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 기억 속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이름
한진, 기억 속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이름
  • 김현정 기자
  • 승인 2013.09.0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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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가 아닌 쇠로 배를 만들 때까지
“흘린 땀만큼 대가 받고 살아가는 소박한 꿈밖에 없습니다”
[대담] 한진중공업 북콘서트

희망버스와 한진중공업의 이야기는 어느덧 기록 속에 남은 이야기가 되었다. <종이배를 접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도 한진에 대한 기록 중 하나다. 그러나 책은 ‘이것은 미완의 르포르타주’라는 문장을 당당히 보여준다. 르포르타주는 왜 미완으로 남았나. 한진중공업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미디토리
| 사회 |  오도엽 객원기자
| 대담 참석자 |
신동순 : 53세. 선각파트. 95년 입사. 2010년 8월 울산조선소에서 영도조선소로 배치전환. 크레인 사수대 4인중 한 사람. 단식농성 40일째에 병원으로 후송. 최강서 열사 장례행진 때 맨 앞에서 영정사진을 차에 싣고 지고 간 사람.
박희찬:37세. 2000년 입사. 젊은 조합원.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에서 상근하며 조직을 담당함. 1년간(2011년~2012년) 복직을 기다리며 다른 조합원들의 안부를 파악하고 사람들을 챙김. 형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조합원.
도경정 :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전 대표. 성민이 엄마. 포대기에 업고 다니던 성민이가 이제는 걸어 다니며 한창 말썽을 피움.
한은희 : ‘영도희야’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열혈연대시민. 조합원 중 누구나 ‘영도희야’라고 하면 ‘아, 열심히 한 그 사람’으로 기억.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데도 함께 밤을 지새우고 가던 사람.
한상철 : 조선소 노동자.

가슴 속으로 떨어지는 눈물

사회자 재작년인가, 제가 한진중공업 분들하고 마석 모란공원에 갔어요. 이소선 어머니 1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같은 버스를 탔습니다. 서로 마이크를 돌려가며 얘기하는데 눈물을 펑펑 흘려가며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수대, 그 힘든 걸 같이 했는데 서로 얼굴 마주 하는 것도 힘들겠죠. 저는 차마 눈 뜨고 들을 수 없어서 자는 척 했는데 가슴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때 한진중공업 기록 작업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당시 6월 27일에 강제 집행을 했죠. 비 오는 날 미리 크레인 데크에 천막을 쳐두셨다고요.

신동순 뭐 그 당시 채길용 집행부는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했어요. 사전에 ‘끌려간다’ 이런 얘길 들었고, 그래서 박성호 동지하고 ‘우리가 비 오는 날 천막을 먼저 치자’ 이랬죠. 비가 와서 회사 눈에 안 띄고 순조롭게 됐죠.

사회자 김진숙 지도위원이야 워낙 깔끔하신 분이고 이해가 되는데, 면도도 안하고 남성 4분이 그곳에서 바글바글하게 지내셨단 말이죠. 그곳 생활은 어떠셨어요?

신동순 우리가 올라가니까 회사에서는 작업이 들어왔죠. 그 밑에 용역 배치하고. 한동안 크레인 빼려고 했고.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아마 다 겪어보란 얘기는 아닌데, 실제 상황이라는 건 순간순간 생각할 여력도 없고. 우리가 2003년에 아픈 기억을 겪은 게 있어서 하여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자 당시에 사람들이 안타까워 한 건 신동순 조합원의 단식농성이었거든요. 계획을 하셨던 건가요?

신동순 당시 50일 정도 지나니까 회사도 용역도 나태해지고, 어찌 보면 우리도 나태해지고 여론이나 이런 부분도 나태해지고.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좀 이슈를 만들어보겠다 해서 그랬죠. 그런데 세상 살면서 그렇게 후회스러웠던 건 없습니다. 괜히 단식투쟁해서 먼저 내려왔잖아(웃음).

ⓒ 미디토리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되겠다

사회자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사수대 동지들도 그렇고 힘든 일이었을 텐데. 제가 처음에 책 기획안을 봤을 때 산 자와 죽은 자들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상철 전 사실 정리해고로 3년, 4년, 5년 싸울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도 막상 시작되니까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그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하고 맹세하자, 그럼 내가 스스로 도피하지 않을 거 아니냐’ 하는 생각으로 시청 앞에서 말을 했습니다. “500명 중에 한 명이 남는다면, 그게 아마 내가 될 것이다. 그게 내가 되길 바라고 그렇게 될 것이다.” 선언을 했고 제가 다수에게 약속을 걸어버린 거죠.

김 지도가 며칠 뒤에 올라갔죠. 진짜 밉더라고. 사실 그때 김 지도 싫어했어요. ‘아, 저 아줌마 왜 올라가.’ 주익이도 그렇고 박창수, 그리고 강서. 저랑 같이 한 사람 다 죽었어요. 당시엔 ‘올라가면 죽을 거다’ 그 예감에서 솔직히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 주변을 계속 맴돌았어요. 내려오기만 해라 그랬죠.

사회자 한상철 선생님이 크레인을 떠나시지 못하고 김진숙 지도위원만 바라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도경정 선생님, 가대위 대표 하실 때 애가 어렸죠? 등에 업고 달려 다니시던 기억이 나는데요. 애들이랑 남편까지 다 챙기면서 싸운 게 가대위 분들이시고. 활동 하시면서 잊지 못할 기억은?

도경정 저도 애기 업고 다녔고 많은 분들이 업고 다녔죠. 사실 저희 신랑은 복귀 되지 않아서 쭉 놀고 있지만, 얼마 전에 같이 투쟁해주셨던 언니 동생 분들이 와주셨어요. 투쟁할 때도 저희끼리는 “말라 죽을 것 같다”고 많이 얘기했거든요.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회사랑 대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노조 집행부들이 우리 얘기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지도위원님은 대책 없이 올라가 계시고 우린 뭐라도 해야 되는데 언론에도 안 나오고.

단비 같았던 분들이 희망버스였거든요. 그렇게 1차에서 4차까지 희망버스 타고 오신 분들한테 많은 걸 받고, 우리도 주고 했죠. 1차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영도다리를 걸어서 넘어오셨고. 저희도 언니들하고 주먹밥, 피켓, 양말까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준비했는데 그 때 모습을 잊을 수가 없죠.

아, 그 때 4명이 한 군데서 휴대폰을 사면 십만 원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싸움 하면서 트위터를 안 할 수는 없다고 다 구입해서 회식하고, 애들 고기도 조금 사 먹이고.

손잡고 마음 나눌 수 있어야

사회자 가족들이 트윗, 리트윗 하시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싸움을 알리고 큰 역할을 하셨죠. 한은희 선생님도 트위터 아이디 ‘영도희야’로 유명하시죠. 원래 한진과 어떤 연관이 있으셨어요? ‘영도희야’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참여의 계기가 뭐였는지.

한은희 제가 고향이 영도고 부모님도 아직 영도 사시고. 이름하고 연결시키니까 할 게 없어서 ‘영도희야’로 했어요.

한진하고 연관이 있다고 하면 저희 집하고 가깝고. 그것보다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데 두 가지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일단 저희 집에서 한진중공업이 다 보이고 8호 크레인이 다 보여요.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서 박창수 열사 돌아가실 때 상황도 버스타고 다닐 때 봐왔던 기억이 나고. 추운 겨울에 누가 올라간 거 보고 ‘왜 또 올라가셨을까’ 하는 생각만 갖고 있다가 트위터 통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그게 희망버스로 연결되면서 가고 싶었어요. 일종의 관심? 어떻게 싸울까. 이유가 뭘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2년 반이 지났는데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연대라는 거, 전 잘 모르겠는데 시간은 걸려도 사람과 마음을 공유하고 그런 마음이 쌓이는 게 연대의 마음인 것 같아요. 지금도 가대위 분들, 지도위원님하고 영화보고 밥먹고 하는데 좋아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거죠. 만나면 좋고.

사회자 연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죠. 손잡고 마음 나눌 사람이 있다면 이길 수 있고, 나눠지고 갈라지고 이러면 지는 싸움이죠. 박희찬 선생님은 정투위 상근하셨죠? 글 작업하면서 쓰기 힘들었던 부분이 복수노조 만들어질 때였습니다. 함께 일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일할 사람인데 조직이 갈라졌을 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박희찬 조합원께서는 복수노조 만들어질 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박희찬 다른 표현이 있겠습니까? 배신감과 좌절감이 동반되는 거죠. 처음에 저희가 10월 달에, 차해도 집행부 출범시킬 때 뭔가 만들어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복수노조가 출범하면서. 저희가 조금 소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합니다.

조합원들은 충분히 믿고 있었고, 그럼 더 적극적인 대처를 했어야 하는데. 어쨌든 저는 복수노조 가입된 조합원들 만나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노조 집행부는 아니죠. 제가 지금 애들이 있어서 욕은 참는데, 여하튼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고.

사회자 기록 작업 중간에 뜻하지 않은 일이 있었죠. 최강서 조합원의 목숨바친 항거. 저도 충격이 컸지만 아마 조합원분들이 더 충격을 받으셨을 텐데요.

신동순 그 일로 해서 검찰수사를 엊그제 받았습니다. 검찰 가서 눈물 펑펑 흘리니까 검사가 휴지를 빼줘요. 아마 그런 사람 나뿐일 거야.

사실 나쁜 일이 있으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 날 꿈을 꿨어요. 뭐가 자다가 목을 조이더라고요. 김해 집에서 새벽 5시에 넘어왔어요. 와서 텐트 정리하고, 출근 선전전도 했는데 좀 있다 큰일 났다는 비보 듣고 노조 사무실 올라갔죠. 그때부터 눈이 뭐 뒤집어진 것 같고 그래서 심폐소생술 하고 119 쫓아 병원가고 유가족 오고, 결국 영안실 내리고 나서 병원에서 하루 종일 있고….

ⓒ 미디토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회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이야기 한 마디씩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신동순  다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되겠죠.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우리 유가족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도 있는데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뒀냐.” 무심결에 말씀하셨겠지만 그 충격이 되게 컸거든요. 8호 크레인에서 김 지도위원이 내려올 때처럼 꽃다발도 있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젊은 친구들이 가슴 아파하고 내 자신도 그렇다보니까 이런 일이 다신 없길 바랍니다.

도경정 얼마 전에 희망버스가 현대차 갔다 왔는데, 언론에서 안 좋게 포장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때도 그랬지만 희망버스라는 단어가 한진에게 왔던 그 이미지 지켜나가면 좋겠어요. 나중에는 기쁜 마음으로 기쁜 콘서트를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향후 3~4년 안에는.

한은희 저한테도 조합원들한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저를 변화시키는 계기도 됐고, 지금도 그 마음 잃지 않고 살아가야겠다는 긴장감이 분명히 있어요. 얼마 전에 조합원 동생들하고 강서한테 갔어요. 처음에는 열사를 뵈러 가는 그 마음 한가지였어요. 친분이 없으니까. 그런데 강서를 볼 때는 마음이 다르더라고요. 그 때 그 마음 느끼면서 조합원들이 한 분 한 분 동지를 떠나보낼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만분의 일 정도 이해했을까요? 그 마음을 서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힘들면 토닥거리고 희망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로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박희찬 한진은 아직 희망을 향해서 달려가는 중입니다. 죄송하지만 전 아직 책 안 읽었습니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종이배가 아닌 쇠로 배를 만들 때까지는 저는 책 안 볼거고요. 우리가 희망을 안았을 때 책 보면서 ‘이럴 때가 있었지’ 생각하고 싶습니다. 뭐 다른 소망이 있겠습니까. 흘린 땀만큼 대가 받고 살아가는 소박한 꿈밖에 없습니다.

한상철 30대에 박창수 잃고 40대에 김주익을 잃고 재규형을 잃었습니다. 50대에 최강서를 잃었습니다. 더 이상 한진중공업에서 불행한 사태가 없었으면 합니다. 같이 했던 정리해고 투쟁, 열사 투쟁, 책을 만들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희망버스도 같이 하셨고 지지해주시고 연대해주셔서 얼굴은 다 기억이 납니다. 무조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