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우린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7.0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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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미술학원 그만두고 여유를 찾아 나선 두 사람
낙후된 행궁동에 예술 심으며 시작한 이웃과의 삶
[사람향기] ‘대안공간 눈’ 김정집, 이윤숙 부부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처음아침길’과 ‘사랑하다길’이 만나는 길목의 집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벽에 붙은 타일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물감이 묻은 작은 집이었다. 화단 둘레에는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조그만 연못에선 금붕어 세 마리가 헤엄쳤다. 하얀 벽과 커다란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전시관에는 행궁동을 나름의 시각으로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화단 맞은편의 카페로 들어서자 ‘대안공간 눈’의 이윤숙 대표가 맞았다. 향기 맡으러 오라며 반기던 수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였다.

집 밖으로 아무도 안 나오던 동네

▲ 이윤숙 ‘대안공간 눈’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이윤숙 대표의 손가락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조각가라고 했다. 한창 작업 중인 줄 알았다.

“요새 오디 철이잖아요.”

이윤숙 대표는 작업실 겸 살림집이 있는 화성시 봉담에서 남편 김정집 관장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오전 내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정오가 되면 수원시 행궁동‘대안공간 눈’으로 온다.

“건강한 땅에서 나는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콩도 심고, 이것저것 키웠는데 요즘엔 시간이 없어서 나무를 심다 보니 밭이 다 나무로 둘러싸였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 할 일 있으면 나무로 줘요.”

원래 ‘대안공간 눈’이 두 사람의 집이었다. 김정집 관장의 아버지가 47년 전에 직접 지은 건물이다.

“아버님이 토목을 하셨다는데 손재주가 많으셨던 거지. 중고 자재를 여기저기서 모아 지으셨다고 해요.”

당시에는 동네 사람들이 구경 올 만큼 튀는 집이었다. 그랬던 집이 애물단지가 됐다. 동네가 낙후되기 시작하면서였다. 골목은 담배꽁초와 오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생들이 몰려와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

▲ ‘대안공간 눈’ 전경. 47년 전 김정집 관장의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의 원형을 그대로 남긴 채 인테리어만 새롭게 바꾸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위험하니까 사람들이 아예 안 다니고, 어르신들은 집 밖으로 안 나올 정도였어요.”

화성 성곽화 사업 이야기도 들렸다. 동네를 없애고 민속촌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시끌벅적했지만 정작 성 안 사람들이 사는 환경은 뒷걸음질 쳤다. 김정집 관장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은 기로에 놓였다. 팔리지도 않았다. 마침 두 사람이 미술학원을 접고 쉬고 있을 때였다.

느리지만 조화로운 삶을 꿈꾸며

김정집, 이윤숙 부부는 입시미술학원을 운영했다. 이윤숙 대표가 원장이었고, 김정집 관장은 학원 운영과 3층짜리 건물의 관리를 맡았다. 미술학원이 지금처럼 시간을 정해서 체계적으로 돌아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끝나기 일쑤였고, 일요일도 따로 없었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더 심했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왔다.

1999년,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였을 시기였다. 김정집 관장은 사무실 밖을 내다보다가 우연히 이윤숙 대표가 학생을 꾸짖는 모습을 봤다.

“학생을 야단치는데 감정이 섞여있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가 학원을 너무 오래 해서 지겨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만둘까?’ 물어봤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하는 거예요.”

이윤숙 대표는 여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책 <조화로운 삶>을 읽으면서였다.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고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 그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자연과 호흡하면서 여행 다니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과감하게 학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배낭 하나만 짊어졌다. 2~3년 동안 따로 또 같이 백두대간을 가고, 인도·네팔을 돌아다녔다. 그럴수록 조화로운 삶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깊어졌다. 조금은 느릴지라도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체질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김정집 관장은 행궁동의 집을 떠올렸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작가들과 함께 꾸민 아버지의 집

두 사람이 ‘대안공간 눈’을 준비했을 무렵, 수원에는 미술관이 하나도 없었다. 외부에 비춰진 ‘문화도시’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원에서 가르치던 제자들은 하나둘 작가로 성장했지만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너무 안 좋았다. 전시회 한 번 하려면 많은 돈을 내고 서울을 오가야 했다.

김정집 관장이 화랑을 차리자고 말을 꺼냈다. 행궁동의 집을 수리하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딱히 세를 얻어서 시작할 돈도 없었다. 주변의 성곽과 어우러지면 지역이 활성화되고 제자들, 지역의 작가들에게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건축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열에 아홉은 ‘답이 안 나온다’며 허물고 다시 지으라고 했다. 고치는 돈이나 새로 짓는 돈이나 매한가지라는 말이었다. 그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김정집 관장의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은 시대의 가치가 담겨 있는 예술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직접 손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2004년의 일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시각예술은 암흑기였다. 무료로 운영하는 전시관을 준비한다는 말에 작가들이 더 들떴다. 작품을 보일 만한 공간이 부족한 작가들에겐 이들 부부의 집이 희망처럼 다가왔다. 부족한 일손은 주변 작가들이 보탰다. 공동 작업이 시작됐다. 서두르진 않았다. 여러 사람이 모인 만큼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벽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며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 김정집 ‘대안공간 눈’ 관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천천히 하면 많이 나온 얘기들 중에 하나만 고르면 되잖아요. 여러 사람이 말하면 그중에 제일 나은 걸로 하는 식이었죠.”(김정집 관장)


한 해를 꼬박 채웠다. 그리고 2005년, 많은 사람의 손때와 애정이 담긴 ‘대안공간 눈’이 문을 열었다.

회색빛 마을에 불어온 사람 향기

“시간이 흐르면서 ‘눈’의 의미가 점점 늘어났어요. 우선 정오에 문을 여니까, 눈(noon). 시각예술 활동하는 곳이니까, 눈. 낙후된 지역에 새싹과 같은 역할을 하니까, 눈. 그리고 여기 겨울에 눈 오면 되게 예뻐요.”(이윤숙 대표)

‘눈’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하는 일도 갈수록 많아졌다. 2007년부터는 주민들과 소통하는 일을 시작했다. 예술을 어려워하는 주민들의 발길이 뜸해서였다. 지역 시민단체와 ‘행궁길 발전위원회’를 꾸리고, 비어있는 집에는 작가들의 창작 공간을 만들었다. 자연스레 작가와 주민들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동네로 눈을 돌리면서 행궁동의 의미도 다르게 다가왔다.

김정집, 이윤숙 부부는 수원 토박이다. 평생을 화성 안에서 살았다. 수십 년 동안 동네 사람들의 삶을 간직한 행궁동 골목이 200년 전에 지어진 화성 못지않게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를 끌어내고 싶었다.

재작년부터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 프로젝트-행궁동 사람들’을 시작했다. 문을 연 이후 돈이 없어서 하게 된 인터넷 홍보가 큰 재산이 됐다. 인터넷을 통해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외국의 작가들도 참여했다. 경로당에서 프로그램을 열고, 어르신들의 초상화를 그려드렸다. 문패를 새로 달고, 우체통을 만들었다. 마을 담벼락도 벽화로 꾸몄다. 작가들의 일방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동네 주민들이 아이디어를 먼저 냈다. 외국 작가들이 주민들의 집에 묵으면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변화가 눈에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이 귀찮아’ ‘우리 고스톱 치기에도 바빠’ 하던 분들이 프로젝트 하는 날을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날 되면 많이 오시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죠.”

동네에도 웃음이 생겼다. 담을 사이에 두고 수십 년을 같이 살았지만 왕래가 뜸했던 곳이었다. 예전에는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던 사람들이었다. 동네가 바뀌면서 이웃들끼리 떡을 구워 나눠 주고, 부침개를 돌렸다.

“화장 안 하던 사람이 립스틱만 발라도 화사하듯이 우울했던 회색빛의 마을에 활기가 생긴 거예요. 사람 향기가 나기 시작한 거죠.”

마을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단 시작하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전시회와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작가를 모으고, 작가들의 생계를 위해 마을기업을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식당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아이디어는 절로 샘솟았다.

“동네가 더 나아질 거 같아서 어떤 일을 시작하면 다른 게 필요해지고, 또 다른 일이 떠오르니까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요즘엔 일이 너무 많아져서 남편한테 매일 혼나고 있어요.(웃음)”

멋대로 사는 것이 꿈

이윤숙 대표는 본업인 조각을 잠시 내려뒀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라요. 운영할 돈이 필요하니까 여기저기 제안서 내고 사업 챙겨야 하니 일이 많아지는 거죠. 진이 다 빠져서 작업할 여력이 없어요. 대신 행궁동을 조각한다는, 동네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이 일을 하는 거죠.”

▲ ‘대안공간 눈’의 입구. 조약돌을 눈 결정체 모양으로 깔아 놓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될 때는 새벽에야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하루에 7시간 일하기로 했지만 지키기가 쉽지 않다. 결과물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면 ‘저걸 우리가 다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윤숙 대표가 작가라서 보통 직장 생활하는 사람과는 달라요. 작가처럼 일해요. 완벽할 때까지, 자기가 마음에 들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럼 옆에 있는 사람은 죽어요.(웃음)”

두 사람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학원을 접으면서 여유로운 삶을 꿈꿨지만 좋아하는 여행도 맘 편히 못 간다. 그래도 예전처럼 지치지 않는 건 즐겁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일을 놀이처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예술 프로젝트도 그렇고, 농사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도 바뀌었다. 불편해야 건강해질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부러 움직이고 자꾸 일을 찾는다. 동네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마을의 가치를 알고 자부심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래서 꿈은 지금처럼 “멋대로 사는 것”(김정집 관장)이다.

이제 행궁동에서 예술은 일상이 됐다. 요즘엔 도시 재생이나 공동체 사업을 하는 곳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많이 온다.

“돈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동네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쉽지 않죠. 운이 엄청나게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성과가 난 거잖아요. 이 집도 그렇고, 블로그로 알려진 것도 그렇고.”

그들이 감명을 받았다는 <조화로운 삶>에서 니어링 부부는 ‘우리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날이나, 어느 달이나, 어느 해나 잘 쓰고 잘 보냈다. 우리가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고 했다. 김정집·이윤숙 부부, 그들이 바로 그랬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