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 멈춘 듯한 열우물길은 살아 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멈춘 듯한 열우물길은 살아 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3.12.06 17:39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민들의 한국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채 오르는 언덕
달동네 꼭대기보다 높게 솟은 아파트에 뭉게구름 멈추다
[골목예찬] 인천 부평구 십정동 골목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인천 백운역에서 동암역 사이에 자그마한 야산이 있는데, 이곳에 열우물고개가 있었다. 이 재 너머에 자리한 마을이 십정동이다. 구한말에는 인천군 주안면 십정리였다. ‘십정’은 우리말로 열 우물이다. 공동우물 하나 파려면 온 마을 사람이 나와 몇 날 며칠도 부족해 한 달 넘게 땅을 파야 했다. 하지만 십정 마을은 혼자서라도 몇 시간이면 우물 하나를 뚝딱 팔 수 있어 우물이 열 개 넘게 있었던 곳이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푸르던 무청이 시래기로 익어가는 마을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인천 부평구에 속한 십정동은 달동네다. 마을의 달력은 1970년대에 멈춰 있다. 푸르던 무청이 누렇게 물들어가는 시래기를 골목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까만 연탄이 담장 곁에 쌓여 있고, 제 몸을 뜨겁게 불태운 연탄재들이 골목길 전봇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시멘트가 갈라져 떨어지자 짚을 썰어 황토와 으깨어 발랐을 흙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낮은 담장 너머에서 십정동의 어제와 오늘을 지켜보며 자라온 감나무가 까치밥을 달고 골목을 붉게 밝히고 있다.

이곳은 과수원과 공동묘지가 있던 야산이었다. 산 아래 십정동 588번지 일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염전인 주안염전이 있던 자리다. 염전 노동자와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이곳 야산에 흙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과 인천의 철거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켜 지금의 달동네를 꾸몄다.

개발에 앞서 철거가 먼저 휩쓸고 간다. 철거민들이 모여 들어 완성한 이 마을은 1999년 주거환경개선지구가 되면서 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거될 마을이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그 빈 공간에는 뿌리 내릴 터를 찾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이나 영세민들이 간간이 들어오고 있다. 그렇게 십 년 넘는 세월을 훌쩍 보냈다. 지금은 달동네를 이루며 다닥다닥 들어선 집들 열 가운데 여섯은 비어 있다. 시멘트로 발라진 골목길과 가파른 계단은 갈라지고 부서져 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개발이나 개선의 계획 때문인지 집을 고치거나 길을 새로 깔지 않고 있다. 묵묵히 철거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빛 바란 흑백사진 속에도 여전히 사람의 온기가

남도 방앗간, 태양유류사, 공주슈퍼, 세일농산, 풍년방앗간, 영일제과점, 삼아약국, 우리양품….
달동네 언덕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시골장터를 떠올리게 하는 낡은 간판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재래시장이었음을 빛 바란 흑백사진으로 증명한다. 더 이상 문을 열지 않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아직도 손님을 기다리며 빵을 굽고, 얼음과 석유를 팔고, 김장 고추를 빻는 곳이 있다. 달력은 멈춘 듯 보이지만 언덕길을 오르는 이의 허연 입김 속에 한국의 현대사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람들이 떠나고 집이 허물어져가지만 열우물 골목길은 살아있다. 아니 살아나고 있다. 2002년부터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거리의 미술’꾼들과 멈춘 달력 속에서도 어김없이 씨를 뿌려 꽃과 열매를 맺고 갖가지 푸성귀를 수확하는 주민들 때문이다. 우범지역으로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었을 열우물 마을을 벽화로 단장하고, 손바닥 만한 공간이라도 흙을 채워 땅을 만들고 생명을 가꾸는 이들이 이곳을 ‘열우물길 벽화 마을’로 거듭나게 했다. 사진기를 들고 출사를 다니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고, 장철수 감독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배우 김수현이 뛰어다닌 무대로 열우물길이 이름을 얻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서울에 첫눈이 내린 날 찾은 열우물 마을. 푸르디푸른 하늘을 뚫고 나온 뭉게구름이 열우물 달동네를 감싸 안으러 다가온다. 하지만 달동네 꼭대기보다 높이 솟은 아파트에 구름은 찢기고 만다. 개발의 위대함이 열우물 마을을 이루고 이웃과 부둥켜 만들어 온 삶과 문화와 풍경만은 철거하지 말기를 바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