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봉기’일어날 지경이라예”
“대구에서‘봉기’일어날 지경이라예”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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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죽어간다 _ 대구
기계소리 멈춘 공장, 성난 민심

30여 만평 부지에 4천여 개의 크고 작은 업체가 들어서 있는 대구 성서공단.

대구 경제의 4분의 1 가량을 떠받치고 있는 이 공단은 최근 원자재난에 내수부진, 자금 압박의 3중고가 겹치면서 휴·폐업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섬유업종은 가동률이 60%대에 접근했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공장 두 곳 중 한 곳 꼴로 놀고 있는 셈이다.


“IMF 행님이 온 것 같다”


소규모 섬유가공업체들이 모여 있는 1차 공단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전신주에 덕지덕지 붙은 공장 매각·임대 전단, 을씨년스럽게 펄럭이는 분양안내 플래카드다.

섬유가공업체 B사의 이점수(48) 사장은 “일거리도 없던 터에 잘됐다”며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낸다. “지금은 일거리 자체가 없어, 기계를 돌리는 것보다 세워두는 게 훨씬 이득이라니까. 수지가 맞아야 공장을 돌리지.  인건비, 재료비 다 빼고 나면 집에 들고 갈게 없으니 할말 다했지….”

실제로 이 공장은 한창 일할 대낮인데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장 옆 빈터에는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폐품 신세가 된 원단이 가득했다.

 

나일론을 생산하는 옆 공장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인지 ‘마실’을 나온 김보현(54)씨가 말을 거든다. 직물업을 한지 20여 년이 됐다는 김씨는 “이 생활 20년만에 가동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에 빠지기는 처음”이라면서 “IMF가 아니라 ‘IMF 행님’이 온 것 같다”고 푸념했다.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임금체불이나 해고도 비일비재하다. 성서공단 노조 김용철 위원장은 “예전에는 그나마 임금이 싼 외국인 노동자들은 고용을 보장받는 편이었지만 최근 들어 외국인 노동자들의 해고를 비롯해서 감원에 임금체불까지 겹쳐 상담 건수가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전체생산의 8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대구 합섬직물업계로서는 3년 이상 거듭된 장기불황에 원사값이 올 들어 최고70% 가까이 올라 수출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구경북견직물조합에 따르면 현대 대구 섬유업계의 직기 가동 대수가 최고 5만대에서 마지노선이라는 1만2000대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이 조합의 조성한 차장은 “만약 직기 가동 대수가 1만대 밑으로 떨어지면 해외 바이어들이 대구를 직물 산지로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역 산업이 고사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짐싸기 바쁜 전통 제조업체들

조립금속업체가 밀집해 있는 2차 단지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 단지에 입주해 있는 소규모 섬유기계부품 가공업체 A사. 이 업체 직원 정시호(47)씨는 “가뜩이나 섬유업체가 어려워 일감이 없는데 자재값까지 올라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이 업체는 섬유업체에서 기계부품 주문이 오면 금속을 가공, 부품을 납품하는데 최근 부품의 주재료인 스테인레스 가격이 폭등해 도저히 채산성을 맞춰내기 힘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나마 여유가 있는 업체들 사이에는 ‘더 어려워지기 전에 짐을 싸자’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자동차 소음 방진제품을 생산하는 P산업은 지난해 2월 총 1200만 달러를 투자해 중국 천진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헤드램프를 생산하는 S사도 중국 호북성에 1만4천평 규모의 공장을 건립 중이다.

최근 수출입은행이 발표한 ‘대구지역의 對중국 투자현황’에 따르면 중국에 자체공장을 건설하거나 현지법인과 합작형태로 투자한 업체는 2002년 말 기준으로 총 361개사로 이 중 제조업이 전체의 91%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탈 대구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데 대해 지역 중소기업체 관계자들은 “대구에서는 더 이상 기업을 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제조업 공동화로 인한 산업기반과 지역경제의 붕괴는 이미 위험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역 경제주체들은 정부의 잘못된 지원책이 지역산업의 기반 붕괴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지역특화사업 육성 정책의 효시로, 대구·경북지역 섬유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된 ‘밀라노프로젝트’에 99년부터 2003년 말까지 투여된 자금은 6800억원. 여기에 후속 사업인 ‘포스트 밀라노프로젝트’로 올해부터 오는 2008년까지 1471억원이라는 예산이 추가 투입된다.

그런데 밀라노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섬유관련 기업들은 문을 닫고, 수출비중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대구사회연구소 권우현 선임연구위원(경북대 교수)은 “섬유산업 고도화를 위해서는 연구개발이 시급한데, 연구개발 시설투자가 ‘보여주기식’으로 추진돼 일부 시범 설비들은 과도하고 부적합한 시설임을 알면서도 사업이 집행됐다”고 지적했다.

 

“밀라논지 말리논지 듣기도 싫다”

밀라노프로젝트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를 지원한 산자부마저 곱지 않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난 9월 초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산업연구원이 제출한 ‘4대 지역 진흥사업 평가와 후속사업의 기본방향 연구’보고서는 한마디로 밀라노프로젝트가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밀라노프로젝트는 생산·수출·고용 등의 측면에서 단기간 실효성을 거두기는 불가능한 것인데도 대구를 패션산업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잘못된 목표로 사업을 추진, 당초 발상부터 비현실적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성서공단에서 만난 섬유업계 관계자들은 “밀라논지 말리논지 듣기도 싫다”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11월 초 이 견직물조합을 중심으로 구성 된 대구지역의 합섬직물업계 대표들이 유화폭리와 은행의 목조르기가 개선되지 않으며 전면조업중단과 사업자 등록증 반납, 고속도로 점거 농성을 하겠다며 ‘행동 계획’을 마련했다.

결국 조해녕 대구시장이 직접 견직물조합에 나와 이사진 및 비상대책위원들과 원사값 폭등과 관련 대비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를 주재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 됐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지역 경제 단체들은 최근 들어 더욱 격렬해진 대구의 성난 민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공황에 가까운 수출경기 불황에 원사값 폭등으로 실신 상태에 빠진 지역경제와 전통산업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텅 비어가는 공단이 초겨울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