들의 요구와 정확히 맞물린다는 데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코스피 200지수’ 편입 기업들을 대상으로 ‘외국인 주주의 주요 요구사항’에 관해 설문을 실시한 결과, ‘투자대신 배당 확대’가 47.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에서 무조건 현금이 효자라는 식의 인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외국인 주주 요구, 경제성장 걸림돌로


기업의 설비투자는 고용창출 및 경제성장의 열쇠다. 투자부진이 계속되면 경제성장 둔화와 국민생활 수준 악화라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뚝 떨어졌던 설비투자 규모는 회복은커녕 ▲2000년 12.8% ▲2002년 10.4% ▲ 2003년 9.5%로 점점 더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다.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향후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이계화 수석연구원은 “국내 주식의 저평가, 달러 약세 지속으로 인한 미국투자자금의 해외 투자 촉진 등의 요인으로 당분간 외국인 주식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지분구조가 취약한 국내 기업들은 M&A 위협에 쉽게 노출되어 있어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기회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외국인 주주들의 현금배당 요구가 높아질수록 대규모 투자는 더욱 어려워진다. 경제구조의 고도화를 위해 지속적인 R&D 투자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신규 R&D는 꿈도 못 꾼다는 게 경영권 위협에 노출된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수출호조→투자 및 고용확대→소비증가’라는 우리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약화된 지 오래다. 외국인 주주의 경영권 위협이 이 고리를 아예 끊어 놓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등장했다. IMF 이전에 비해 국가 경제나 기업의 투자자금은 풍부해졌지만 투자로 가는 대로가 꽉 막혀버린 탓이다.

 

적대적 M&A에 대비하랴, 외국인 주주들의 고배당 요구를 들어주랴 새해를 앞둔 우리기업의 금고는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로 전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