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을 프린터로 ‘인쇄’한다고?
권총을 프린터로 ‘인쇄’한다고?
  • 참여와혁신
  • 승인 2013.06.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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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로 만드는 세상 … 나만의 제품 생산
자전거·비행기·배아줄기 세포·인공 귀까지 … 제조업 혁신

과학칼럼니스트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프린터’는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글씨나 그림을 종이 위에 찍어내는 기계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설계도에 그려진 그대로 입체적인 물건을 만들어내는 ‘3차원(3D) 프린터’가 대세다. 지난 5월 4일에는 미국에서 3D 프린터로 찍어낸 권총을 이용해 진짜 총알을 발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누구나 설계도만 받으면 손쉽게 무기까지 만들 수 있는 3D 프린팅 기술은 무엇이며, 이 기술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줄까?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작업이 성공했습니다.”

3D 프린터로 만든 권총으로 시험발사에 성공하며 디펜스디스트리뷰티드 그룹 대표인 코디 윌슨이 한 말이다. 그가 이 권총을 만드는 데 사용한 것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약 870만 원 정도에 판매하는 3D 프린터와 권총 각 부분을 채우는 재료가 전부였다. 설계도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3D 프린터가 이것을 분석해 재료를 수많은 층으로 쌓아 3차원으로 이뤄진 권총을 만든다. 설계도만 있으면 무엇이든 척척 만들 수 있는 혁명적인 기술인 셈이다.

이 신기한 기계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건 1980년대 초반이다. 미국 3D시스템즈 사가 플라스틱 액체를 굳혀 물건을 만드는 프린터를 개발한 것. 원래 이 기계의 목적은 시제품을 만들어 실제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값싸고 모양을 만들기 좋은 재료로 실제 제품과 똑같이 생긴 시제품을 만들어 보면 실제 상품의 문제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차 3D 프린터의 가격이 내려가고 프린팅 속도가 빨라지면서 시제품 제작뿐만 아니라 산업 분야의 생산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술로 3D 프린팅이 주목 받고 있다. 이 기술은 자동차나 가전제품, 의료기기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혁신적인 제품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에서는 3D 프린터를 2013년 10대 유망기술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설계도 따라 ‘쌓거나’ ‘깎거나’

3D 프린터는 재료를 쌓거나 깎는 방식으로 물체의 형상을 만든다. 재료를 쌓는 방식을 ‘쾌속조형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 방식의 3D 프린터에 설계도를 입력하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물건을 마치 미분하듯이 가로로 1만 개 이상 잘게 잘라 분석한다. 이후 바닥부터 아주 얇은 층을 하나씩 쌓아 물건의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완성하게 된다.

잉크젯프린터가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잉크를 섞어 여러 가지 색깔을 만드는 것처럼 3D 프린터는 층의 넓이나 위치를 조절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기 때문에 쾌속조형 방식으로 인쇄한 물건을 현미경으로 보면 계단처럼 들쑥날쑥하다. 층이 얇으면 얇을수록 물건이 더 정교하다.

재료로는 주로 가루와 액체, 실의 형태가 쓰인다. 나일론이나 석회 등을 빻아 만든 가루를 접착제와 함께 뿌려 층을 만들면서 물건을 완성하거나, 빛을 받으면 고체로 굳어지는 플라스틱(광경화성 플라스틱)을 뿌리고 자외선을 비춰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식이다. 플라스틱을 길게 뽑아낸 실은 실타래처럼 말아놨다가 프린터에서 사용할 때 순간적으로 강한 열(700~800℃)을 가해 녹이면서 층을 만든다.

커다란 덩어리 상태의 재료를 둥근 날로 깎아 만드는 ‘컴퓨터 수치제어 조각방식’도 있다. 층을 쌓는 게 아니라 깎아내기 때문에 쾌속조형 방식에 비해 곡선부가 매끄럽다는 장점이 있지만 컵처럼 푹 들어간 모양을 만들기는 어렵다.

ⓒ 박태진
설계도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어

3D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무궁무진하다. 이미 유럽항공방위산업체(EADS)에서는 페달이나 바퀴, 안장, 몸체 등을 따로 조립할 필요가 없는 일체형 자전거 ‘에어바이크’를 만들었고, 영국 사우스햄튼 대학교에서는 나일론 가루를 쌓아 비행기를 인쇄하기도 했다. ‘설사(SULSA)’라는 이름의 이 비행기에 배터리와 엔진을 달자 시속 160km로 하늘을 날았다.

3D 프린터의 제작기법이 정교해지고 가공속도가 빨라지자 생체의학 부품을 만드는 분야에서도 새로운 성과가 나오고 있다. 우선 올해 초 영국 에든버러 헤리엇와트 대학교 연구진은 3D 프린터로 인간 배아줄기 세포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줄기세포와 배양액을 섞은 바이오잉크를 이용해 세포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이 세포가 장기조직으로 분화해 나가는 능력을 잃지 않아 놀라움을 줬다.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도 3D 프린터로 이식이 가능한 인공 귀를 제작했다. 콜라겐과 살아있는 연골세포를 이용해 인공 귀를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이 귀는 살아있는 세포로 만들었기 때문에 몸에 붙이면 자랄 수 있다. 이밖에도 혈관, 신장, 방광 등을 만드는 연구가 진행 중이며, 미래에는 부작용 없는 인공장기 개발도 가능할 전망이다.

ⓒ 박태진
꿈의 기술, 3D 프린팅은 진화 중

시험발사에 성공한 3D 프린터로 만든 권총의 설계도가 온라인에 공개되면서 이 기술과 총기 규제에 관한 논란이 뜨겁다. 설계도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무기를 만들 길이 열린 세상이 됐으니 새로운 제도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 이런 잡음과는 별개로 3D 프린터의 진화는 계속될 전망이다. 3D 프린팅 기술이 누구라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자기만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을 열었기 때문이다.

인쇄 버튼만 누르면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미래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밀가루와 설탕, 초콜릿을 넣어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바늘과 실이 없이도 개성 넘치는 옷을 지을 수 있는 미래 말이다. 집집마다 3D 프린터를 한 대씩 들여놓게 될 그날이 되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