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8.0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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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숨을 고른 사이 천막 옷을 입은 지붕
축대 위에서 만난 시끌벅적한 구멍가게의 여름
[골목예찬] 서울 상도동 밤골마을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안녕하세요?” 골목에서 마주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인사한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인사해?” 옆의 친구가 타박을 준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사하는 거야.” 티격태격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세 친구는 밤골마을과 작별하고 나서도 불현듯 함께 걷던 길을 떠올릴지 모른다. 추억에서만큼은 밤골마을의 낯익은 골목도 혼자가 아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서로를 감싼 나무와 지붕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축축하게 젖었다. 장마의 한가운데, 비는 잠시 숨을 고른다. 쭉 늘어선 낡은 기와집의 담벼락들은 물을 잔뜩 머금었다. “사진 찍으러 왔어요? 여기 학생들도 많이 와. 얼마 남지 않은 동네라면서 사진에 담고 싶다고. 이쪽으로 가 봐요. 되게 좋아요.”
계단에는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잡초가 무성하다. 군데군데 이미 허물어져 터만 남은 집도 보인다. 서울 동작구 상도 2동, 밤골마을은 10여 년 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밤골마을은 아직 어제의 모습이다. 재개발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마을 사람들은 적잖이 떠났다. 지금은 120여 가구만 남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며 무단출입을 금지하는 경고문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 빛이 바랬다. 마을 중턱, 문 닫은 구멍가게의 냉장고는 어느새 녹이 슬었다.
길바닥 틈새로 자라난 잡초들을 밟으며 걸으면 축대를 따라 전망 좋은 길이 펼쳐진다. 밤골마을을 동그랗게 품은 테라스와 같은 곳이다. 나무가 먼저 자랐는지, 집이 먼저 지어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나무와 지붕은 서로를 감싼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에선 길가에 면한 문지방에 걸터앉은 이웃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아저씨다. “이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 봐. 서울이 다 발바닥 아래야.”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마을 꼭대기 사랑방과 평상

텅 빈 골목에 간간이 햇볕이 내리쬔다. 쓰르라미 울음소리는 골목을 맴돈다.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뛰어 내려가는 꼬마를 지나친다. 이끌려가듯 조금 더 오르자 마을 꼭대기에 다다른다. 계단 옆 친숙한 간판의 ‘밤골상회’가 시끌벅적하다. 동네에 유일하게 남은 구멍가게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가게 주인은 서너 명의 사람들과 함께 지붕에 천막을 덮느라 한창이다. 파란 천막을 덮고 모래주머니를 얹는다. 라면을 사러 온 손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구경 나온 사람들도 평상에 머무른다. 밤골상회 건너편 컨테이너만한 사랑방에선 예닐곱 명의 어르신들이 부채질을 하며 담소를 나눈다.

밤골상회 앞으로는 능선을 따라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왼쪽에는 벽화가, 오른쪽에는 난간도 없이 활짝 열린 길이 펼쳐진다. 밤골마을을 등지고 돌아선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분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산이 손에 잡힐 듯 말 듯하다.

여름날의 밤골마을은 평소와 다르다. 오래된 기와지붕들은 한 집 건너 천막을 입었다. 혹 바람에 날아갈까 천막은 타이어와 돌들로 매무새를 단장했다. 사람들은 사다리에 올라 지붕을 매만진다. 집을 손보는 건, 아직은 밤골마을에 기대고 싶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시한부 인생인 밤골마을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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