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고용·실업대책 사이로 황소바람 숭숭
구멍 난 고용·실업대책 사이로 황소바람 숭숭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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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실업정책의 허구성
24조 투입했는데도 구직자, 구입업체는 ‘추워라~’

2004년 겨울,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이중의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쪽에서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인데, 다른 쪽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어 멀쩡한 기계에 녹만 슬고 있는 지경이다.

정부는 이러한 기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98년부터 2002년까지 22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고용실업 정책 예산에 이어 지난해에도 2조 가까이 예산을 투입했지만 개선 기미가 없다.

실업자 10%만 중소기업 가도 인력난 해결된다는데…

지난 11월까지 정부의 공식 통계에 잡힌 실업자는 77만여 명이다. 이들 중 의욕적으로 첫 사회생활을 꿈꿔야 할 청년층 실업자는 33만 명. 여기에 구직 단념자도 9만 명에 달했다.

물론 이는 공식적 집계 결과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실업자까지 합치면 ‘실업자 신세’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1백만 명을 훨씬 웃돈다.

반면 중소기업의 인력부족 현상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지난 7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788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인력현황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42%가 ‘적정인원에 비해 인력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전체 조사기업의 인력부족률은 6.5%. 특히 5~19명 이하 사업장의 생산직 인력부족률이 13.0%인데 비해 100~299명 이하 사업장은 5.1%로 나타나 소규모 기업, 생산직일수록 사람을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청 인력지원과 양봉환 과장은 “전국적으로 인력부족률이 6.5%일 경우 14만명 가량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라며“현재 통계상 실업자의 10%만 중소기업으로 가도 중소기업 인력난을 해소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 답답하다”고 하소연한다.

고용안정센터보다 생활정보지가 빠르다?

그렇다면 실업자의 10분의 1마저도 중소기업에 갈 의사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적절한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해 주지 못하는 것일까.

2003년 말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공직업 안정기관은 171개로 이중 고용안정센터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직후 99개였던 고용안정센터는 1999년에는 122개, 2000년 126개로 늘어났고 2001년에는 민원인의 접근 편의성을 위해 35개 지방 분소까지 설치하면서 2003년 말에는 155개로 늘었다.

하지만 고용실업대책 종합기구라는 위상에 맞는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고용안정센터를 통한 청년층 등 구직자의 취업률은 지난 2000년 25.0%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져 지난해에는 19.3%로 급감했다. <그림>

기업들의 고용안정센터 이용률이나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인력 채용 계획이 있는 기업의 70%(복수응답)가 구인광고 및 사설 구인업체의 인터넷사이트를 활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비해 공공기관 취업알선 센터 활용은 50.4%에 그쳤고, 학연·지연 등 연고채용도 24.8%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수요자 필요는 쏙 빠진 고용서비스

버젓한 공공 직업안정 기관을 두고도 생활정보지를 뒤적이거나 인맥을 통해 취업자리를 알아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용안정 서비스 이용자들은 형식적인 데이터 관리와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 제공을 문제로 꼽는다.

안산에서 모니터 내장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T정밀은 부족인력 10명을 채용하기 위해 지역 고용안정센터의 문을 두드렸다가 정부의 고용안정 서비스에 대한 불신만 커졌다. 

구직등록자 10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지만 5명은 취업 의사가 아예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취업의사도 없으면서 왜 구직 등록을 했냐고 물었더니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등록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명은 이미 다른 업체에 채용된 상태였고 나머지도 토요 휴무여부, 출퇴근시간, 임금 수준 등을 문제로 면접조차 거부했다.

단 한 명의 필요 인력도 충원하지 못한 이 회사는 이제 중국으로 공장 이전 절차를 밟고 있다. 인사관리과 김정훈 부장은 “이미 조선족 노동자가 절반을 육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국내에서 고용을 창출한다는 ‘보잘 것 없는 애국심’마저 의미가 없어졌다”고 푸념을 했다.

구인자와 구직자가 넘쳐나지만 이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편직물 생산업체인 B섬유는 최근 섬유산업의 사양화에 따라 고부가가치화 전략을 세우고 적당한 디자이너를 물색했지만 넉 달째 사람을 못 구하고 있다. 지역 고용안정센터에 구직등록한 사람 중에는 적당한 디자이너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높은 임금을 요구해서 일단 고용안정센터를 이용한 구인은 포기한 상태다.

이 회사 총무부의 이동춘 과장은 “차라리 신출내기를 뽑아서 직업교육을 시키는 방안도 고민해 봤지만 노동부의 재직자 환급 교육과정 중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과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영등포 고용안정센터에 구직등록해 놓은 오명환(32·가명)씨는 “구직등록 당시에 형식적인 양식에 대충 분류된 희망 직종과 연봉을 적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희망하는 근로조건 등에 관해서는 제대로 기술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오씨는 편집디자이너를 희망하고 있지만 노동부 워크넷에는 직종이 ‘출판,인쇄’로 분류되어 있어서 이 자료를 보고 전화를 걸어오는 업체들은 인쇄기 조작원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지역별, 업종·직종별로 구인자와 구직자의 요구가 모두 다른데도 대상별로 특화된 수요자 중심의 고용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은 주요 고용실업대책 중 하나인 재취업사업도 마찬가지다. 노동부의 ‘고용촉진 훈련 대상자별 취업률’에 따르면 2003년 전체 훈련 실시자 1만1700명 중 취업까지 골인한 경우는 43.9%에 그쳤다.
실업자 재취업 훈련의 경우, 이보다 더 낮은 42.7%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마저도 훈련의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통계 집계 시 전체 취업률만 집계할 뿐, 훈련 과정과 관계가 있는 업종에 취업했는지는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훈련과는 상관없는 업종에 취업한 사람, 각자 알아서 취업한 사람, 소규모 개인 창업, 심지어 군 입대까지 취업 실적으로 분류되고 있다.

각 지역별 산업의 특색과 노동시장에 대한 조사도 없이 예산부터 분배하는 고용서비스 행정도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03년 각종 고용안정사업의 예산 집행 실적은 49.4%에 불과했다.

중앙으로부터 예산을 따내기에 바쁜 시도 지자체에서 상황은 더 나쁘다. 지난 11월 18일 광주시 고용안정센터의 발표를 살펴보면 재취직 훈련기관을 수료한 40세 이상 실직자를 채용하면 사업주에게 1년동안 420만원을 주는 ‘중장년 훈련수료자 채용장려금 사업’의 경우 지난해에는 단 한건의 지원실적도 없었고 올 1∼10월까지도 51개 업체(71명), 3천158만원이 집행되는데 그쳤다.

 

고용서비스 재정비 시급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고용안정서비스는 구인자 실업자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덩치만 키우는 대표적 탁상행정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2001년 노동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중소기업 밀집지인 안산·시흥 지역을 대상으로 한 달간 심층 실태조사를 실시해, 이를 토대로 인력확보 지원대책을 마련한 결과 지역의 취업률을 80%까지 끌어올렸다.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철저한 현장조사가 있었다. 지역에 있는 4321개 업체와 구직 등록자 전체를 대상으로 요구사항을 조사한 결과 구직자와 구인자 간의 요구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지역에 분포한 업종별로 필요한 교육훈련 과정을 설치할 수 있었다.

담당부처의 책임자가 바뀌고 고용실업대책도 변화를 반복하면서 지금은 사장됐지만 탁상행정에서 현장행정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관련기사 33면>

철저한 현장조사와 더불어 지역별, 업종별, 기업 규모별로 고용서비스를 차별화해 제공해야 할 필요성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고용정책연구원 박훤구 원장은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각해질수록 천편일률적 고용대책은 설 자리가 없다”며 “업종별, 지역별로 대책을 차별화하고 예산도 차등 지급해 예산 낭비는 줄이고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정만 된 채 집행조차 되지 않는 막대한 고용실업 예산을 실질적 고용환경 개선에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청년층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실질적 고용조건을 개선해 취업을 유도하는 것이다.

지난 5년간의 고용실업대책은 막대한 예산 투입과 제도 설치만으로는 고용사정이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77만에 이르는 실업자와 속수무책으로 녹슬어가는 중소기업의 설비가 정책의 실패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외형만 키워온 고용실업대책을 재정비하고 수요자 중심 고용서비스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