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길에 서서 마주한 동네
언덕길에 서서 마주한 동네
  • 홍민아 기자
  • 승인 2013.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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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구석구석을 비추는 가을햇살
길 따라, 사람 따라 흐르는 이야기
[골목예찬] 서울 북아현동 금화장길

금화장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현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올라가는 길, 충정로 삼거리나 서대문 전철역에서 경기대 방면을 향해 걸어가는 길. 같은 곳을 향해도 어떻게 가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고 골목길의 정경도 그렇다. 아현역 쪽은 뉴타운 조성사업이 한창인 데 반해 충정로에서 오르는 길에는 아직 남아 있는 오래된 가옥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아래쪽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것과는 상관없는 듯 고요하지만 작은 수다가 있는 길. 별다방, 콩다방이 부럽지 않은 금화장길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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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견디는 꿋꿋함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트럭, 신호 꽁무니를 쫓아 달리는 초록색 지선버스를 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잠시 숨 돌릴 곳을 찾다가 무심코 샛길로 빠져드니 풍경이 사뭇 다르다. 입추가 한참이나 지났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서서히 변해가는 골목의 시간에 맞춰 여름이 가는 모양이다.

경기대를 지나 십여 분을 걸어 올라가면 북아현동과 충현동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오를 수 있다. 이 언덕 위에 서 있는 금화아파트 앞길에서부터 금화장길이 시작된다. 1971년에 지어진 금화아파트는 남산과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에는 잘 나가는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3, 4동만이 남아 있다. 여전히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 행색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고 바꿀 수 있지만 건물은 그냥 서서 그 시간을 이겨낸다. 그런 꿋꿋함이 오래된 건물을 찾고 기억하게 만든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아파트 건너편에는 사는 노부부는 꽤 오래 전에 지어졌을 법한 판잣집과 함께 살아온 듯하다. 할아버지는 뉘엿뉘엿 해 져가는 오후 즈음에 나와 옥상에 걸린 빨래를 휙 보더니 텃밭으로 향했다. 아직은 한낮의 볕이 따가운 모양이다. 밭 한 가운데 허리를 숙이고 있는 할아버지는 빨리 손을 놀리라는 아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수다스러운 다방, 금화장길
금화아파트를 지나 들어선 길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뭇 달라지는 분위기다. 길 한 모퉁이에 말려둔 애호박은 꼬들꼬들해지고 전신주를 타고 오르는 덩굴의 열매는 잘 여문 호박색으로 변해간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질 때쯤 길모퉁이에 앉아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골목길의 제 멋은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다. 어느 골목에 가면 박스를 깔고 앉은 할머니들이, 방향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가면 복주머니를 바느질하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둘 셋씩 앉아있다. 골목을 찾은 방문객들을 힐끗 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다 일어나 골목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둘째 노총각 아들 선 봤다며, 어떻게 됐어?”

누군가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겐 하루의 고단함을 웃고 떠들 수 있는 집 앞마당의 평상이 된다. 그곳에 금화장길 다방이 문을 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학교를 마치고, 일을 마치고 전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마을버스에서 내리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 간단한 인사 후 옆집 할머니의 수다를 들으며 잠시 멈춰선다. 차오르던 숨도, 이마에 맺히던 땀방울도 어느새 사그라진다. 서늘해진 바람에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