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함은 세 치 혀에서 시작된다
천박함은 세 치 혀에서 시작된다
  • 임성봉 기자
  • 승인 2014.10.0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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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밑에 도끼가 있다.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심지어 저승에는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이 있다고 하니 말의 무서움을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 요즘 우리가 내뱉는 말을 보면, 폭언을 넘어 저주에 가깝다. 흡사 야만사회로 회귀하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숙명여대 작곡과 사태를 보자. 이 대학 작곡과 홍 교수는 학생들에게 “너희는 살 가치가 없다. (3층 건물에서)뛰어내려라. 아니다. 너희는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된다. 너희 시체는 썩어서 우주의 쓰레기가 될 것이다”, “네가 밤에 곡을 못 쓰는 이유라도 있냐. 혹시 밤일을 나가냐” 등의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막말이다. 그것도 소위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교수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니. 인격의 천박함이 언어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비단 홍 교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폭언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지난 9월 13일에 새누리당 부대변인은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정성구 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장애자 이 X새끼, 넌 죽어야 해, 하남에서 못 살아 이 X새끼야’, ‘다리 하나 더 없어져라’며 폭언을 쏟아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언사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언으로서 분노를 배설해야 하는 병이라도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단지 ‘갑질’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언어를 만들고, 언어가 시대를 만든다. 동시에 언어는 의식을 지배하고, 의식은 언어를 지배한다. 칼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말하는 칼은 임진왜란 이전에 ‘갈’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란을 겪으며 ‘갈’은 ‘칼’이 됐다. 한 획 차이지만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아무래도 갈보다는 칼이 더 날카롭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변한 언어는, 다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공격적인 성향을 강화시킨다. 고로 ‘폭언과 막말’은 환경과 결코 무관치 않다. 막말, 폭언의 이유를 개인에게서만 찾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금 당장 신문을 들춰보고 뉴스를 보라. 패륜적 범죄가 연일 사회면을 채우고, 경악을 금치 못할 정치사건이 숱하게 전파를 탄다. 게다가 서민 경제도 좋아질 기미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한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청년은 희망을 포기하고, 자살률은 여전히 고공행진이다. 불과 얼마 전 우리는 수백의 꽃다운 아이들이 바다에 가라앉는 참사도 경험했다. 가히 임진왜란이 비견할 국란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언어가 변하지 않을 리 없다. ‘갈’이 ‘칼’이 된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더 날카롭고 공격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간과하면 안 된다. 팽팽한 긴장의 현실이 폭언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사회의 비정상화를 읽어내야 한다. 언어는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환경, 그리고 의식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가늠하는 척도다. 지금은 바야흐로 ‘폭언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