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빈강정’ 줄 테니 상생할래?
‘속빈강정’ 줄 테니 상생할래?
  • 승인 200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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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소기업 상생의 길은 없나_① ‘책상’에서 만든 정부 정책


초점 빗나간 정부 대·중소기업 협력정책


불공정거래 손 안대고 시혜성 정책만 쏟아내

 

지난 5월 24일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을 위한 3차 보고회의(이하 상생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는 시작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재계가 고유가와 환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지나치게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추진하고 있어 부담스럽다는 의견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중소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이번 회의가 대기업들의 성토대회장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흘러나왔다.


이런 우려와 달리 대기업 총수들은 ‘30대 그룹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에 1조3천억원을 투자하고 협력 법위를 확대하겠다’는 ‘선물’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회의 결과에 주목한 것은 언론뿐, 정작 당사자인 중소기업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왜일까.


회의가 열리기 전 한 중소기업단체가 회의 주관부서인 산자부에 참석희망 공문을 보냈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중소기업상생협회’(회장·조성구)가 그 주인공. 협회는 산자부에 보낸 공문에서 “일선에서 중소기업 살리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장형 중소기업인들이 배제된 상생경영정책은 80%가 넘는 중소기업 고용시장의 노동자로 종사하고 있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다”며 실질적인 중소기업인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도록 3차 상생회의 참여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산자부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오히려 하소연에 가까웠다. “어려운 경영환경으로 대기업들의 불만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불공정거래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껄끄러워 질 수 있다”는 것. 결국 이 단체는 회의 참석 허락을 얻지 못했다.


대신 상생회의의 참석 멤버들은 재계서열 수위를 차지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본무 LG 회장 등 대기업 회장 20명과 강신호 전경련 회장 등 경제단체장 4명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 ‘초대’를 받은 중소기업인 대표는 김상면 자화전자 대표와 김태희 케이블렉스 사장 등 2명뿐이었다.

 

‘상생회의’ 앞두고 ‘대기업 스트레스 받는다’ 기사 쏟아져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주요 언론의 경제면에서는 ‘대기업이 상생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대·중소기업의 상생협력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고유가와 환율로 비상경영에 돌입한 대기업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가 일주일 동안 수차례 쏟아졌다. 모 경제지는 ‘상생 스트레스와 노예의 길’이라는 사설을 통해 “대기업 임원들이 중소기업을 도우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돕기만 하면 여기에 익숙해진 중소기업이 현실에 안주하는 ‘노예의 길’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대·중소기업상생협회 박영대 사무국장은 “하필 청와대 상생회의를 앞두고 주요 대기업을 광고주로 두고 있는 언론들에서 이런 기사가 쏟아져 나온 것은 상생회의를 대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런 언론의 보도를 의식한 듯, 지난 24일 상생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은 자율적, 자발적으로 추진돼야 하고 정부가 강요해서 추진하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며 “일부 언론에서 대기업 총수를 모시고 팔 비틀기, 겁주기 등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보도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수습에 나섰다. 결국 ‘대통령도 대기업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몸소 보여준 셈.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대다수 중소기업인들이 희망했던 ‘불공정거래 규제 방안’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자금 조성 방안만 쏟아졌다. 현장의 중소기업인들이 대·중소 기업의 상생을 위해서는 자금력과 규모를 앞세운 대기업의 ‘횡포’가 사라져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대기업들과 정부는 여전히 ‘중소기업은 도와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상생을 하자는 거냐, 생색을 내자는 거냐
정부가 지난해부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제시한 핵심 과제는 ▲공정한 파트너십 구축 (성과공유제 확산) ▲기술협력 (대기업 휴면특허 중소기업 이전) ▲인력교류 (대기업 전문인력 중소기업 지원) ▲자금지원 (수급기업투자펀드 조성) 등 네 가지다.


하지만 중소기업인들은 방향 자체가 대·중소기업 상생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도체부품 제조업체인 K사의 정모 기술이사는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휴면특허보다 우리 중소기업이 개발한 특허가 훨씬 뛰어난 경우도 많다”며 “수익성이 없어 창고에서 썩고 있는 특허를 내주는 것보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특허 강탈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꼬집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성과를 나눈다는 취지의 ‘성과공유제’도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산자부가 성과공유제의 실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사례에는 재계 서열 50위 안에 드는 기업이 ‘중소기업’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 특히 정부가 모범사례로 선전하고 있는 일부기업의 납품대금 현금 결제방안은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너무 늦게 시행 된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대기업의 전문인력을 중소기업에 지원해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높인다는 정책도 ‘속빈 강정’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 중소기업 기술지원 우수사례로 꼽힌 K사로부터 기술인력을 지원받은 중소기업 T사의 사장은 “진짜 좋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중소기업에 파견되어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심한 경우는 대기업에서 실적이 좋지 못한 사람을 ‘한직 발령’ 차원에서 보내오는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수급기업 투자펀드 조성 사업은 아직까지 별다른 실적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정책의 주관부서인 산자부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지난해 12월 산자부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추진실적 및 향후계획’이라는 보고서는 “4대그룹을 중심으로 상생경영이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라며 “중소기업인들도 이러한 상생협력 노력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산자부가 ‘중소기업인들의 긍정적 평가’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상생경영의 지속여부’에 대해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는 답변이 55.3%나 나온 중소기업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였다. 이쯤 되면 끼워 맞추기식 해석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관련기사 34면>


상생정책, 기조부터 전면 재검토해야
여기에 24일 열린 상생회의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요청하고 있는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 문제는 다뤄지지 않은 채 논의 의제만 무한정 확대됐다는 비판도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정책과 저출산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정책적으로 연결한다는 방안이 제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까지는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을 30대 기업, 2ㆍ3차 협력업체 등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논의했다”면서 “비정규직 문제, 저출산 대책 등 오늘 새롭게 제기된 이슈는 ‘사람중심의 경영’을 한다는 차원에서 제안드리는 사항으로 장기적으로 검토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 참석한 모 대기업의 한 임원은 “저출산 문제가 상생협력의 과제인지는 의문”이라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만 다뤄도 모자라는 마당에 엉뚱한 문제로까지 의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한편에선 노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는 ‘상생협력’과 ‘저출산’을 애써 연결시켰다는 해석도 나온다. ‘가족수당 누진제’ ‘가족친화기업 촉진법’ 등 설익은 정책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


이런 가운데 일선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알맹이는 빠진 채 추진되고 있는 대·중소기업 상생정책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의 김 모 박사는 “현재의 상생정책은 대기업의 시혜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 입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대·중소기업의 협력을 강화하려면 중소기업 기술 육성을 위한 환경조성이 선행되어야 하며,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관행은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라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현장에서 들어본 목소리도 비슷했다. “대기업의 선심성 지원은 바라지 않으니 중소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대기업의 횡포를 막아주고, 각종 규제를 현실화 해달라”는 것.


우리나라 전체 일자리의 90%, 국민소득의 98%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 활성화 정책과 정부의 불공정 행위 외면 등으로 이미 속빈강정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중소기업에 또 다시 속빈강정을 제시하며 ‘상생’을 하자니, 중소기업들은 이제 한숨마저 내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