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레드 카펫엔 영화스태프의 배고픔이 깔려 있다
화려한 레드 카펫엔 영화스태프의 배고픔이 깔려 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3.12.06 17:46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스태프 한 달 평균 53만 원, 1인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쳐
2년 연속 관객 1억 명 돌파, 매출액과 수출액은 승승장구
[분석2] 영화산업 노동자의 실태와 과제

ⓒ <광해 왕이 된 남자> 공식사이트
43년 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친 전태일이 여전히 과거가 아닌 현재가 되고 있다. 배고파 못살았다고 자신이 어릴 적 뛰놀던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차를 세우고 번개탄을 지핀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 최종범의 유서는 울분마저도 묵직한 바위덩이로 짓누르는 듯하다. <전태일평전> 속 어린 여공의 처지와 2013년 자신의 노동현실이 다르지 않음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근로기준법의 조항이 아직도 낯선 노동자들. 낮밤 없이 일하는 영화스태프들.

영화산업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린 길로 달려가는데, 그 영화를 만드는 이의 노동환경은 아직도 봉건시대에 머문 듯하다.

남는 밥이랑 김치 있나요

2011년 1월 29일, 설을 앞두고 32살의 젊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최고은이 이웃에게 쓴 쪽지였다.

‘그 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앞을 두들겨 주세요.’

최고은은 아팠다. 갑상선 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한 단독주택 단칸방에서 병에 시달리고, 배고픔에 부끄러워하고, 밀린 달세와 가스요금 등 돈 때문에 절망하며 죽어갔다.

그 죽음이 낯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그랬고,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그랬다. 예술 노동자로 살아남아 있거나 살아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현실을 마주한 적이 있을 거다. 이 현실이 두려워 자신의 꿈과 재능을 외면하고 딴 길을 찾은 이도 많다.

이후 ‘최고은법’이 논의되고, 등장했다.

2013년 9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부산 영화의 전당을 찾아 말했다.

“새 정부는 문화융성을 4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영화산업을 문화융성의 핵심이자 창조경제의 원동력이라고 치켜세우며, 우리 경제를 살찌우는 효자가 될 수 있도록 정부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3년 1분기 영화산업 매출액이 1조 1,045억 원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에 비교해 10.6%가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영화 수출액도 113억 원에 달해 지난해에 비해 32.5%가 늘었다.

영화산업 발전에 대한 관객들의 격려도 뜨겁다. 2013년 10월 4일 한국영화 누적 관객 수가 1억 명을 넘어섰다. 이는 2012년에 비해 47일이나 앞당긴 결과다. 극장에서 한국영화 점유율도 60%에 달해 영화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놀라운 발전에 기여한 영화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은 붉은 레드 카펫 대신 아직 어두운 숲속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한 주에 73시간 노동, 휴일도 없다

영화산업협력위원회가 조사한 ‘2012년 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년간 영화 참여에 따른 평균 소득은 1,107만 원이었다. 영화사 대표를 제외한 팀장(1st급)을 포함한 스태프의 연평균 수입은 916만 원으로 월 평균 수입이 76만 원이다. 2nd급 이하의 연평균 소득은 631만 원으로 월 평균 53만 원에 불과하다. 이는 1인 가구의 한 해 최저생계비인 664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 금액이다.

노동시간도 1970년대를 방불케 한다.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9시간이다. 하루 평균 야간 노동시간은 5.5시간에 이른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75시간이다. 주40시간 노동은커녕 연장시간을 포함한 법정노동시간보다 23시간이나 많다. 하루에 17시간 이상 일하는 스태프는 24.5%고, 8시간 이하로 일하는 스태프는 7.3%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 촬영 기간 동안에는 스태프들의 57.7%가 정기휴일이 없이 일한다고 한다.

영화 산업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79.8%에 달한다. 정규직은 16%에 불과하다. 영화 편당 고용계약이 이뤄지는 영화산업 노동자들에게 실업은 늘 품고 살아야 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다. 영화스태프들의 82.4%는 작품별로 계약한다. 1년 단위로 고용관계를 맺는 노동자는 5.7%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용보험 가입률은 29.1%에 불과하다. 영화스태프 10명 가운데 7명은 제작이 끝나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로 쫓겨나는 셈이다.

촬영 현장은 여느 작업장 못지않게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야외 촬영과 야간 촬영이 많은 관계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셋 중 한 명만이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67.4%는 산재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열악한 현실은 중소형 영화 제작 현장이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올해 초 개봉해 1,281만 명 관객이 찾아 흥행 대기록을 세우고, 매출액 900억 원을 넘긴 ‘7번방의 선물’을 만든 스태프들조차 4대 보험의 보장을 받지 못한 걸로 알려졌다.

김희정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밝힌 자료가 있다. 2012년 1월부터 2013년 9월까지 개봉한 독립영화를 제외한 영화 49편 가운데 4대 보험에 가입한 경우는 5편에 불과했다. 5편 가운데 영화스태프 전원이 4대 보험에 가입된 경우는 ‘26년’ 단 한 편뿐이었다고 한다. 나머지 ‘하울링’, ‘구국의 철가방’, ‘간첩’, ‘더 웹툰 : 예고살인’은 일부 스태프만 가입시키거나 희망자에 한해서만 가입했다.

불합리한 돈의 흐름 막아야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려고 영화스태프들은 2006년에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산업노조)을 만들고 민주노총 공공연맹에 가입했다. 이 성과로 2007년 4월에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영화산업노조는 ‘2013 임금 및 단체협약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6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노동한 시간에 따른 임금 지급, 경력에 따른 수당 지급, 근로기준법에 맞게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 법정 야간·연장 수당 지급 및 유급휴일을 요구하고 있다. 6대 요구사항의 대부분이 근로기준법에 따른 최소한의 요구에 가깝다.

최진욱 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은 “올해 노조의 가장 큰 목표는 영화 산별 최저임금과 직무직급별 임금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작사 등은 법정최저임금마저 지급할 실정이 못 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 제작비 가운데 영화스태프의 인건비 비중은 8%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

최진욱 위원장은 “실제 영화제작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기 때문에 투자사가 이를 꺼려하지는 않는다. 과도한 운영 경비, 리베이트 등을 비롯한 불합리한 돈의 흐름을 잡아야 한다”며, “투자사에서 작품비로 1억 원을 받으면서 저작권을 지닌 작가에게는 2천만 원만 주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다”고 비판한다.

2011년 5월에는 ‘영화스태프 표준근로계약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화 제작 현장에서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고 영화 제작을 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세균 민주당 국회의원실은 표준근로계약서가 만들어진 2011년 5월 이후부터 2013년 8월까지 제작된 저예산 독립영화를 제외한 상업영화 75편을 대상으로 표준근로계약 채택 여부를 조사했는데, 조사에 응한 57편 모두 이를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스태프 처우 개선을 위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발표할 당시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원하는 영화에 대해 표준근로계약서를 채택하면 다른 영화들도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바람에 머물렀고, 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무시됐다.

2012년 8월에 영화산업노조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9개월간의 협상을 통해 임금 및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영화산업 최저임금 적용 및 영화산업표준계약서 작성, 4대 사회보험 완전적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올 4월에는 영화산업 노사정 대표가 만나 ‘한국영화산업 2차 노사정 이행협약’을 체결했다. 이 자리에는 롯데, CJ, 쇼박스 등 국내의 굵직한 투자사들도 참석했다. 이 협약을 통해 노사정은 단체협약에 따른 표준근로계약서를 성실히 이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협약은 현장에서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일부 제작사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JK필름은 ‘해운대’ 촬영을 할 때 촬영과 조명팀에 이 계약을 적용했다. 명필름의 경우에는 ‘관능의 법칙’ 스태프들과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시간급과 4대 보험을 적용했다고 한다.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국제시장’은 표준근로계약에 따라 제작이 진행되고 있다.

최진욱 위원장은 “현재 CJ의 경우 표준근로계약서와 4대 보험을 지난 4월 노사정협약 이후 100%로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 투자사나 그 아래 제작사, 하청 도급으로 내려갈수록 이 합의를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 <광해 왕이 된 남자> 공식사이트
법적인 규제시스템 만들어야

영화진흥위원회는 ‘2012 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를 발표하며, “2004년 조사 이후 많은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방안이 나왔지만 현장에 적용된 경우가 10%도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영화스태프의 노동환경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불합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조직이 결성되어 있지 않아서도 아니며,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업계 내의 협의 결과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없어서도 아니다. 표준근로계약서나 사용자 단체와 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 내용을 지키지 않아도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단순한 권고 수준의 방안이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에게 임금체불을 한 제작사 대표가 해당 제작사는 폐업하고 후배 프로듀서를 대표이사로 세워 새로운 이름의 회사로 영화를 계속 만들고 흥행해 돈을 벌면서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더라도 어떤 제재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영화스태프의 근로환경 개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규제가 많은 사회는 자유를 저해하기 때문에 나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기본적인 윤리의식이나 당연한 기본원칙도 지키지 않아 약자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당연히 법적인 규제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영화산업 노동자의 삶은 앞의 통계에 나왔듯이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이를 영화산업 노동자나 제작자에게 맡겨둬서는 아무런 진척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정부가 적극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다.

우선 4대 보험이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법·제도적 장치를 꾸리는 한편, 정부부처가 나서서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특히 적정한 노동시간과 정당한 임금 지급이 정착될 때까지 제작사에 대한 철저한 감독과 더불어 제재가 따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수십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린 영화에서조차도 표준근로계약서가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더 이상 제작사의 양심에 맡길 사안이 아니라 정부의 강력한 제재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송민수 한국노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국 영화산업의 노동환경과 과제’에서 한국 영화산업이 직면한 시급한 과제가 열악한 노동시장 개선이라며, “한국 영화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영화산업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요리하는 사람이 행복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건강하고 맛있는 먹을거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한국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가 행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