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 마음 이어주는 어른들의 장난감
사람 사이 마음 이어주는 어른들의 장난감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4.06.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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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친구와 함께 주말이면 자연스레 야외로
작아도 폭발적인 속도감, 땀을 쥐는 레이스로 스트레스 해소
[일 . 탈_ 나만의 힐링을 공개한다] (6) 무선조종 자동차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비디오게임이 동심을 장악하기 이전, 소년들이 꿈에 그리던 장난감의 최고봉은 무선조종 자동차였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넘어서도 아직도 골목대장 시절의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탄탄하게 지지층을 구축하고 있는 무선조종(RC, Radio Control) 모형의 세계, 나이 든 소년(?)들이 여기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육해공 아우르는 RC, 직장인 중심으로 자리매김

2000년 즈음부터 취미로 RC 자동차를 만져 왔다는 노제국 씨. 올해 나이 마흔 넷이고 광고대행사를 경영하고 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시작했던 무선조종은 이제 그의 인생에서 떼 놓을 수 없는 취미가 되었다.

자동차가 가장 주를 이루긴 하지만, 비행기, 헬리콥터, 보트, 오토바이 등 육해공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교통수단이 RC 모형으로 만들어진다. 노 씨 역시 바퀴가 크고 강인한 이미지의 ‘몬스터 트럭’으로 RC 세계에 입문해서 지금은 오프로드용 경주 차량인 버기(buggy)에 집중하고 있지만, 가끔 비행기에 도전해 볼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애들 취향의 장난감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RC 모형은 생각보다 고가이다. 마치 자동차에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듯, RC 모형도 소모품에 비용이 들어간다. 또 내공이 깊어지면서 장비의 성능을 높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보통 자동차는 스로틀과 조향에 두 채널 주파수를 사용하는 권총타입 조종기를 사용하는데, 보다 복잡한 기동이 필요한 헬리콥터는 6개 채널의 주파수를 쓸 수 있는 스틱형 조종기를 써야 한다. 고급형 스틱형 조종기는 가격만 해도 2백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기본적인 장비의 가격대 때문에 일정 정도 경제력과 구매력이 있는 30대에서 50대의 직장인들이 RC 모형에 취미를 붙인다. 간혹 10대 학생들도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지만, 역시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쉽지가 않다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활성화돼 있는 온라인 RC 모형 커뮤니티 회원 수로 가늠해 봤을 때, 국내에 취미로 RC를 즐기는 인구는 대략 6~7만 명 수준이 아닐까 싶다고 노 씨는 말했다.

간혹 여성 애호가를 찾아볼 순 있지만, RC는 축구, 낚시와 더불어 대표적인 남탕취미이다. 기계 부품을 만진다든가, 뭔가를 뜯고 조립하는 걸 좋아하는 여성들이 드물다는 경향이 반영되기 때문일 거라고 보인다.

그러다보니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여성 동호인은 동호회 차원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고. 이용료를 받고 있는 경주용 서킷을 이용할 때도 여성 유저의 경우 공짜라고 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RC는 참 풀뿌리 같은 취미”

다른 애호가들과 마찬가지로 RC를 취미로 즐기는 이들 역시 대단히 열성적이다. 좋아하는 취미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해 조직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한다. 우선 내 취미를 즐기는 데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RC 모형을 구동하려면 일정 정도의 한적한 공간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전동 모터와 배터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모터 RC 자동차 역시 꽤 빠른 속도감을 즐길 수 있지만, 많은 애호가들이 여전히 엔진 RC 자동차를 선호하고 있다. 문제는 이 엔진이 큰 굉음을 내기 때문에 한적한 야외라고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먼지가 심하게 날리는 점도 문제다. 평소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RC 자동차는 굉장히 빠르고 기민하다. 최고 사양의 모델은 시속 100Km를 넘는 것도 있으며, 어지간한 하이엔드 모델이면 시속 60~70Km는 넘는다고 한다. 일반 승용차 안에 앉아서 체감하는 것과 작은 RC 자동차가 움직이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사용자의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으로도 대단히 기민하게 방향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 움직임은 격렬하다. 만약 이러한 오프로드용 버기카 스무 대가 동시에 운동장을 질주하게 된다면? 당연한 예상이지만 먼지구름이 운동장을 뒤덮는다.

보행자나 자전거와의 충돌 등으로 인한 안전 문제야 가장 기본이니 차치하고서라도, 소음과 먼지 때문에 RC 애호가들은 종종 구박을 받는다. 한강 고수부지 구석의 한적한 장소에서 자동차를 굴릴라치면, 보이지 않는 그늘에 숨어 있던 한 쌍의 커플이 관리소에 신고해 쫓겨나는 경우도 많았다.

노제국 씨는 “강동구 쪽의 고수부지에 보면 BMX 자전거 묘기용 트랙 시설을 비싼 돈 들여 설치해 놓았는데, 보면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다”며 “그럴 듯해 보이는 시설에는 예산을 낭비하면서 RC 동호인들에겐 아주 작은 공간도 내주지 않으니 서럽다”고 하소연한다. 노 씨가 운영하던 동호회에서는 회원들이 비용을 추렴해 땅을 임대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그럴 듯해 보이는 장소가 있으면 직접 찾아가보는 열성도 자발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여지들에 대해서 정확히 숙지하고 규칙을 만들어가는 것도 RC 애호가들의 조직적인 힘이다.

공간과 관련한 이런 애로점 때문에 서울 시내보다는 경인 외곽 지역, 그리고 지방에서 RC 동호회가 더 단단하고 내실 있게 운영된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시 인근에서 굉장히 활성화 돼 있는 RC 자동차 동호회도 서킷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땅이 있으면 자체적으로 트랙과 코스를 세우고 서킷을 만든다. 노 씨는 “RC는 참 풀뿌리 같은 취미”라며 혀를 내둘렀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누군가와 함께 해야 재미있는 취미

RC가 왜 매력적인 취미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노제국 씨는 예상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남과 어울리는 취미, 누군가와 함께 해야 재미있는 취미기 때문에 좋은 거 같다는 답이었다. 뭔가를 만들고 조립하고, 특히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방 반하게 되는 취미라고 설명하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약간은 마니아적인 취미가 아닐까 선입견을 가졌는데 의외다.

아들 딸 두 자녀를 둔 노 씨는 휴일이면 가족들과 미사리 조정경기장이나 한강 고수부지 등을 자주 찾는다. 올해 중학교 1학년인 큰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RC 자동차를 만지기 시작했다. 부자가 나란히 RC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아내와 딸은 딱히 RC에 흥미가 없어도 자전거를 탄다든지, 야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디 가서 술만 마신다든지, 휴일에 배 깔고 누워서 TV만 보게 될 수도 있잖아요. 거기에 비해서 RC는 굉장히 건전한 취미라고 집사람도 인정을 하는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가족끼리 자주 야외로 나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더욱 만족스러워합니다.”

직장을 갖고 있는 까닭에 주로 주말을 이용해 취미를 즐기지만, 한창 RC의 매력을 알아가던 무렵에는 평일에도 수시로 한강 고수부지를 찾았다.

퇴근 후 모여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자동차를 굴리는 거다. 노 씨는 이처럼 “혼자서는 재미가 없으니까 동호회들을 중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이게 된다”고 말한다.
본격적인 경주용 서킷이 아니더라도 동호인들끼리 모여서 벌이는 레이스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RC 동호인들의 표현처럼 “손가락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즉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실제 자동차 경주가 주는 쾌감처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스트레스가 확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한다. 작아도 폭발적인 속도감을 느낄 수 있고 조종하는 대로 기민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굴리는 것도 재미이지만 RC는 “정비가 반”이기도 하다. 구동 원리가 실제 자동차와 거의 흡사한 엔진 RC 자동차의 경우, 사용하는 용어도 거의 같다. 자동차 경주에서 차량 정비나 수리를 맡는 미캐닉의 역할이 중요하듯, RC 자동차 세계에서도 미캐닉은 필수다. 동호회마다 경험과 지식이 많은 정비의 고수는 한 사람씩 있기 마련이다.

“모터처럼 배터리만 꽂으면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엔진의 경우 아주 예민한 부분이 많거든요. 온도에 대해서도 다뤄야 하고, 작은 부품을 유기적으로 조절해 가면서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초보자들이 독학으로 이를 배워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예요. 같이 모여서 뭔가를 배워나가고, 하나하나 막혔던 부분을 정복해 나가는 재미가 있지요.”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함께 한다는 것”, 평범함이 아쉬워진 요즈음

일을 하면서든 취미를 즐기면서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누군가와 일절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이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주변에 사람은 넘치지만 쓸쓸함을 느끼는 역설적인 경우도 왕왕 생긴다.

“직장을 그만두고 사정 때문에 2년가량 RC에서 손을 뗀 적도 있었어요. 그때에도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이들과는 자주 만나고 고민도 털어놓고 그랬죠. 이해관계 때문에 만난 사이가 아니잖아요. 직장 동료들처럼 긴장된 관계일 필요도 없고. 좋아하는 걸 함께 즐긴다는 너무나 순수한 의도로 가까워진 이들이니 편안한 거죠.”

길을 가다가도 RC를 즐기고 있는 이들을 보면 노제국 씨는 서슴없이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건넨다고 한다. 상대방도 별 거부감 없이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관심사가 같은 이들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동질감 같은 거라고 한다. 갈수록 사람 사이가 삭막해진다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된 요즈음,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즐긴다는 평범한 이야기가 참 듣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