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가볍게, 좀 더 친구처럼”
“좀 더 가볍게, 좀 더 친구처럼”
  • 박상재 기자
  • 승인 2014.10.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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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노래 신동’에서 17년차 가수가 되기까지
좋아진 노동환경, 여전히 열악한 무대
[사람향기]노동가수 지민주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kr

집회 중 노동가수가 무대에 오르면 사회자가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분위기 한 번 띄워보겠습니다.” 그러면 무대에 오른 지민주가 말한다. “분위기 띄울 거면 소녀시대를 불러라.” 노동가수에 대한 지민주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갈(一喝)이다.

노래의 시작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나보고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광주 얘기를 해주고, 대학가면 그림패에 들어가라고 하고.”

지민주 씨는 어려서부터 흔히 말하는 ‘노래 신동’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던 꼬마는 마을 어른들 앞에서 구성진 트로트를 곧잘 부르며 용돈도 받곤 했다. 하지만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미대 입시를 목표로 공부를 했고,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다만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들이 지금의 가수 지민주를 있게 한 계기가 되기는 했다.

1987년, 고등학생인 그녀가 미술학원에 다니던 때였다. 그 해 밤에는 미술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대학가에서 데모가 있었고, 그 곳에서 매캐한 연기를 맡아야 했다. 당시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어느 날 미술학원 선생님으로부터 1980년 광주 이야기를 들었고, 초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생각났다. 광주에서 전학을 왔다던 한 친구가 갑자기 울었던 기억. 왜 우냐고 묻자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고 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광주학살이 있던 날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유년 시절의 경험과 끼워 맞춰지며 많은 충격을 줬다.

그 충격은 자연스럽게 대학교 그림패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곤 얼마 후 대학 내에서 오르간을 치는 동아리를 발견했고, 신기해서 가입을 한 이후로는 쭉 그림보다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노래의 시작이다.

연대와 소통을 위해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도 ‘날라리’ 운동권이었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운동을 책으로만 배운 수준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후인 1994년부터는 ‘좋은 친구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백기완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학생 문예단 활동을 하면서 ‘왜 대구에는 노동자와 함께 하는 문예패가 없을까’ 의문을 품고, 직접 패를 꾸려 활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문화패를 생업으로 삼기 보다는 다른 일을 하며 남는 시간에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접목해 나가며 활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활동을 시작하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민주는 이 시기를 ‘어설펐지만, 진솔했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얼마나 경직돼 있었냐면 처음으로 현장을 가서 노동자들은 굉장히 계급적이기 때문에 ‘학출’티를 내면 안 된다며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어딜 갈 때도 보고를 서로 하고 가기로 하고. 예를 들면 ‘민주 동지, 화장실 다녀올게’라고 하는 식으로. 이런 게 어디 있어. 나중에 주변 사람들이 말을 하더라고요. 너희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아냐고. 어설프긴 했지만 참 진솔했던 시기였어요.”

이 시절을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사실 ‘좋은 친구들’에서 활동한다는 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좀 더 크게 말하면 문화패가 노동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문화패를 활동하면서 동시에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사로 7년간 일을 했고, 아르바이트도 계속 해야 했다. 남는 시간이면 현장에서 함께 노래를 불러야 했고, 연습도 계속 해야 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자 어느 날 많은 것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가수를 전업으로 삼아 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면 ‘풋내기’를 거쳐 이제는 선배 가수가 된 지민주에게 노래란 무엇일까? 노동자들을 찾아가 함께 힘들어하며 눈물 흘리는 노동 가수의 삶을 아직까지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올해 9월 3일 열렸던 코오롱 노동자 집회를 예로 들며 ‘연대’가 그 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삐까뻔쩍’한 압구정에서 비를 맞고 있자니 정말 초라하더라고요. 주눅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위원장님이 집회 온 참가자들을 위해 혼자서 구석구석 비닐을 설치하고 있더라고요. 비 맞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는 거죠. 이런 것들을 보며 우리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 그렇게 그들과 노래를 부르며 느끼는 따뜻함이 제가 추구하는 행복이자, 노동가수로서 느끼는 보람입니다.”

하지만 연대감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었다.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꿈도 함께 이뤄지지 않았다면 10년이 넘게 노동 가수로 활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저는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한국처럼 민중가요가 발전한 곳이 세계적으로 없는데, 그 판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파업가는 20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몇 번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어가고, 멋있게 젊은 세대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을 계속 만들면서 살고 싶어요.”

그 꿈은 공연 분위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무대는 항상 활동적이며, 웃음이 있다. 적어도 마이크를 잡고 있는 순간만큼은 밝게 웃는 노동자와 그들 앞에서 더욱 힘차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구나 가벼운 것을 좋아하지만, 세상이 무거울 뿐이에요. 17년째 노래를 하고 있는데,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집회가 너무 많아요. 더우면 시원하게, 추우면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 게 가장 큰 배려에요. 모든 자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노래는 좀 더 가볍고, 친구 같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역할이에요. 정말 진지한 얘기를 하고 싶다면 제 콘서트와 같이 제가 직접 준비한 자리에서 하면 돼요.”

노동가수 부부 그리고 아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kr
“결혼상대로 예술 하는 남자는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10년이 넘게 이어온 가수 생활이지만, 최근 그녀의 생활을 반전시킨 것이 있다. 남편과 아들이 생긴 것이다. 지민주 씨의 남편은 가수 연영석 씨. 선·후배 사이였던 그들이 이젠 가족이 됐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됐다. 가수 부부라는 게 서로의 노래에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서로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며 웃는다.

“예술은 자기애가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고, 이로 인해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는데 서로 에너지를 갉아 먹는 거죠. 아이가 생긴 이후로는 더욱 그래요. 서로 피곤하니깐 예민해서. 그러다간 ‘야! 너만 음악 하냐! 나도 음악 한다!’ 이런 말도 하면서 다투기도 하고. 시너지 같은 건 없어요. 근데 처음 만날 때부터 전 신랑의 팬이었어요. 음악이 좋았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장점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는 연영석 동지를 존중해요.”

그리고 또 한명의 가족인 아들 ‘연준우’. 혹시 무슨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물어보니 “그냥 예쁘잖아요”라고 말한다. 이젠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가수 생활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아이는 어떤 존재일까?

“예전엔 환경, 교육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노동자와 연대를 찾는 지민주밖엔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활동의 폭이 넓어졌어요. 지금은 많은 것들이 관심거리에요. ‘대안학교는 대안이 아니야. 공교육을 확립시켜야 해’ 혹은 ‘방사선은 위험해. 그래서 고리 원전은 없어져야 해’ 등등. 교통, 시설, 의료민영화, 노동 등 관심이 많아졌어요. 특히 활동가들에게 아이는 정말 좋은 목적이고 근거가 돼요. 아이를 위해 싸우고, 아이들이 싸움의 원동력이 되고.”

이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에게 세월호 참사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슬퍼할 일이잖아요”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해서 광화문을 다니며 유가족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얼마 전엔 세월호 집회장에서 ‘길 그 끝에서’를 불렀어요. 이 비트 강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게 맞는 걸까 무대에 오르는 순간까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힘을 내서 일어나야 하니깐 양해를 구하고 불렀어요. 많이 걱정했는데 끝난 이후 생각보다 많은 메시지가 왔어요. 정말 많은 힘을 얻었다고요.”

“우리 안에서의 차별은 계속 되고 있다”

“옛날에는 비행기타면 부자인 줄 알았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해외여행을 가고. 내가 제일 가난한 것 같아.”

그동안 다양한 현장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바라본 한국의 노동환경에 대해 그녀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외받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환경 많이 좋아졌죠. 하지만 우리 안에서의 차별은 계속 되고 있어요. 참 슬펐던 일 중 하나가 KTX 여승무원 집회였어요. 그 사람들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싸울 때 청소 용역 아주머니들이 함께 와서 연대 파업을 했어요. 근데 여승무원 부모님들이 ‘우리 딸이 뭐가 못나서 청소하는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라고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아주머니 얼굴이 떨어지는 거죠. 연대는 참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연대는 평등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이 깨지지 않고선 노동조건이 좋아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덧붙여 노동 가수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했다.

“여전히 우리를 ‘딴따라’로 취급하는 인식도 있어요. 가끔 무대에 오르면 사회자가 한 마디 해요.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분위기 한 번 띄워보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무대에서 ‘지랄지랄’해요. 이게 무슨 분위기 띄우는 거냐고. 사실 노동 가수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전엔 노조 임단투를 갔는데, 돈을 안 줘서 후배들이랑 밥도 굶고 구석에 앉아있었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누군가는 임금을 올리기 위해 집회를 하는데, 우리는 정작 라면 먹을 돈이 없고, 함께 사는 사회에 우리는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힘든 현장이라면,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제 돈을 주고서라도 가요. 하지만 노동환경이 점차 좋아지듯 문화 인식도 함께 올라가야 하는데, 예술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죠.”

이런 환경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일과 노래’라는 팀의 총 기획자로 활약하고 있다. 음악과 영상을 통해 그간의 노동운동사를 정리하고, 노조와의 관계 속에서 점차 저조해지는 노동 문화를 바로잡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래 앨범은 올 겨울에 나오기로 했는데, 별로 작업을 못했어요. 저 개인도 중요하지만 더 늙기 전에 노동운동사를 정리도 하고, 우리의 음악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욕심이 더 많아요. 같이 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거든요. 지금 제게 단독 공연은 사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