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빛난다 삶이 치열할수록
무대는 빛난다 삶이 치열할수록
  • 김현정 기자
  • 승인 2013.12.06 18:02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년 정기공연 선보이는 장애인극단 ‘휠’
“무대에서 꿈과 자신감 주고 싶어요”
[삶의 현장] 장애인극단 ‘휠’

▲ 2012 <돈끼호테>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공연은 막공(마지막 공연)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라고 했다. 극단 ‘휠’을 찾아간 날이 마침 정기공연 <민들레>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마친 배우들이 분장을 마치고 나왔다. 장애인 배우들이라기보다는, 그냥 배우였다.

극단 ‘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애인 극단이다.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내며 장애인들의 연극무대를 만들어왔다. 연극은 배고픈 예술이라는데, 장애라는 어려움까지 가진 이들이 연극을 한다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휠’의 무대는 재미있어야만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휠’의 무대를 찾아야 계속 연극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 막공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막공만 재미있다는 말은 아니다. ‘휠’이 무대에 올린 이전의 연극들에도 재미와 삶이 녹아있기 때문에 연극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휠’의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편견을 이기는 연극

성미산 마을극장을 찾아갔다. 연극 <민들레>의 무대가 자리한 성미산 마을극장은 비슷비슷한 빌라 사이에 살짝 숨듯이 자리 잡은 소극장이었다. 사실 장애인극단 ‘휠’이 공연을 펼칠 곳으로 성미산 마을극장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처음에는 연극 공연의 메카인 대학로 근방에서 대관할 만한 곳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대학로의 협소한 소극장들은 대부분 장애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휠체어 하나 편하게 들어갈 소극장이 대학로에는 없는 것이다.

소극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사회에는 장애인이 설 공간이 별로 없다. 때때로 지적되는 사안이지만 장애인의 이동 편의성을 위한 장치들은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 주요 시설들도 장애인들에게는 문턱이 너무 높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기조차 힘들다.

그런 장애인들이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수없이 높고 험한 턱을 만났을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도 힘든 연기를 장애인들이 어떻게 하느냐’, ‘연극의 내용이나 수준이 한참 부족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내용을 다루니 너무 우울할 것이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방법은 결국 연극밖에 없었다.
모임을 결성하고 소규모 초청연극을 선보이는 것으로 시작한 ‘휠’이 지금은 해마다 정기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극본도 연출도 연기도 모두 장애인들의 힘으로 만들어 낸 보기 드문 극단이지만 ‘휠’은 잘 해내고 있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

무대 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단연 배우다. 그들은 한 줄의 대사와 한 번의 몸짓으로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장애를 가졌어도 배우는 배우다. 자신의 역량에 맞는 역할을 가지고 무대의 한 부분을 채워 나간다. 오히려 비장애인이라면 하기 힘들 수준으로 캐릭터에 녹아들어가는 배우들도 있다. 그들에게 무대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하는 일은 연극이니까 작가나 연출 다 필요하지만 배우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가장 기쁘고, 웃음이 밑바탕이 되는 일이라 기뻐요.

힘든 것도 있어요. 대본 리딩만 한 달을 하고 수정도 우리가 같이 하느라 두 달이 걸렸어요. 그래도 그렇게 우리가 참여해서 만드니까 좋아요. 저는 연극이 4편째인데 이번에 여주인공의 남자친구 역할이에요. 전에는 웃기는 역할을 하다가 이번에는 감정연기가 필요한데 내 몸이 이래서 캐릭터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게 제일 마음 아파요.” - 배우 김세광

“이번 연극에서는 조연출 겸 배우를 했어요. 근데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조연출로서 하는 일은 배우들 챙기고 연락 담당하고 소품이나 의상 관리하고 하는 건데 연출님이 거의 다 하시고 도움이 많이 안 된 것 같아요.

연극에서는 조금 억울한 역할이에요. 제가 차를 운전하다가 접촉사고가 났는데 장애인이라고 술 취한 사람 취급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실제로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그냥 걸어가는 건데 술 취한 것 같다고 얘기하고. 처음 보는 아저씨나 학생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연극은 이번이 13번째인가 14번째인가 그런데 갈수록 무대가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무대에서 관객들이 호응해줄 때 제일 좋은 건 똑같아요. 앞으로는 꿈과 자신감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지금은 연출에도 꿈이 있어요. 제가 원래 대학에서 공부한 건 애니메이션인데 장애인이다 보니까 졸업하고 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애니메이션과 연극을 섞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 배우 겸 조연출 호종민

배우들은 자신의 한계에 아파하기도 하지만 그런 고민을 토대로 훌륭한 연기를 펼치게 된다. 작은 역할에도 몇 날 며칠의 연습시간을 쏟아 부으면서, 혹은 두 가지 역할에 벅차 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확실한 것은 무대 위로 옮겨진 그들의 진실된 삶을 보면서 관객도 배우도 희망찬 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과 더불어 극단 ‘휠’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극을 기획하고 홍보하는 스태프들이다. 특히 이번 정기공연 <민들레>는 주요 관객을 20대로 설정했기 때문에 홍보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블로그와 SNS로 홍보하는 일까지 잘 만들어진 기획과 홍보는 <민들레>를 활짝 피웠다.

▲ 2013 <여행>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기획파트에서 일하고 있어요. 배우들 워크숍 할 때는 같이 하기도 하고요. 저희는 장애인극단이기 때문에 워크숍도 자주 하고 연기 연습뿐만 아니라 발음교정, 발성, 스트레칭도 같이 해요. 이번 공연도 무대에 올라가는 배우들 중 2명 빼고 다 장애인이거든요. 이번에는 처음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도 관객들이 보시면 ‘정말 처음 하는 거냐’고 놀라서 물어보세요. 그만큼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시니까, 꼭 장애인극단이라는 걸 감안하고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게 보실 수 있어요.

이번엔 마케팅을 하면서 20대로 타깃을 잡고 블로그 홍보, SNS 홍보에도 신경을 썼어요. 제일 힘들면서도 뿌듯했던 건 포스터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디자인 과정에서 디자이너랑 싸우기도 하고 엄청 여러 번 수정을 했거든요. 처음엔 포스터가 너무 우리 의도하고는 다르게 나온 거죠. 우울하다고 해야 하나 비어있다고 해야 하나. 거의 새로 그리다시피 하고 마무리 작업은 디자이너한테 받아서 제가 포토샵으로 했어요. 지금은 정말 뿌듯해요. 예쁘게 나오지 않았어요? 이게 손의 모양이나 민들레가 다 의미를 담은 거거든요. 아마 연극을 보시고 포스터를 다시 보시면 새롭게 보이실 거예요.” - 기획팀 송지영

연극은 배고픈 예술이 된 지 오래다. 장애인극단이 13년을 버틸 수 있다는 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인연들이 필요하다.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는 자원봉사자들과 객석을 채워주는 관객들까지. 연극 무대라는 뜨거운 삶의 현장을 채우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다.

“연극을 올리는 9일 정도 자원봉사를 했어요. 처음에는 주변에 포스터 붙이고, 극장이 좀 찾기 어려우니까 밖에서 안내하고, 표 확인하는 정도로요. 일이 힘든 건 없었고요, <민들레>를 여러 번 보게 됐죠. 같은 내용의 공연이지만 볼 때마다 다르더라고요. 처음에는 ‘장애인들이 연기하는 거니까 대사 전달력 같은 게 떨어지는 건 감안해야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몇 번 보다보니 다른 연극과 다를 게 없더라고요. 오히려 짧은 공연 기간 중에도 연기력이 점점 향상되는 게 보이더라고요. 애드립도 더 재밌어지고. 그냥 똑같은 연극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 자원봉사자 정지은

“봉사를 일주일 정도 했는데, 처음에는 장애인 배우들을 대하기가 좀 조심스러웠어요. 난 조심한다고 해도 본의 아니게 상처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좀 편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봉사하면서 연극을 일곱 번 봤는데, 처음에 기대한 것보다 짜임새 있고 따뜻한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휠’에서 자원봉사 할 기회가 있으면 계속 하고 싶어요.” - 자원봉사자 권세진

우연히 연결된 따뜻한 마음은 벌써 큰 마음이 되어 있었다. 지은 씨나 세진 씨처럼 우연히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가 8년째 ‘휠’에서 봉사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도 있었고, 초청공연이든 정기공연이든 ‘휠’의 무대라면 어디든 찾아가 힘을 실어주는 열혈 관객도 있었다. 끊어지지 않는 소중한 인연들이야말로 ‘휠’의 튼튼한 무대가 되어주고 있다.

그 자체로 희망이 되는 극단

<민들레>의 내용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살인’이다. 그것도 장애를 가진 여성이 살인자로 등장한다. 여성, 장애, 전과.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사항이 있다면 이 사회에서는 비교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 가지 악조건이 중첩된 주인공 ‘연희’의 삶은 내몰릴 만큼 내몰려 있다.

관객은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관객들은 스스로 연희가 되어보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굴곡진 삶에 대해 생각한다. 다른 공연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장애인 관객들은 다른 작품에서 느끼기 힘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연극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더 많았다. 연신 발차기를 하고, 춤을 추고, 뜻 모를 소리를 뱉어내는 코믹한 캐릭터들이 웃기는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날 만난 장애인 배우들 중에는 앞으로도 계속 “웃긴 역할”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몇 있었다. 관객의 즉각적이고 즐거운 반응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좋은 건지 ‘휠’의 배우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극단 ‘휠’은 설립부터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중증장애인들이 문화예술을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현저히 부족한 상황에, 갈수록 발전된 연극을 보여주고 있는 ‘휠’은 장애인들에게도 비장애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하나의 기업으로서도 ‘휠’은 충분한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지난 2009년 사회적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1년에는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어려운 시기를 거쳤지만, 지금은 월급 받는 전업 배우들의 전문예술법인으로 성장했다.

▲ 2013 <그날 우리는> ⓒ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당신의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낼 것처럼 연기했다. 조금 어눌한 발음이나 몸짓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즐기며 노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일터는 즐거웠다. 노동과 유희의 경계는 무너져 있었다. 배우 호종민 씨는 “극단 휠이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니까 더 열심히 하고 돈도 더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순히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일의 의미를 찾고 좋은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정당한 보상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다. 연극 하나를 준비하더라도 모든 과정을 함께 만들어 가는 ‘휠’ 단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일이었다면 그렇게 소름 돋는 연기를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가 일하는 무대는 제각각이지만 우리가 보는 가치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직장은 연봉, 네임밸류, 인간관계 세 가지 중 두 가지만 충족시킨다면 ‘그냥’ 다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실현이나 장기적 비전과 같은 가치는 선택지에 없지만, 한 달 월급처럼 적당한 이유는 골라도 무방하다.

그러나 ‘휠’의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편견을 깨기 위해, 웃음을 주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은 연극의 내용 이상으로 진한 감동을 만들어낸다. 정말 깍듯한 자원봉사자들의 90도 인사도 그러하다. 포스터 제작 과정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스태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누구라도 ‘휠’의 무대를 본다면, 자신의 무대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미리 짚어보라. 지금 당신에게, 당신의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