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뇌를 지배하면 빈곤은 세습 된다
가난이 뇌를 지배하면 빈곤은 세습 된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3.10.0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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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공동연구진, 가난-인지능력 상관관계 ‘사이언스’에 발표
“돈 문제로 정신적 압박 커지면 판단 잘못할 가능성 높아”

과학칼럼니스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가난한 주인공이 자꾸 실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당장 위기에서 벗어나려 비싼 사채를 끌어다 쓰고, 이길 확률이 낮은 도박판에 뛰어들기도 하며, 가까운 이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해 사람까지 잃는다.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의 눈은 늘 ‘코 앞’에 머물러 있다. 대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그 이유를 최근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가난한 자들의 뇌 한쪽은 항상 돈 문제로 가득해 다른 문제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가난을 해석하는 여러 시각

“부지런해야 부자가 된다.”
“누구나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자주 듣던 이야기다. 이 말을 뒤집으면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실패한 자는 열심히 살지 않았다’로 들린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게으르다’거나 ‘실패했다’는 꼬리표를 쉽게 붙인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도 부자가 되기 어려운 세상 대신 개인의 무능함을 탓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의 원인은 개인뿐 아니라 환경에 있는 경우도 많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에서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치시스템이 시장실패를 바로잡지 못했고, 현재의 경제시스템과 정치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고 전하며,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상위 1%에게만 부가 축적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리는 노력과 상관없이 가진 자는 더 부자가 되고, 못 가진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한층 힘을 보태줄 만한 연구결과가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서 모인 국제공동연구진이 ‘가난하면 뇌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실수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실제로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라 환경적인 압박이다. 가난한 사람은 늘 금전적인 문제에 신경 쓰므로 뇌 한쪽이 늘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데, 이 때문에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제대로 인지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엘다르 섀피어 교수와 영국 워릭대 경제학과 아난디 마니 박사,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센드힐 물라이나단 교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지아잉 자오 교수팀은 ‘가난이 뇌의 인지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부유층과 빈곤층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기존에도 부유층과 빈곤층의 차이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주로 경제적 문제로 발생하는 학력이나 영양분 섭취의 차이를 알아보는 실험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인지능력’에 초점을 맞춰 2가지 새로운 실험을 기획했다. 첫 번째 실험은 미국 뉴저지에 있는 쇼핑몰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사람들을 통해 진행했다. 연구진은 쇼핑하러 온 사람들 중 연소득이 7만 달러 이상인 사람과 2만 달러 이하인 사람 400명을 뽑았다. 이후 이들을 소득별로 나누고 간단한 인지능력시험과 논리시험을 보도록 했다. 문제는 모두 4개였는데 이를 해결할 때 돈에 관한 내용을 넣었다. 실험 참가자의 소득수준이 문제해결에 영향을 주도록 만든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고장 난 상황에서 수리비가 150달러일 때와 1,500달러일 때 각각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다. 돈을 빌려 수리할 것인지 아니면 수리를 포기할 것인지 등을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또 회사가 어려워서 급여를 삭감할 상황인데 5% 깎을 때와 15% 깎을 때 현재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질문했다. 참가자들은 이런 문제를 풀면서 인지능력 시험도 함께 수행하게 됐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빈곤층, 부유층보다 뇌 활동 더뎌

실험 결과, 재정적 압박이 적다고 가정한 경우 부유층과 빈곤층은 인지능력 시험에서 비슷하게 좋은 결과를 보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압박이 심하다고 가정한 상황에서 빈곤층은 훨씬 악화된 성적을 보였고 부유층은 당황하지 않았다.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돈을 쓰는 데 현명한 결정을 한 것이다. 연소득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문제해결력은 2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두 번째 실험은 연소득이 다른 그룹이 아니라 1년 동안 경제적 상황이 달라지는 인도 농부를 대상으로 했다. 이들은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데, 농부들은 수확 직전까지 가난에 허덕이다가 수확 직후부터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는다. 연구진은 464명의 농부에게 논리 시험과 인지능력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은 두 차례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전과 후에 진행됐다.

결과는 첫 번째 실험과 비슷했다. 돈 걱정이 없는 수확 후에 한 시험에서는 높은 점수를 보였지만, 빈곤한 시기인 수확 전에 진행한 시험에서는 인지능력이 낮게 나온 것이다. 수확 전과 후의 문제해결력은 두 배 정도 차이를 보였다. 지아잉 자오 교수는 “재정적 압박을 받으면 거기에 몰두하느라 다른 복잡한 문제에 신경 쓸 정신적 자원이 줄어들게 된다”며 “이는 곧 일상생활에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빈곤 상태에서는 가상적인 재정 압박을 묻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대역폭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엘다르 섀피어 교수는 “빈곤이 뇌에 가하는 정신적 압박은 스트레스와 달리 삶의 다른 분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며 “가난해질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결정을 하게 되고 그것이 가난을 영속화 시킨다”고 말했다. 결국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가난이 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지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거나 교육훈련프로그램을 제공한다면 그들이 정신적 압박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대안을 찾을지도 모른다. 

빈곤층이 돈 걱정으로 놓치는 부분까지 채워주는 정책이 만들어진다면, 세상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 가난은 게으름이나 무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은 싹트는 중이라고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