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등 돌리고, 한국노총과는 ‘밀당’
민주노총 등 돌리고, 한국노총과는 ‘밀당’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4.09.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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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노정 채널, 무엇을 담을 것인가 ② 흔들려온 노사정위원회
외환 위기 극복 위해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
정상화와 파행의 반복 속 흔들리는 위상

한국 현대사는 물론이고 노동사에 있어서도 1997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몇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기는 했지만 탄탄대로를 달리던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87년 이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던 노동계가 고용안정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건. 그것은 나라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다.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때부터 김영삼 정부는 사실상 그 역할이 중지됐다고 할 수 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야당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우선 이 문제에 모든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IMF는 구제금융 지원 조건으로 강력한 구조조정을 내세웠고 새로 출범하게 될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사정 대타협이 필요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 전인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2월 6일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우리가 흔히 노사정 대타협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90항에 달하는 협약에는 재계의 요구사항이었던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법제화, 그리고 노동계의 요구였던 공무원 및 교원의 노조 결성권 허용,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 재벌개혁, 사회보장제도 확충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정리해고와 파견제 수용은 두고두고 노동계의 발목을 잡게 됐다는 점에서 노사정위원회는 첫 발부터 노동계와는 일종의 악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1기 노사정위원회는 대통령 당선자의 뜻과 사회적 분위기를 등에 업고 출범한 일종의 임의기구였다. 1998년 6월 3일, 2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노사정위원회규정’이라는 대통령령에 따른 기구가 된다. 3기는 1999년 9월 1일 출범했는데 ‘노사정위원회의설치및운영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법률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2007년 4월 27일 명칭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변경되면서 4기가 출범했다.

▲ 1998년 1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위원회를 출범시킨다. ⓒ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민주노총의 결별 선언

민주노총은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시절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지만 98년 3월 31일 임원 선거에서 이갑용 위원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노사정위원회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갑용 위원장은 4월 1일 “노사정 합의안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고 “노사정위원회를 구속력을 갖는 기구로 격상하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재협상이 전제되지 않는 한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기 노사정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요청하자 민주노총은 98년 6월 10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무원노조 합법화, 노동시간 단축 등의 합의 사항이 이행되지 않자 민주노총은 지속적으로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고, 1999년 2월 24일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탈퇴를 공식 결정한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의 틀 속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민주노총으로서는 노사정위원회가 ‘계륵’일 수밖에 없다. 노사정위원회 복귀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이수호 위원장이 ‘사회적 교섭안’을 앞선 대의원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2월 1일 대의원대회에 상정했다. 그러자 ‘사회적 합의주의와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가 물리력을 동원해 저지에 나섰다.소화기와 시너, 심지어 칼까지 등장한 이날의 난투극은 민주노총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3월 15일 다시 한 번 대의원대회를 열고 안건 상정이 있었지만 폭력사태가 되풀이되고 말았다.

이런 아픈 경험을 갖고 있는 민주노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주장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현재의 노사정위원회 구조 아래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설령 사회적 대화 재개를 원하는 집행부가 출범하더라도 내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노사정위원회 참여 문제를 공론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원회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물론 순항만 거듭한 것은 아니었다. 구조조정 중단을 요구하며 탈퇴하기도 했고 2009년에는 타임오프 등 노조법 개정안을 두고, 2013년에는 민주노총 공권력 투입에 항의해 불참을 선언했다. 결국 노사정위원회는 그럴 때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은 1998년 2월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에 나섰다. ⓒ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환노위 노사정 소위라는 시도

지난해 파행 이후에는 새로운 시도도 있었다. 올해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노사정 사회적 논의 촉진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키로 한 것. 사실 이 기구는 2013년 9월 민주노총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노동관계법 관련 논의를 위한 한시적 기구를 국회 환노위원장을 소집권자로 해서 구성하자는 제안이었다. 노사정위원회가 아닌 다른 형태의 노사정 대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기와 내용이 문제였다. 우선 시기적으로는 민주노총 공권력 투입이 있은 후였고, 민주노총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선언한 터여서 쉽사리 들어갈 수 없었다. 또 노사정 소위에서 두 달간 논의 후 관련 내용을 노사정위원회로 이관한다는 점도 민주노총의 발길을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결국 노사정 소위는 한국노총만이 참여한 가운데 운영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경과 보고만 한 후 해산했다. ▲ 근로시간 단축 ▲ 노사·노정관계 개선 ▲ 통상임금 문제 논의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것이다.이렇게 노사정 대화의 장은 다시 노사정위원회로 돌아왔다. 한국노총의 8개월 만의 복귀 이후 이전과 달라진 노사정위원회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노사정위원회로서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