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서울 사이 어디쯤
하늘과 서울 사이 어디쯤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6.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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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마주한 108계단과 벽화의 은밀한 속살
수직으로 솟은 무질서한 계단, 남산 아래 첫 동네
[골목예찬]
후암동 두텁바위길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남산 쪽으로 난 길에 접어든다. 오르막이 이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팔트에 하얗게 쓰인 ‘막다른 길’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골목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틈새로 계단이 놓였고, 집 위로 또 집을 품었다. 남산 자락의 비탈을 따라 자꾸만 위로 솟았다. 고개를 돌리자 발밑에 서울의 모습이 펼쳐진다. 남산 아래 첫 동네에서 본 경치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바로 그곳, 하늘과 서울 사이 어디쯤 후암동이 있다.

적막과는 다른, 평온한 고요

고작 10분 걸었을 뿐인데도 땀방울이 맺힌다. 여름을 재촉하는 한낮의 봄볕이 뜨겁다. 숙대입구역에서 미군부대와 용산중·고등학교를 차례로 지나면 후암동 종점 로터리를 만난다. 동네 사람들을 가득 태운 마을버스가 빙그르르 돌며 오가는 곳이다. 후암동의 입구와도 같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후암동의 첫인상은 서울의 여느 동네와는 다르다. 큼지막한 나무 아래의 쉼터는 시골 마을 초입의 평상인 듯도 하고, 골목에서 뻗어 나온 광장인 듯도 하다. 골목길은 돌고 돌아 종점 로터리로 스며든다. 후암동의 골목길들이 강이라면 종점 로터리는 바다인 셈이다.

드라마에 등장하고 입소문을 타며 널리 알려진 108계단도 로터리의 모퉁이에서 시작된다. 해방촌으로 오르는 길이다. 108계단은 일제 강점기에 놓였다. 원래는 남산에 세워졌던 일본 신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당시 후암동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래서 아직도 후암동에서는 적산가옥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두텁바위길은 후암동을 동서로 나눈다. 서쪽의 서울역 방향, 108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벽화가 이어진다. 장독대와 봄꽃이 그려진, 때로는 담 위로 삐져나온 나무를 그림으로 이은 벽화들은 마치 담벼락 안의 은밀한 속살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기엔 일상이 담겨 있다.

적막과는 다른, 평온한 고요 속의 골목에서는 간간히 피아노 소리가 흐른다. 하굣길에 나선 교복 입은 학생들의 장난치는 소리도 흩어진다. 이따금씩 깨어지는 고요가 싫지만은 않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은 리듬을 맞춘다. 어지러운 전선 위의 남산을 바라보며 걸으면 다시 종점 로터리가 나온다. 이번에는 남산 방향, 동쪽의 후암동으로 향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비탈을 거스르지 않은 무질서


“이상한 산동네 왔슈?” 등산로라고 해도 무방할 계단을 오르자 곱게 단장한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와 말을 건넨다.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경치를 넋 놓고 바라보던 참이다. 할머니는 1965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예전에는 저렇게 건물들이 없었어. 저기 63층짜리 빌딩밖에 안 보였거든.” 할머니는 이내 담벼락에 늘어선 화단에 눈을 돌린다. 소일거리로 직접 키운다는 꽃들을 매만진다. “이 꽃들 봐. 얼마나 예쁜지. 여기 들깨 나는 것 좀 봐. 심지도 않았는데 저 위에서 내려와서 수도 없이 나.” 할머니의 손끝에는 엄지손가락만한 깻잎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오밀조밀한 깻잎들은 아래로 보이는 후암동 골목의 지붕들을 닮았다. 할머니는 깻잎이 신기한지 연신 들여다보더니 맞은편 대문에서 나온 이웃 할아버지에게도 자랑을 늘어놓는다.

후암동 골목길을 누비는 건 남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다. 구불구불 이어지고 수직으로 솟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남산 중턱에 다다른다. 남산타워 또한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남산 자락의 비탈을 거스르지 않은 후암동의 골목길은 계단들로 이루어진 수직적 구조 탓에 유난히 무질서한 모습이다. 하지만 제멋대로 난 길 같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후암동 골목길에서는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지 않다. 스티로폼 상자에서도 상추가 자라고, 좁은 공간마저도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곳에 깃든 삶이 바로 골목이 존재하는 이유다.

다시 108계단이다. 계단 중턱에서 노란 유치원 가방을 손에 든 할아버지와 손녀가 가위바위보를 한다. 한 번 이길 때마다 할아버지는 10개씩, 손녀는 20개씩 오른다. 계단을 세기가 버거운지 갑자기 꼬마가 성큼성큼 내닫는다. “그냥 올라가면 반칙이야.” 계단을 오르는 꼬마의 날랜 발걸음 뒤로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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