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돌을 굴리면 언젠간 이루어진다
매일 돌을 굴리면 언젠간 이루어진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4.10.23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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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통합․정치세력화․노사공동기구가 갈 길
완벽하지 않더라도 우선 시작하는 것이 중요
[기획인터뷰 2] 이용득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이용득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책을 내놨다. 아직도 이용득 ‘위원장’이란 호칭이 익숙한 이 최고위원은 <노동이 밥이다>(미래를 소유한 사람들)라는 책을 통해 지나온 길을 회고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노사의 벽을 넘는 담쟁이가 되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이 최고위원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특히 최초의 기록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최초로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하고, 또 한국노총 최초로 산별노조를 만들었고, 금융산업 최초의 총파업을 두 차례 이끌었다. 그리고 한국노총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태일 노동자상을 받기도 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노동운동이 갈 방향에 대해서도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양대노총이 통합하고, 정치세력화를 이루고, 제대로 된 노사공동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대목에 가서는 목소리가 커졌다.

인터뷰는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시작하기 전 자리에 앉으며 담배를 끊는 중이라고 했지만, 소문난 골초였던 이용득 ‘위원장’은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자주 마른기침을 뱉는 모습에서 주변의 건강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터뷰 후 늦은 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이는 그는 천상 이용득이었다.

인터뷰 동안 여러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했다. 본인의 후임 금융노조 위원장들에 대한 짙은 아쉬움을 토로하는 얘기도 있었고, 외환위기 당시 정부 관료들과 은행 경영진들을 향해서는 걸쭉한 욕지거리가 추임새처럼 따라붙었다. 이 내용들은 굳이 인터뷰에 담지 않았다. 훗날 이번 책보다 좀더 구체적인 책을 쓸 계획도 있다고 하니, 그 책에서 다룰 몫이라 판단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kr

경성고에서 덕수상고로

위원장 시절부터 ‘용팔이’라고 불릴 정도로 저돌적 이미지, 결단력이나 돌파력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번 책을 보고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 수배 시절 쓴 글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업은행 초년병 시절 사보에 쓴 자전거 여행기도 대단하더라.

어렸을 때 백일장도 나가고 했다. 중학교 때 3년 장학생으로 뽑혀서 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우리는 특대반이라고 해서 9개반 중 한 반만 3년 동안 반 이동이 없이 그대로 올라 갔다. 그 때 국어 선생님이 2학년 때 거의 1년 동안을 매일 1원씩 줘서 남산시립도서관에 보냈다. 하루에 책 한 권씩을 지정해 주면 그 책을 읽고 하루에 한 권씩 독후감을 써냈다. 그 때 옆길로 새서 선생님이 읽으라는 책은 프롤로그, 에필로그 부분만 읽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무협지 읽었다. (웃음). 요령을 피운 거지. 어쨌든 그 선생님이 나를 찍어서 그렇게 해주신 것 보면 쓰는 게 남달랐다고 보신 것 같다. 사실 한 번도 글을 쓸 기회 없이 자라왔다. 상고 나오고 스무 살부터 직장생활 하고, 주경야독을 하면서 시간이 없었다. 은퇴 하고 나면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경성고등학교 2회인데 8~9개월 정도 다녔다. 장학생으로 들어갔는데 과락이 있으면 장학생에서 탈락되는지 몰랐다. 독일어가 그렇게 싫었다. 독일어를 아예 안 했더니 20점이 나왔다. 그래서 과락으로 장학생에서 탈락이 됐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학교를) 다니기가 어렵게 됐는데 밴드부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해서 2학기 때 밴드부에 들어갔다. 이미 TO가 다 차서 수자폰이라고 악기 중에 제일 큰 악기가 있는데 그걸 불라고 하더라. 장학금 받으려고 그거라도 불겠다고 했다. 밴드부가 워낙 군기가 세다. 거기서 사고가 나서 다섯 명이 동시에 자퇴를 하게 된다. 그래서 블록 공장을 다니게 된다. 그 때 수녀님이 오셔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해서 다시 덕수상고를 들어간 거다.

육아휴직 도입, 10개월에 걸친 설득

노조 활동을 하면서 최초의 기록이 많다. 먼저 상업은행노조 시절 국내 최초로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했다.

1984년이었는데 내가 어떤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상업은행노조 여성부장이 독일의 잡지를 가져와서 독일에는 육아휴직 제도가 있는데 이걸 우리나라도 도입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더라. 당시 나는 여성담당 부위원장이었다.

1981년 이전만 하더라도 여행원 결혼 각서제(여행원은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쓰고 입행한다)가 있어서 여행원들은 시집을 잘 안 갔다. 가정이 어려우니 동생들 학비 대고 부모 봉양해야 하는데 시집 가는 순간 은행을 그만둬야 하니까 노처녀들이 많았다. 그것처럼 후진적인 제도가 어딨나.

그런데 시대가 그랬다. 모든 직장이 결혼하면 그만두는 거다. 그것이 없어진 것이 81년이니까, (육아휴직 제도 도입 논의) 3년 전의 얘기다. 불과 3년 뒤에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자고 하니까 너무 빨랐다. 우리나라에 육아휴직 제도라는 게 당연히 없을 때고, 결혼 해서 다니는 문제를 겨우 해결했는데 애 낳는 것까지 걱정을 안 한다. 산전, 산후 휴가가 30일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이 확대돼야 하는데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하자니까 위원장이 ‘해 보슈’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더라, 10개월이 걸렸다. 먼저 인사부 대리에게 설명을 했다. ‘뭐든지 앞서 가는 게, 특히 여성들의 사회활동 확대를 위해 우리가 가야할 방향 아니냐, 합시다’ 했다.

나는 그 때 20대 후반의 행원이었고, 대리는 30대였다. 대리가 설득이 된다. ‘나는 좋다, 그런데 윗사람들이 지금 분위기상 하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하나하나 설득해 나가려고 한다’고 했다.

이러면서 다음에 과장을 설득한다. 과장도 설득이 됐는데, 차장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다음으로 인사부장을 설득하는데 부장은 단호하게 No다. ‘다른 은행 하고 같이 하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상업은행만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너무 획기적이고 빠르다, 못 하겠다’고 하더라. 인사부장은 임원 승진 직전의 예비 임원이다. 뭘 해서 비난 받거나 하는 걸 싫어한다. 끝까지 설득을 시켰다.

요즘은 단계가 간소화 됐지만 그 때만 해도 이렇다. 다음으로 이사, 상무, 전무를 설득시키는데 10개월 걸렸다. 다 설득이 되면 OK 했냐, 아니다. 인사부장을 설득하고 있는데 ‘아니, 김 과장도 부정적이던데 뭘 설득을 했다고 하냐’ 그러면 내가 과장을 만나서 ‘지난 번에 다 OK 했잖냐’ 한다. 그러면 ‘아니, 부장님이 부정적인데 내가 어떻게 좋다고 하냐, 못하겠다’ 이런 식이다. 인사부장이 No 하면 밑에서 누군가 No를 한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을 한다.

완전히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다. 올렸다가 떨어지고, 또 올렸다고 또 떨어지고. 상무가 No 하면 인사부장이 다시 No 한다. 그래도 전무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해서 설득이 된다. 대개는 ‘너무 빠르다, 우리 기업 독자적으로 하는 건 어렵겠다’고 포기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끝없이 했다, 10개월 동안.

전무까지 다 설득을 하고 나서 행장은 노조 위원장이 파트너십이니까 위원장에게 ‘전무까지 다 끝났으니 행장하고만 협상을 하십시오’ 했더니 위원장이 깜짝 놀라면서 ‘진짜냐’고 하더라. 다른 간부들도 나를 빈정댔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전무까지는 ‘행장이 물어보면 예스라고 하십시오’ 라고 라인에다 얘기했다.

위원장이 행장에게 얘기하니까 행장이 담당 상무나 전무에게 물었다. ‘우리가 여직원 공채도 최초로 먼저 했으니, 우리가 좀 빨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얘기를 해서 최초로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한다. 6개월짜리로.

당시 신문에 국내 기업 최초로 상업은행 육아휴직 도입 기사가 크게 났다. 그 당시로는 너무 센세이셔널 하잖아. 10개월을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위원장도 ‘이 놈이 일을 하나 잡으면 끝없이 해내는구나’ 그러더라. 유럽의 여성 노동자들에 관련된 제도를 설득을 하려면 내가 뭘 알아야 하니까, 유럽의 각종 제도들도 10개월 동안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여성육아휴직 제도를 만든다.

2005년인가 2006년인가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데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장하진 여성부 장관이 육아휴직 제도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더라. 만 명이 넘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니 그게 내가 20년 전에 만든 건데 이때까지 만 명밖에 사용 안 했다는 얘긴가’ 했다.

85년도에 6개월 짜리로 도입을 하니까, 86년에 다른 은행이 따라오면서 1년 짜리로 바뀐다. 그리고 대기업들이 87년에 도입을 한다. 은행이 도입을 하면 빨리 전파가 된다. 제도화가 된 게 88, 89년인데 제도화된 지 16, 17년 만에 만 명이 넘는다.

회의 끝나고 장하진 장관한테 ‘여성 육아휴직 제도 도입의 백그라운드를 압니까’ 물었다. ‘제가 최초로 도입을 하는데 10개월 동안 생땀 흘렸습니다’ 했다. 그 때 시절에 어려운 거였데, 그래도 도입했다. 그 때 도입을 해도 상사들 눈치 봐서 못 쓰는 상황이었다. 제도를 만들어놔도 못 쓰는 분위기인데 그 제도를 만드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나.

감옥에서 주5일제 도입 결심

사회적 파장으로 치자면 주5일 근무제 도입도 엄청난 이슈거리였다. 금융노조 위원장 시절 금융노조에서 최초로 도입하게 된 배경은 뭐였나.

금융총파업으로 2001년도를 감옥에서 1년 있었다. 거기서 신문을 보는데 한국노총이 주5일 부분을 협상하다가, 노사정위원회에서 깨지고 이런 기사를 봤다. 아니, 이걸 왜 휴가일수 조정해서 깨지고 그래. 휴가일수라는 것은 다소 양보해도 전체적으로 토요일이 휴가일수로 따지면 0.5 아닌가. 반공일이니까. 근데 실제로 일반 직장에서 토요일에 출근을 하면 하루를 가는 거다. 거의 1로 봐야 한다. 그러면 52일을 더 쉬는데 다른 휴가일수 좀 양보하더라도 큰 거를 받고 나중에 휴가일수는 다시 협상을 통해서 복구하면 되는 거다. 왜 이걸 못할까.

그 때 육아휴직 제도를 생각했다. 이게 제도적으로, 법제화로 만들거나, 아니면 빠르게 확산시키려면 은행이 먼저 도입해야 한다. 은행이 먼저 도입하면 일반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토요일에 쉰다. 은행과의 자금결제가 있기 때문에 본부 부서, 재무 파트가 출근을 해야 한다. 재무 파트가 출근하면 인사 파트, 비서 파트, 본부가 하면 각 지점도 일해야 하고.

그래서 은행이 쉬지 않으면 각 기업들이 토요일에 쉴 수가 없다. 은행에서 먼저 주5일제 도입해서 은행을 먼저 스톱 시켜야 한다. 감옥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한국노총이 못해낸다면 나가서 내가 이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는데, 석방되는 날 영등포 교도소 앞 도로 석방환영 집회에 500명 정도가 모였다. 거기서 내가 핸드마이크 가지고 감옥에서 생각했던 것 중에 2002년도 첫 사업으로 금융권의 주5일제를 도입하겠다, 석방되는 날 공표를 했다. 그리고 2002년 1월에 재선이 되고 나서 바로 주5일제로 집중을 했다.

그런데 임단협 협상은 봄에 내놓지만 가을에 협상기간 만료 아닌가. 그러니까 임단협 협상에 포함해서 하면 어렵다. 시기적으로 늦춰진다. 그래서 나는 월드컵이라는 걸 타이밍으로 잡자고 생각했다. 주5일만 갖고 물고 늘어지고 단일 안건 협상을 시작한다. 주5일이 안 되면 5월 30일, 월드컵 개막식날 3차 총파업을 걸고 배수의 진을 치고 협상을 한다.

그 때 내가 벌써 두 번의 총파업으로 감옥 갔다 나온 지 불과 한두 달밖에 안 된 상태에서 또 파업을 하겠다고 하고 주5일 협상을 하자고 하니까 은행권도 피할 수가 없는 거야. 협상을 계속 해봐도 은행장들은 주5일 문제는 국가대사인데 자기들 선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관치금융 하에서는 은행장들이 그런 끗발이 없다. 그러니까 협상이 진전이 안 된다.

그런데 총파업을 월드컵에 맞춰 걸고 하니까 위에서도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자기들 문제로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노사정위원회가 나선다. 당시 장열철 노사정위원장과 이근영 금융위원장이었다. 이근영 금융위원장과 장영철 노사정위원장이 협상 파트너로 나선다. 노사정위원회 하고 협상을 하는데, 노사정위원회도 마찬가지로 주5일을 자기 선에서 해낼 수 있는 책임자가 아니다.

결국은 청와대로 공이 넘어갔다. 형식은 금융위원장, 은행장들과 협상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 의사결정권자는 청와대다. 청와대 파트너는 박지원 특보였다. 처음 박지원 특보하고 얘기할 때 박지원 특보 얘기는 ‘은행이 주5일 하는 거 맞지만, 늦게 하자. 은행이 전 산업에서 최초로 할 수는 없다. 은행이 하면 다 쉬어야 하는 거기 때문에 다른 타 산업이 먼저 하고 은행은 나중에. 은행은 지원산업 아니냐. 어떻게 지원산업이 먼저 쉬겠다고 할 수 있느냐. 안 된다’ 이래서 불발됐다. 나는 끊임없이 요구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다가 파업일자가 일주일 남았다.

월드컵 개막일에 총파업 배수진

5월 23일에 박지원 특보가 또 보자고 해서 갔더니 ‘6개월만 연기합시다. 6개월 뒤에 은행권을 시행하겠다’고 하더라. 난 ‘7월 1일부터 바로 시행 하자’고 했고, 박 특보는 ‘은행권이 주5일을 하려면 타 산업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 파장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예고기간이 6개월이 필요하다, 그리고 은행도 자체적으로 준비하는데 6개월은 필요하다’ 이 논리로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합시다’ 이렇게 나왔다.

나는 ‘12월이 대선인데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자는 얘기는 흐지부지 넘어가고 만다. 괜히 투쟁만 더 커질 뿐이니까 7월 1일부터 하자’고 받았다. ‘기업들이 준비가 안 돼 있고 은행이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에 줄줄이 다 부도가 난다’고 하더라. ‘기업자금들도 전부 맞춰보고 해야 된다’는 거다. ‘지금은 인터넷 뱅킹이 되기 때문에 은행이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고 안 열고가 중요하지 않다. 자금계획은 평일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6개월을 더 유예시킬 수 없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게 명분이 없고, 두 번째는 대선이 끼어 있는데 이 정권 소관이 아닌데 안 된다, 그냥 가자’고 했다.

‘나는 나대로 파업할테니까’ 하고 일어났다. 그러니까 다시 앉으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합시다, 해 봅시다, 대신 책임지시오’ 이러더라고. 그래서 ‘책임질게. 만약 기업들이 연쇄부도가 일어나고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질게.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이렇게 하고 거기서 동의를 받고 나와서 이근영 위원장한테 ‘청와대에서 OK 했다. 전화 안 받았냐’고 했더니 ‘안 받았고’고 시치미를 떼더라. 근데 안 받기는. 벌써 전화가 간 거고. 그래서 이근영 위원장이 행장들에게 ‘청와대가 OK 했으니 가자’ 그래서 5월 23일 오후에 사인을 한다.

그렇게 해서 금융이 2002년 7월 1일, 이렇게 되니까 2004년 7월 1일 법제화된다. 7월 1일인 이유는 금융이 2002년 7월 1일 했기 때문에 2년 뒤에 법제화가 되고,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7월 1일 이렇게 8년 동안 전산업으로 법제화된다.

그런데 은행원들이 갑자기 토요일, 일요일 매주 연휴를 맞으니까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하더라. 행복이 오긴 왔는데 누릴 줄을 몰라. 그래서 주말을 가족과 함께 이렇게 보내자, 각 노조들에게 이것도 금융에서 먼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해서 각 지부별로 여러 가지 주말 프로그램들을 안내 하고 이런 식으로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감이 속된 표현으로 미치는 거야. 너무 기분이 좋아서, 너무 행복하고.

그러니까 법제화를 앞당기지 않을 수 없는 거지. 정부도 2년 뒤에 바로 법제화를 했다. 그 때 휴가 일수를 조금 조정해서 양보를 했는데, 2004년에 휴가일수 다 원상회복 했다. 그러니까 휴가일수 가지고 한국노총이 협상에서 욕 먹을까봐 머뭇거렸는데 훨씬 큰 게 있잖아. 엄청나게 큰 행복 아니냐. 그것도 연휴로 계속 가는 거야. 징검다리 휴일하고는 또 다르다. 토, 일 연속휴식이 노동자나 노동자 가족,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kr

산별 하는 이유는 돈과 일, 그리고 사람

또다른 최초의 기록을 보자면 한국노총 최초의 산별노조 건설을 이끌었다.

산별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 건 1998년 초선 금융노련 위원장 때였다. 우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힘 아닌가. 모든 것이 힘의 논리인데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하면 산별이 눈에 보이는 거다. 그 때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가 산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건의료노조와 계속 접촉을 하고 99년 1년 동안 산별준비를 했다. 당시 보건의료노조 간부를 초빙해 금융노조 지부 위원장들 모아 놓고 산별 교육을 시켰다. 산별의 필요성을 1년 동안 준비를 하는데 항상 어려움은 내부에 있는 거다. 지부 입장에서는 산별노조는 뭔가 기득권을 뺏긴다고 보는 거다.

나는 산별을 하는 이유는 돈과 일과 사람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각 지부 정책간부가 한두 명씩이라면 금융노련으로 보면 각 지부를 다 합치면 40~50명의 정책간부가 있는 거다. 그걸 대폭 줄이자. 지부는 정책 간부가 없어도 된다. 본조에는 10명 정도의 정책간부를 해서 집중적으로, 모든 정책을 여기서 다 만들어내고, 지부의 정책도 의뢰를 해라. 여기서 프로젝트를 다 맡아서 하니까 전문성도 강화되고 집중력도 높아지고.

사람과 일이 집중이 돼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돈이다. 재원은 갑자기 지부 돈을 여기에 넣으라고 하면 안 되니까 그 때 당시 정액제로 연 예산 5억 정도 됐는데 정률로 바꾸자. 시작할 때는 지부 예산의 3% 정도다 하면, 그 다음해에 몇 퍼센트로 늘리고 해서 5년 정도 단계별로 해서 각 지부 예산의 25%가 목표였다. 25%는 산별로 올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계속 왔는데 그게 정말 어렵더라. 여성 육아휴직 때처럼 한 사람 한사람 씩 다 동의를 얻어냈다. 시중은행협의회, 국책은행협의회, 무슨 협의회, 이 협의회별로 워크숍을 갔다. 바닷가로 가자, 거기서 좋은 분위기에서 ‘우리 산별 결의를 좀 하자’ 겨우 결의를 만들어놓고 나면 또 몇 개가 빠지고. 그렇게 했는데 결국은 서너 군데가 끝까지 반대를 하더라. 이걸 끝까지 해서 완전한 산별로 가려면 너무 시간이 걸리고, 나라고 하는 사람이 임기가 있는데 떠나고 나면 또 무산된다. 그러니까 서너 개 반대하는 데를 빼고 산별로 가자, 이렇게 동의를 얻어내서 2000년 3월 3일자로 산별을 발족시킨다. 그래서 연맹과 산별이 병립을 한다. 완성되는 시점이 2년 뒤인가 이렇게 된다.

민주노총이 직선제라든가 새로운 제도를 하는데 완벽하게 가려고 하더라. 우선은 몇몇 문제가 있더라도 가는 게 중요한 거다. 산별도 서너 개 회원조합이 그렇더라도 가놓고 나면 나중에 완성이 된다.

쉽게 안 움직였다. 그래도 총파업 한다. 산별이니까!

2000년 7월, 금융산업 최초의 총파업이 있었다. 그 과정은 어땠나.

산별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총파업을 한번 해야겠다는 거였다. 그 전에도 말로 총파업 하겠다는 선배들은 꽤 많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총파업은 불가능하다. 필수공익사업장이기 때문에. 이 딱지 때문에 누구도 안 하려고 들어. 총파업 하자고 하면 가다가 총파업 안 한다, 막판에 접는다는 것을 이미 다 알아. 그러니 무슨 총파업이 되겠나. 더군다나 연맹체에서.

처음부터 겁 먹고 안 하겠다고 그러는 사람들도 많은데. 산별 건설 이후 조직력 강화 차원에서 총파업을 한 번 내질러 보자, 생각했다. 2000년 3월에 산별 전환 해놓고 구조조정 당하고 그러는데 투쟁마저도 제대로 한 번 못 해 봤으니 총파업을 하자.

그 대신 내가 개인적 희생을 치르겠다고 했다. 대개 총파업이나 총투쟁은 집행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 민심들이 막 그렇게 됐을 때 집행부가 따라가는 것인데 나는 내가 끌고 가려고 했다. ‘구조조정도 다 끝났는데 무슨 총파업이냐. 이미 당할 거 다 당하고’ 이런 분위기였다.

당시 IMF가 세계적으로 만행이 너무 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한 처방은 문제였다. 우리의 위기가 펀드 멘탈, 금융의 기본 문제, 구조적 문제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고 단지 유동성 문제, 달러가 잠시 부족했을 뿐이다. 구조적으로 재정이 불건전하다든가 이런 게 아니다. 그리스와 다르다. 그런데 처방은 똑같이 간다. 고금리 정책으로 가서 기업 연쇄 도산 시키고 그 판에 초국적 국제 투기 자본들이 막 들어와서 엄청나게 뜯어먹는 거지. 이런 판을 만드는 거야.

IMF라는 것이 초국적 자본의 앞잡이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구조조정 당했다. 건전한 회사들도 일시적으로 고금리 상태가 되면 유동성 문제가 생기고 넘어가. 그런 거 다 잡아먹는 거야. 초국적 자본들 들어와서. 앉아서 돈 버는 거고 땅 짚고 헤엄치기의 판을 만드는 게 IMF의 처방이었다. 그러니까 IMF와 싸워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는 그 명분 가지고는 투쟁은 안 된다. 국익 차원이라고 하면서. IMF 요구라면 무조건 다 따라갔다.

그러던 중 6월 6일 현충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충사를 하는데 딱 한 줄이 내 귀에 꽂혔다. ‘2차 금융 구조조정을 해야 된다’였다. 6월 7일에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IMF나 정부가 2차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총파업 하자’ 쉽게 안 움직였다. 그런데 이건 산별이다. 하겠다고 했다.

부실은행들 2차 구조조정 바로 들어가니까 이른바 부실은행은 주동력, 우량은행은 부동력으로 삼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우량은행, 부실은행) 분류 기준을 IMF가 만든 건데 말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의 의미는 산업자금을 조성해서 기업들과 거래하는 도매은행이다. 그런데 이른바 우량은행은 사실상 소매금융만 하는 곳들이었다. 기업 거래가 없던 데니까 부실이 없지. 일반 서민 상대로 해서 부실이 있나. 악착 같이 다 받아내지.

총파업 해도 위원장만 감옥 갔다 오면 된다

기업 거래하는 데가 고금리 정책을 쓰니까 한보고 뭐고 막 쓰러지는 거 아냐. 쓰러져서 은행 빚을 못 갚으니까 은행이 부실로 가고. IMF의 처방이 그런 위기 상황으로 완전히 경제를 파탄 낸 거다. 고금리 정책으로 금리가 20몇 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은행의 정규금리가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래놓고 자기네들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는 건 지금도 인정을 못하겠다. 10년 뒤인 2010년 칸 IMF 총재가 한국의 IMF 처방은 잘못됐다고 인정했다.

그 때 당시 정부는 IMF의 꼭두각시고, 오히려 정부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쁜 의미로 보면 매국노라고 저게. 그리고 경제나 금융 부문이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언론이 오히려 정부 편 들고, IMF 편 들고, 그 동안 방만했던 경영 어쩌고 하면서 부채질 하는 거야, 그런 상황이니 우리 조합원들한테 설득이 되겠나.

그 때 당시 캉드쉬 IMF 총재 왔을 때도 만났다. ‘왜 우리가 고금리 정책으로 가야 돼. 왜 한꺼번에 시장개방 해서 투기자본들이 와서 주워먹어야 돼, 왜 기업들이 이렇게 일시적인 도산들이 이루어져야 해’ 막 난리를 쳤다. IMF가 위기 상황을 계속 조성을 해야 투기자본들이 들어와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거다.

그 때 보라고. 뉴브릿지 자본이라든가 칼라일, 론스타 다 투기자본이다. 투기자본의 특성은 누가 오너인지 모른다. 그리고 기술이 없는 돈들이다. 그래서 돈을 먹으러 들어왔지 선진 기술을 남겨 놓지 않는다. 예를 들면 HSBC라든가 금융자본, 투자자본들은 와서 선진 기술을 남겨 놓는다. 그래서 투기자본과 투자자본은 명확하게 구분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외국 자본이라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잖아. 일관되게 계속 주장했던 것은 투기자본에 반대한다는 거였다.

어쨌든 ‘아 이제 또 당하는 모양이다’ 하는 분위기가 됐어. IMF와의 투쟁에서 한판 큰 판을 벌이지 않으면 IMF가 만만하게 보고 계속 가는 거다. 이걸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 금융노조 밖에 없다. 투쟁을 보여줘야 된다.

그러면서 ‘7월 1일 가자. 20일 뒤에 총파업 가자’고 하니 회원조합 위원장들도 황당하지. ‘그건 너무 빠릅니다’ 하더라고. ‘그럼 열흘만 늦추자’ 그래서 7.12 총파업이 되는 거다. 일단은 총파업이라는 걸 해야 돼. IMF나 정부관료나 세계적으로나 분명히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서, 더 이상의 이런 무리하고 잘못된 정책요구를 막기 위해서 누군가는 강도 높은 투쟁을 해야 되는 거다.

내부적으로는 구조조정을 더 이상 당하지 않는, 또 총파업을 해도 되는 구나, 필수공익사업장이라고 겁 먹고 벌벌 떨었는데 해도 되는구나 하는 걸 보여줘야 되는 거야. 그래서 7.12 총파업을 그냥 들어가 버린 거다. 의도적으로 무조건 총파업이라는, 다른 투쟁은 생각도 할 필요 없고 총파업이라는 강도 높은 투쟁을 꼭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7.12 총파업 선언한 후에 최초이자 마지막인 노정 협상을 했다. 은행장들이 총파업 막으려고 해도 협상 당사자가 될 수가 없다. 이헌재 부총리가 7월 11일에 일본에서 재무상 회의가 있었는데 거기를 가겠다더라. 그러니까 이용근 금융위원장 하고 협상을 해라 하더라고. 그래서 가라고 그랬다. 대신 이헌재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까발릴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기를 취소하고 협상장에 나왔다.

이헌재 부총리, 이용근 금융위원장이 나서고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과 내가 파트너로 나섰다. 거기에서 많은 양보를 받아낸다, 합의서대로만 간다면. 그게 나중에 안 지켜져서 그렇지. 모든 구조조정? 금융노조 합의 없이 못 하게 되어 있다. 합의서에. 협의가 아니라 합의다. 완벽한 승리를 해낸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내가 감옥 갔다가 두 달 만에 집행유예로 나와 버리잖아. 그러니까 우리 지부 위원장들이 ‘아, 파업해도 되는구나. 필수공익 사업장 그렇게 겁낼 필요 없구나’ 이렇게 된다. 이런 분위기가 되니까 국민, 주택 합병 얘기가 나왔을 때 다시 총파업에 나설 수 있었다.

2차 총파업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앞선 총파업의 경험으로 위원장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살다 나오니까 아무 문제 없더라는 거야. ‘총파업 합시다’ 당연히 이렇게 나오는 거지. 이제는 면역력이 생긴 거야. 당연히 총파업 해야지. 두 개 조직 중심으로 총파업을 조직했다.

은행 합병 제대로 하려고 했으면 도소매 은행 묶었어야

그 때 말이에요. 제대로 된다고 하면 외환은행이나 상업-한일 이렇게 엮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필요해서 되려고 하면 부실은행이지만 한일-주택, 상업-국민 이런 식으로 도소매 은행끼리 딱딱 연결을 해야지만 맞는 방법이다. 그런데 되도 않게 부실을 억지로 만들어야 하니까 BIS 비율을 무리하게 적용을 해버리는 거다.

BIS 적용을 해서 부실은행을 구분 하니까 엉뚱하게 도매은행은 신한은행 하나 빼고 다 부실은행, 소매은행들은 다 우량은행, 이렇게 이상하게 나와 버린 거다. 일산 파업이 그래서 갔다. 총파업에 들어갔고, 나는 감옥 가서 1년 있다가 나오면서 끝없이 대비를 하면서 이헌재가 더 이상 무리한 요구는 못했다.

(이 이야기 와중에 당시 각 은행장 및 정부 관계자들이 실명으로 등장했고, 국민-주택은행 합병 과정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에 밝힌대로 이 이야기들은 굳이 이 인터뷰에서 인용하지 않는다.)

어쨌든 두 번의 투쟁을 거치고 나와서 노사정위원회에 ‘자, 필수공익 사업장은 국가의 위기가 초래될 수 있는 사업장인데 두 번의 감옥살이, 개인적 희생만 치러졌지, 국가적 희생이, 국가적 손실이 있었나? 필수자 떼자’고 했다. 그래서 필수자 떼고 공익사업장이 된 거고. 그 후에는 많은 은행들이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 총파업 할 수 있게 됐다. 악법을 고치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통해서 이게 악법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총파업 투쟁 과정에 대한 평가로 한국노총 최초로 전태일 노동자상을 수상을 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전태일 동지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그 시절, 깜깜한 시절에 자기 몸을 불태워 가면서 현실을 알린 진정한 영웅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순직 소방관, 경찰만 영웅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 분이야 말로 위인이고 영웅이라고 나와야 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은 어떤가. 한국노총이 ‘전태일 열사’ 하면 아니라잖아. 민주노총 선배로 취급한다. 그리고 전태일 정신을 계승해서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자고 한다. 전태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과 박애와 자기희생이었다. 전태일 노동자상을 준다고 할 때 한국노총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해서 몇 달 끌었다.

LG카드 회생, 정부의 채권 회수 유보 공문을 받아내다

그동안 노사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분명 노사 공동의 이익 지점이 존재할 것이고, 여기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기업의 위원장이라고 하면 기업 노사 간의 공동의 이익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근참법에 의해서 찾을 수도 있고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금융노조 위원장이었으니까 금융산업 부분에서 역할을 했다. 당시 LG카드 같은 경우도 IMF 때문에 일시적으로 어려워진 거였다. 그런데 이거를 처분해 버리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넘어가버린, 없어진 금융기관들이 부지기수다.

LG카드는 그 때 회원들이 천만 명이었다. 만약 LG카드 넘어가면 또다시 제2의 위기가 온다, 이건 회생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채권단 회의의 핵심이 산업은행이었다. 채권이 제일 많은 은행은 우리은행이고 주거래은행이었지만, 정부은행이기 때문에 산업은행 총재가 채권단 회의를 주도했다. 전체 채권의 5% 밖에 안 되는 산업은행이지만 그 5%를 정부가 지원을 해줘야 산업은행은 회생에 동의를 할 수 있다.

재경부에 쫓아가서 ‘LG카드 살려야 된다. 청산 시키면 제2의 금융위기다. 회원이 천만 명인데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커질 건지 불을 보듯 뻔한 거 아니냐. 다른 은행들은 내가 가서 설득할테니까 산업은행에 5% 채권 유보시키겠다는 거를 공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관치금융이라는 게 다 구두나 유선으로 하고 나서 잘못되면 자기 책임을 안 진다.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는 거지. 약자인 은행들은 증거도 없이 정부의 구두지시가 있어서 했다고 말을 못 한다. 그러니까 유선으로 하지 말고 서면으로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재무부 이래 재경부까지 역사에서 최초로 서면으로 채권 회수 유보 내용을 보낸다.

파산시키고 나면 5% 다 받지도 못하는데 제대로 정상화시키면 5% 다 받는 거거든. 그리고 채권단 회의에 쳐들어 갔다. 가서 ‘자 LG카드 채권단 여러분들, 채권 회수하려면 LG카드 정상화 해야 된다. LG카드는 정상화 할 수 있는 회사다. 관치금융이기 때문에 정부 뜻대로 쫓아가는데 정부 뜻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산업은행 총재에게 서면으로 채권 회수 유보 공문 받았는지 물었다. 채권 회수가 아니라 유보 시키고 법정관리로 들어가서 살리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LG카드가 살아난 거다. LG카드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서로 인수하려고 난리를 쳤다. 지금 신한은행 전체 이익 중 30%를 그 때 LG카드, 지금은 신한카드에서 내고 있다.

그러니까 그 때 정부가 하는 짓이나 IMF가 하는 짓이 그 따위 짓이었다고. 외환은행도 그 때 살렸으면 문제 없었다. 도매은행과 소매은행을 묶었으면 금융기관들, 살아날 수 있는 은행들이었다. 몇몇 은행은 시장논리에 의해 정리가 되겠지만 LG카드 같은 것은 당연히 살려야 되고, 살릴 수 있는 거였다.

정부에 돈 뜯기고 말도 못 하는 은행들

다른 얘기 하나 해보자. 노태우 정권 때 러시아에 차관으로 30억불을 주는데 그 중 16억 불이 은행 돈이었다. 1억불, 2억불, 3억불까지 8개 은행에서 16억불을 걷어다가 차관을 주고 나중에 차관 회수가 어려우니까 김영삼 정권 때 군수물자, 이런 실물로 받는다는 거였다. 실물로 받아서 은행 줄 수 없잖아.

정부가 실물로 받아서 처분하면 정부 주머니로 들어가는데, 당연히 정부가 은행돈 갚아야 한다. 그런데 은행장이 한마디 말도 못한다. 관치금융이 그렇게 무서운 거다. 정부한테 돈 강탈 당하고 부실은행으로 전락했다. 한보에 돈 주고 싶어서 준 은행들이 어디 있나.

정부가 그러니까, 5개 시중은행 건전도 순위가 어떻게 되느냐. A부터 E 은행까지가 1위부터 5위다. 그런데 1위 은행이 그 다음해에는 꼴지 은행으로 간다. 2위 은행이 1위 은행으로, 3위 은행이 2위 은행으로 한 단계씩 다 올라간다. 그러면 그 다음해에는 1위 은행이었던 곳이 또 꼴찌로 간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 도는 게 불변의 법칙이었다.

관치 금융을 가장 적나라하게 입증해주는 거다. 왜냐, 1위 은행한테 부실대출 해주라고 관치 금융 지시가 내려가는 거다. 그런데 그 기업이 넘어가면 1위 은행이 그 기업을 도산시켜서 회수를 못 하니까 그 기업을 살린다. 그리고 은행은 전부 상각 처리한다. 그러면 갑자기 꼴찌 은행으로 뚝 떨어진다.

우리나라 경제가 정책금융에 의해서 쭉 커왔는데, 정부 마음대로니까 은행들 예금금리 좀 높여줘서 수익 많이 내게 해준다. 결국 누구 돈이냐. 국민 세금 가지고 기업들 다 살려주고 정치자금 받고, 다 물고 물리는 그런 관치금융이다.

그러니까 공동의 이익이라고 하면 은행 경영진들, 또 우리 조합원들, 공동의 이익 아닌가? 이 공동의 이익을 찾는 점이 바로 국가 사회의 이익이 되는 거다. 투명한 사회가 되는 거고. 노동운동이 그런 데 초점을 맞춰야 된다.

빛도 못 보고 사라진 양대노총 통추위 구성

노동의 미래와 관련해서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제기 했다. 우선 노동계 통합을 통해 1국1노총 체제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치세력화도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노사공동기구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강조를 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노동계 통합, 정치세력화, 노사공동기구가 다 연결된 거다. 이걸 하려고 하면 저게 안 되고 그랬다. 그러니까 역순으로 가자고 했다. 노조들이 힘을 갖고 사회적으로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주체적인 게 되면 그 때부터는 노동조합이 제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그걸 찾아주는 역순으로 가보자.

이제부터 얘기하는 게 딱 3가지다. 하나는 통합, 하나는 정치세력화, 하나는 노사공동기구, 이렇게 3개의 축을 이렇게 저렇게 다 해봐도 실패하고, 실패하고 다 실패했다.

노동계 통합부터 해보자고 했는데 노동계 통합의 핵심은 노동계 힘을 강화시키자는 얘기다. 다른 건 없다. 노동계 통합을 하면 200만 표가 보인다. 노동계가 통합진보당이다, 민주당이다, 새누리당이다 지금은 막 분산돼 있다. 여기서 통합한 후에 ‘자, 우리는 어느 한 정당(을 지지한다)’라고 한다면 실천할 수 있든 선언적 의미가 됐든, 그걸 하는 순간 정치권에서는 200만 표가 보이는 거다. 그러면 당연히 노동계 힘이 세지지.

통합이라는 것은 그런 정치적 힘이 세지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한다고 하면, 지금 비정규직 강조하지만 여러 조직들이 중구난방이다. 통합노총이 ‘앞으로 향후 5년간은 비정규직이다, 이게 일순위다’ 이렇게 간다고 하면 통합의 효과가 그런 데서 나오는 거다.

통합은 결국 노동조합의 힘을 기르려고 하는 건데 통합이 쉽지 않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통합이 불가능할 것 같다. 내가 한국노총 위원장 되고 나서 통합 얘기를 했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하고 우선 통합추진위만 만들자고 그랬다. 통합이 되는 건 10년 뒤가 될지 30년 뒤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시작을 하자, 통합추진위만 구성을 하자. 그러면 방향성을 찾게 된다. 우리는 통합할 조직이라는.

그런데 결국 이수호 위원장은 대의원대회도 한 번 못 열어보고 계속 무산되고 내부에서 반발도 많다보니까 통합 얘기 꺼내보지도 못하고 분위기가 안 됐다. 그래가지고 무산되고 넘어간 거다.

정치방침 결정, 2007년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자, 그럼 정치세력화로 가보자. 정치세력화도 이유는 하나다. 노동조합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건데 정치조직과 연합해서 거기 기대서 힘을 강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 때 금융노조 위원장으로 한 번 해봤는데 들어가서 이것 저것 해봐도 안 되더라. 녹색사민당도 그랬다.

그래서 2017년까지 3단계의 정치세력화 작업을 해보자고 했다. 그걸 2006년도에 시작을 했다. 조합원 총투표 방식으로 결정을 해야겠다, 왜냐하면 지도부가 어느 정권이다 정당이다 맨날 해봤자 밑바닥의 동의를 얻어내지도 못하고 공감도 없는 거다. 조합원 총투표에 의해서 결론 내려진다면 누구도 다 인정을 해야지.
그런데 조합원 총투표가 각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이런 경험, 저런 경험들을 다 겪어보고 장기간 후에 총투표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2007년 1년 동안을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모바일 전화번호 52만 명을 수집했다. 그리고 총투표에 들어가서 ‘자, 2007년도 (투표에서) 어떤 상황이 나와도 상관 없고, 2012년에 어떤 상황이 나와도 상관없다. 이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습을 했으면 2017년도에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정치백서에 나오는 방법이고 수순이다.

그런데 우리 내부가 일단 공감이 안 되더라. 2007년도 결과는 대체적으로 봐도 야당 후보의 경쟁력이 너무 떨어지니까 이명박으로 나올 것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방침의 핵심은 2007년 경험과 결과를 바탕으로 2012년에 다시 투표하고, 또 그 경험을 갖고 2017년에 투표해서 영구적인 정치방침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결과만으로 끝내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정치백서를 만든 거다. 근거를 남겨 놓은 거다. 그런데 아무도 백서를 안 보더라.

장기 플랜이라는 게 이런 어려움이 있구나 느꼈다. 그러던 차에 나보고 다시 컴백하라고 하니까, 어쩌면 이게 하나님을 뜻이다, 나를 복귀시키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은행에 임원으로 복귀해서) 1년에 3억 4천씩 받았다. 연봉 1억 7천에, 퇴직연금 담당이었는데 실적이 전 금융기관 1등이라 성과급 받아서 그 정도 연봉을 받았다. 3년을 그렇게 지냈는데, 다시 노동운동 한다고 하면 정말 깨끗하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을 시점에 다시 돌아오라? 정말 깨끗하게 승부를 하면서 뭔가 해보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거다.

사회개혁적 조합주의의 근간이 뭐냐, 우리 한국 사회를 개혁시키는 주체가 노동조합이 되자는 건데 노총만 가지고 어떻게 되겠나. 정치세력화는 어려워, 범노동계 통합도 어려워, 그럼 역순으로 가 보자. 노동계가 지금 지리멸렬하고 투쟁이 안 된다. 총파업이라는 거는 노동계가 자기의 단결의 힘을 통해서 뭔가 얻어 내려고 하는 건데 오히려 면역력만 생기고 지금은 참여율이 5~6%에 그친다.

시스템으로 힘을 키우는 방법, 노사공동기구

힘이 없어서 이런 저런 것도 안 되니까 그러면 역순으로 노동계 힘을 키우자는 거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힘을 키우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계속 조직률이 떨어지고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물리적 힘의 강화가 어렵다면 시스템적으로 힘을 강화시켜보자.

시스템적으로 힘을 키우는데, 노동계만 그렇게 한다면 어떤 사회에서 누가 만들어 주겠나. 시스템이라는 것은 정치권이, 법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치권에 가서 아무리 떠들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어려워서인지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인지 단시간에 설득해 내기도 어렵다.

노사가 공동의 사업을 하자, 일거리를 찾자는 방향을 잡았다. 그럼 노사가 사회적으로 공감을 받는, 일거리를 찾는다면 어떤 일거리겠나. 우리 노사가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게 고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면 우리 국민들 일자리를 다 파악할 수 있다.

덴마크의 실업수당을 노총이 주는데, 이중지급을 막기 위해서다. 조직률이 90%이니 노총이 제일 잘 안다. 일자리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성장산업, 이것에 필요한 직업 훈련을 집중적으로 해서 숙련된 노동자들을 많이 만들자, 이런 것들을 정부가 탁상에서 하는 게 아니라 예측가능하게 현 상황을 토대로 해서 갈 수 있는 게 노사다.

노동교육, 사적 분쟁조정까지 일을 하자는 건데 그러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노총 간부들? 경총 간부들? 별도의 사업기구를 만들어서 필요한 일꾼을 모집해야 한다. 학자 출신도 있고 물론 노총 출신도, 경총 출신도 저기서 일하고 싶다면 하는 거다.

일과 사람이 됐으면 돈이 필요하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적어도 1조원이 필요한데 처음 시작 할 때 ‘돈을 줘 봤더니 잘 하네? 괜찮네, 키워야 돼.’ 이 소리 들어보려고 2천억 원만 달라고 그랬다. 그랬더니 정부, 노동부 관료들이 500억씩 공동 출자하자고 하더라. 노동부 500억, 경총 500억, 노총 500억. 그래서 노총은 현물로 내겠다고 했다. 여주의 노총 중앙교육원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도 여기저기 빠져서 없애 버리고 노사발전재단이라는 참 황당한 기구를 만들었다.

돈이 어디서 나오냐고 하는데 연간 7조원의 고용보험은 누구 돈이냐, 그건 기업이 절반, 노동자가 절반 대는 거다. 그러면 거기에서 1조만 내 놔라, 이걸 정치권이 법으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거지. 노사 간의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면 사회적 대화가 매일 이뤄진다. 노총과 경총은 사회적 대화를 하고, 사업 실천하는 일꾼들은 그 기구에서 만드는 거다.

사회적 대화에 의해서 우리 노사의 방향성, 우리 미래사회의 개혁과 변화, 복지 등을 다룰 수 있다. 사회적 대화가 됐으면 이걸 정치권에 던지고, 그러면 정치권의 부담이 줄어든다. 노사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복지모델의 형식을 합의해서 정치권에 던지면 정치권에서 그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회적 이슈가 있는 것들을 노사 간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가는 거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용보험요율을 조금 낮추고, 제2의 고용보험을 만들어서 이 기구, 노사공동기구에 주는 방법이 있다. 아니면 현재의 고용보험 기금운영위원회에 노사대표를 참여 시켜서 여기에서 기구로 출연을 하거나 지원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통합과 정치세력화와 뭐가 달라지는가, 또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가. 노조의 힘이 강해진다 .그리고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바뀐다. 일자리 만드는 노조, 직업훈련 하는 노조, 사회적 대화를 하는 노조, 사회적으로 노조의 역할이 커지면 노조가 힘을 갖게 된다,

정치세력화를 해서 힘을 가지려고 했던 거고, 통합도 힘을 가지려고 했던 건데 역순의 시스템에 의해서 노조가 힘을 가지게 되면 민주노총도 여기 들어올 수 있다. 그러면 통합도 쉬워지고 정치세력화도 쉬워진다.
우선순위는 통합으로 가야 하고, 정치세력화, 그리고 나서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통합도 안 돼, 정치세력화도 안 돼, 그러니까 역순으로 가보자고 한 거다.

노동운동가 이용득이고 싶다

책을 보면 정치인이냐 노동자냐 묻는다면 노동자라고 대답했다. 일부에서는 노사협조주의자라는 비판을 하지만 나는 사회개혁주의자라고도 했다. 이용득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해 정치권에 들어와 있는 거다. 당연히 나는 노동운동가다. 정치라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정치를 할 이유가 없다. 내 일을 위해서 정치권에 몸도 담아 보고, 정치세력화도 해 보고, 수단으로 그런 것이다.

네덜란드 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두 차례나 수상을 역임한 빔 콕 같은 경우는 사회개혁을 주창하는데 노동운동가가 아닌 정치인이나 행정가로 기억된다. 내가 만약 정치권에서 사회개혁을 성공시킨다면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한 정치인이었던 노동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