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쉬어 가는 그 곳
바람도 쉬어 가는 그 곳
  • 홍민아 기자
  • 승인 2013.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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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따라 선 작은 마을들
담벼락 따라 걷는 좁은 골목길
[골목예찬] 수원화성 성곽 마을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좁은 골목길에 서니 바람마저 멈춘 듯하다. 구름 한 점 없이 햇볕만 쨍쨍한 날이지만, 서로 마주보고 있는 집과 집이 만든 그늘에서 틈틈이 쉬어가며 길을 걷는다. 초록색 대문 밑 그늘에 서 있으니 할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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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

수원 시내를 품에 안은 듯 쭉 뻗은 화성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창룡문이 나온다. 예전의 창룡문은 성문을 지키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오가는 사람들의 땀방울을 식혀주는 쉼터이다. 마침 어디선가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를 따라 성곽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석축 위 누각에서 아이들의 놀이가 한창이다. 뙤약볕을 피해 선선한 바람이 부는 그늘로 모여든 듯하다. 웅장함을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일지라도 동네 꼬마들에겐 한낱 놀이터에 불과하다. 누각을 지나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이렇게 시원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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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걷고 있는 한 외국인 여행자를 스쳐 바로 밑 동네로 들어선다. 작은 마을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오래 전 사람이 떠나 벽이 허물어진 빈집들과 칠을 새로 한 집들이 마주 보고 있다. 집과 집 사이에 풀이 무성한 공터가 몇 군데 있지만 그곳에 상추나 고추를 심을 수는 없다. 이 좁은 골목길은 수원화성 문화재 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담장 아래 화분과 슬레이트 지붕 위에 자신들의 텃밭을 가꾸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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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는 터줏대감인양 앉아있던 새끼 고양이가 보란 듯 발장난을 친다. 빈 집에선 찌르릉찌르릉 매미소리가 울려 퍼지고, 초록색으로 대문을 덧칠한 집에서는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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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


창룡문에서 동남각루로 가는 길 사이에 암문이 하나 있다. 축조 당시에는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밀 출입구였을 테지만 지금은 바깥 동네로 통하는 길이다.

화성 바깥에 위치한 마을은 ‘지동(池洞)’이다. 지동 역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고층건물이나 아파트 단지 등의 개발 사업이 제한돼 있어 오래된 집이나 가게가 많다. 수원의 달동네라고 불리는 이곳은 예전엔 빈집이 많고 인적도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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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마을 사람들은 입구에 서 있는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더위를 피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 뒤로 보이는 담벼락엔 새로운 이야기들이 알록달록 펼쳐져 있다.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 한 마리 옆엔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할머니가 구멍가게 앞을 서성이며 아이를 달랜다. 할머니와 장단을 맞추듯 꽃잎은 바람을 타고 담벼락을 따라 흩날린다.

회색빛의 지동 담벼락에 글과 그림이 덧입혀지기 시작한 지는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봉사를 자원한 몇몇 예술가와 학생들이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가꾸는 중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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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아 말리려고 대문 밖에 내어 둔 빨간 고추의 색이 싱싱하다. 지붕에는 새빨간 방울토마토가 알맞게 여물어 가고, 빈 담벼락 위엔 그럴듯하게 내리워진 빨래 건조대의 그림자는 기울어져간다.

아름다운 화성을 등에 지고 오랜 세월 삶의 터전을 지켜온 이들은 지붕 위에, 담벼락에, 골목길에 아직 채 마치지 못한 이야기를 새기고 있다.

바람도 쉬어가는 듯 건너편 집 마당의 감나무 잎이 한동안 조용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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