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삶, 새로운 판이 깔렸다
은퇴 후 삶, 새로운 판이 깔렸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3.06.0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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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기관 ‘공포 마케팅’에 변질된 노후대책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미래를 준비하자
[기획인터뷰 2] 우재룡 서울은퇴자협동조합 이사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두 아이의 아빠이자 40대 가장인 A씨. 요즘 동년배들과 술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화제 중 하나가 노후대비 문제이다. 부족함 없이 먹고 살 만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계속 싹튼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지출은 계속 늘어간다. 남들보다 일찍 직장에서 은퇴한 친구들은 여유가 있을 때 대비를 해 놓으라고 조언한다. 이러다 덜컥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나기도 한다.

30여 년간 국내 최고의 금융전문가이자 은퇴설계 전문가로 살아온 우재룡 서울은퇴자협동조합 이사장은 이처럼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은퇴한 이들이 미래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자고 설득하고 있다. 보험이나 연금, 금융상품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힘으로 노후의 삶을 준비해 가자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현실론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상론으로 돌아선 돈키호테의 역설일까? 우 이사장의 목소리를 옮겨 본다.

노후 준비에 돈은 일부분

과거의 이력에서부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습까지, 생각의 궤적이 바뀌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해 보니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지난 1999년부터 노후대비 자금을 책정하는 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해 왔다. 미국의 금융회사들이 쓰는 기법이다. 노후대비 자금으로 5억 원이 필요하다, 10억 원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에는 막연한 개념이었는데, 복잡한 재무계산기를 두드려 구체적인 액수를 뽑아내는 것이니 얼마나 멋있는 방법이었나. 교재를 쓰고 금융인들에게 이 기법을 가르쳐 왔는데, 지금까지 십 삼사 년간 한 20만 명이 배운 것 같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나쁜 놈이 돼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나 빨리 준비하라고 다그치는 장본인이 돼 있는 거다.

노후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돈은 일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돼 버린 것처럼 얘기해야 하니까 책임감이 더욱 커졌다. 사실 돈은 삶의 일부분이지 않나. 돈이 없으면 불편한 것이지, 전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지 않나. 불편함도 극복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삼성생명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는 박사 연구원들과 함께 전 세계의 노후대비 모델에 대해서 연구했다. 특히 비 재무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돈 아닌 삶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이나 유럽 등 전 세계에 이와 같은 삶이 분명이 있었다.”

특별히 인상적인 모델이 있었나?

“공동체는 주거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반경이 점점 더 좁아지기 마련이다. 앉은 자리가 팔자라는 말이 역학에도 있듯이, 어디에 사느냐가 자신에게 운명으로 다가오는 거다.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 안에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먹을거리, 삶이 형성되는 거다. 그래서 보통 노후 준비 문제를 주거를 중심으로 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금, 보험 같은 것으로. 주거 역시 자산으로서의 개념이 우선시된다.

미국의 경우 굉장히 유명한 사례가 선 시티라는 곳이다. 애리조나 주의 사막 한 가운데에 8만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 사는 은퇴자들의 도시이다. 1960년 1월 1일에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50년 전에 미국에선 이와 같은 실험을 해본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요양원을 늘리고, 실버타운을 조성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55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아서 만든 인위적인 공동체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즐기라는 것이다. 노인 공화국이다. 그러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진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는 거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휘할 틈도 없고, 뭔가 사회와 후대에 전달해 주거나 의미를 찾는 게 없는 사회가 돼버린다.

수용소와 같은 공간이 아닐까? 매일 죽어나가는 모습만 보게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안락하다. 매일 골프를 치면서. 하지만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그런 안락함에서 찾는 건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로 죽을 때 관에다 지갑을 넣고 가는 사람은 없지 않나. 무언가 다른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였던 데다가 구성원이 공동체에 굉장히 엉켜서 살던 문화였다. 사생활이 너무 없었다. 닭 한 마리도 못 잡아먹을 정도였다. 굶고 있을지 모르는 옆집에 냄새가 나니까. 사생활이 없는 과도한 공동체에 대한 반발도 있었을 거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것 역시 너무 과도하게 고립돼 있다. 아파트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나올 수 없는 굉장히 희한한 문화가 자리 잡았다. 도시화율이 90%를 넘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문을 닫아 놓고 있으면 옆집에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노후자금을 준비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노년에 연금 많이 받으면서 집 안에서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삼십 년을 살아야 되는 건 아니지 않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부정적 이미지의 노후, 공포마케팅?

그래서인지 은퇴 후 노후의 삶에 대해서도 대단히 막연한 상을 갖고 있는 거 같다.

“은퇴 후 꿈에 대해서 물어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답변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얘기이다. 그 다음이 전원생활이라고 한다. 나는 절대로 도심에서 빠져 나가지 말라고 한다. 은퇴하지 말라고 권한다. 직장에서 물러나는 것은 퇴직일 따름이다. 사회에서 물러나면 안 된다.

우리가 여행만 다니면서 삶을 끝낼 수는 없다. 그 삶이 바람직한 삶일까. 내가 꼭 동경의 뒷골목에서 죽어가야 할까. 아니면 터키의 시장통에서 죽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여행도 전원생활도 소극적인 생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삶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보질 못했다. 전부 생계 위주로 살아왔던 거다. 과거에는 생계를 위해,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살아오다 은퇴를 하고 벌이가 끝나면 10여 년 후에 돌아가셨다. 은퇴 후 기간이 짧았다. 거기다 손주들도 많았고. 가정과 사회로부터 속박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지금은 은퇴 후 삶이 30년이다. 아직 100세 문화는 아니고 90세에 근접해 있다. 물론 금융기관은 100세 시대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지만(웃음). 교육 수준이 높아진데다가 자녀 수가 적으니 육아부담도 줄었다. 과거처럼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며 노후를 기대기도 어려워졌다. 한적한 시기에 두 부부가 고민을 시작하는 거다. 앞으로 이렇게 등산만 하면서 살아야 하나, TV만 하루에 다섯 시간씩 보면서 지내야 하나. 드디어 삶의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드디어 라이프 플랜, 생애 설계의 개념이 들어온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하려는 것도 은퇴 설계가 아닌 생애 설계의 개념이다. 그건 절대 돈이 아니다. 오히려 벌지 말고 다 써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거다. 은퇴자들은 당황스럽다. 재취업에 창업에, 온갖 일에 방황을 하고 다닌다. 뭔가 제대로 된 은퇴자들을 위한 코어를 만들어 보자는 주장이다. 의미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고, 또 이것을 성공시키자는 것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일거리들도 신중하게 검토되고 있다. 간병이라든지 자원봉사, 자기계발, 그리고 나머지가 사회 활동인데 이것은 다소나마 경제적 소득을 가져올 수 있는 활동을 말한다. 이게 바로 ‘공동체 속에서 나이들기’ 모델이라는 것이다. 전원에서 나이들기나 여행하며 나이들기가 아니라.

은퇴 생활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후원, 지지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게 서울은퇴자협동조합의 비전이다. 정부기관이나 민간에서 운영하는 비슷한 성격의 과정이 많이 있다. 문제는 이런 곳들은 실적이 중요하다보니 뭔가를 자꾸 가르쳐서 빨리빨리 내보내는 것에 급급하다. 뭘 느끼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한번 대화해 볼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사시라는 거다.

한 조합원과 이야기를 해 보니, 은퇴 후 2, 3년 동안 하는 게 없으니까 몇 십 군데에서 이와 같은 교육을 받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군데도 이렇다 할 만한 과정이 없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엔 동료가 중요하고 네트워크가 중요한 것인데 일방적으로 뭔가를 쏟아 붓기만 했다는 것이다.

사실 네트워크가 아니라 커뮤니티라고 보아야 한다. 선배들을 보고 배우며, 후배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하면서 자기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 이게 꼭 재취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재취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2, 3년이면 다시 잘리게 된다. 은퇴자는 앞으로도 이삼십 년을 더 달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럴 때 우리 협동조합이 생각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퇴자들은 외롭다. 누구도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다. 본인이 알아서 전직센터를 찾아야 하고 이력서를 내야 한다. 전원생활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주변의 친구 두세 명이 곁에 있지 공동체라는 게 없다. 가족과 친구는 공동체의 극히 일부이다.

예를 들어 노후에 병이 들거나 해서 요양원에 들어가려면 돈이 많이 든다. 공동체 안에서는 생각보다 돈이 별로 안 든다. 그리고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다. 오십 대 은퇴자들이 은퇴자 공동체 안에서 팔구십 대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일종의 품앗이 개념으로 나중에 그들이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무작정 헌신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크레딧을 쌓아나가는 방법으로, 마치 현실 사회에서 화폐를 교환수단으로 사용하듯이 말이다.

우리처럼 노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나라를 찾아보기도 힘든 거 같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포이다. 국적불명의 이상한 노후준비 방법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 오십 대에 은퇴한 이들은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다. 돈이 들어갈 데는 많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금융회사는 절대로 당신이 넉넉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품을 팔기 위해 공포 마케팅을 하는 것이고, 모든 계층한테 잘 먹혀든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심리적·사회적·경제적 자립 꿈꾼다

서울은퇴자협동조합이 추진할 사업은 어떤 것들인가?

“소극적으로 회비를 내면서 서비스를 구매하는 그런 단체는 지양하려고 한다. 세 가지 정도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우선 생애 설계 부분을 들 수 있겠다. 각 기업에서도 은퇴자를 위한 교육을 많이 수행하고 있고, 또 전직 교육이 의무화되고 있는 추세다. 거기서 이력서 쓰는 법, 면접 요령 같은 것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내용이다.

의무적으로 조합원들을 위해 이런 과정들을 고민했는데, 조합 설립 불과 한 달여 만에 다른 기업이나 단체 등에서 많이 의뢰가 온다. 한 해에 몇 백 명씩 내보내야 하는 기업에서 이들을 위해 창업 강좌를 운영한다고 하면, 심지어 창업을 해본 적도 없는 컨설턴트들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이 수익 사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창업, 창직과 관련된 부분이다. 재취업이 아니라 일을 만들어 내자는 개념이다. 베이비부머처럼 네트워크가 많고 자산이 많은 계층이 어디 있겠나. 이를 충분히 활용하자는 개념이다.

나머지는 공동구매와 관련된 부분인데, 아직은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지 않지만, 향후에는 보험, 의료 상품들을 다수가 저렴하게 구매하고 소비자로서 권익을 보호하자는 취지다.

아직은 조합원들에게도 협동조합이라는 개념이 낯설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조합에 가입하면 무슨 혜택이 돌아오느냐는 것이다. 주식을 하는 것처럼, 무언가 구매를 하는 소비자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이나 장점이 금방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워낙에 수동적인 개인으로 살아왔으니까.

개별 조합원이 주체고 주인이 되는 것이 협동조합의 정신이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입니다, 언제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서 얘기하세요, 왜 안 해주냐고 고함지를 게 아니라 조합에 오셔서 회의에 올리고 동료들과 대화해서 추진하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놀랍게도 본능적으로 이 내용을 알아듣더라.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조합을 통해 구현하라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판이 깔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