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안에 ‘내비게이션’ 있다
뇌 안에 ‘내비게이션’ 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4.11.0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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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노벨생리의학상, 위치 파악 원리 밝혀
육각형 격자로 뇌는 공간을 기억

과학칼럼니스트
한 번 다녀온 장소에 가면 익숙한 느낌이 든다. 자주 다니는 길은 웬만해선 잃어버리지 않는다. 치매 증상을 앓지 않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보니 별로 신기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들에 따르면 우리 뇌 속에 일종의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에 가면 뇌세포가 활성화돼 위치를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존 오키프(John O’Keefe)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UCL) 교수와 노르웨이의 부부 과학자, 마이브리트 모세르(May-Britt Moser) 교수와 에드바르 모세르(Edvard Moser) 교수가 밝힌 뇌 속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대해 소개한다.

뇌에 전극 꽂아 ‘장소세포’ 찾다

“뇌세포 내에서 ‘뇌 안의 GPS’라고 할 수 있는 위치정보 처리 세포들을 발견해 사람들이 위치와 방향을 파악하는 원리를 밝혀낸 세 과학자를 선정했다.” -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위원회

2014년 노벨생리의학상의 영광은 존 오키프 교수와 모세르 교수 부부에게 돌아갔다. 오키프 교수는 뇌에서 특정장소를 인지하는 ‘장소세포(place cell)’를 찾았고, 모세르 교수 부부는 뇌에서 위치 정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세포인 ‘격자세포(grid cell)’을 를 발견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위치를 찾고 방향을 파악하는지 알게 됐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의 연구로 세포 단위에서 더 높은 수준의 인지 기능을 밝힐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오키프 교수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실험쥐를 대상으로 신경생리학 실험을 진행했다. 쥐가 자기 위치를 인지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보는 게 목적이었다. 때마침 개발된 트랜지스터는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는 10월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해 “트랜지스터(반도체)를 쥐의 뇌에 부착하면 쥐의 행동과 뇌 활동을 연결해 관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적중했다”고 밝혔다.

실험에서는 쥐의 뇌신경세포들에 전극을 꽂고 쥐들이 일정한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했다. 이 때 나오는 미세한 전기신호를 측정하면 뇌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오키프 교수의 생각이었다. 그러던 1971년의 어느 날 독특한 현상을 발견하게 됐다. 쥐가 특정한 장소에 갈 때 특정한 신경세포가 활성화되고, 다른 장소에 도착하자 또 다른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는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이 세포들은 뇌 속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 주변에 몰려 있었다.

오키프 교수는 위치를 인식하는 세포들에 ‘장소세포’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세포들이 공간 지도를 그린다는 가설도 제안했다. 이 내용은 ‘브레인 리서치(Brain Reserch)’라는 저널에 발표됐고,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이 후속 연구를 하는 토대가 됐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2005년에는 뇌의 위치인식 시스템을 정교하게 파악한 새로운 발견이 이뤄졌다.

ⓒ 노벨위원회
뇌는 ‘육각형’으로 위치 기억한다

노르웨이과학기술대에서 나란히 연구 중인 모세르 교수 부부는 2005년 해마 바로 옆에 있는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에서 또 다른 위치 인식 세포를 찾아냈다. 두 사람이 격자세포라고 이름 붙인 이들 세포는 쥐가 특정 위치를 지나갈 때마다 활성화됐는데, 특이하게도 활성화되는 패턴이 육각형의 격자구조였다.

두 사람은 간단하고 규칙적인 모양으로 활성화되는 격자세포를 조금 더 연구했다. 그 결과 쥐의 뇌 속에 추상적인 육각형 격자가 그려져 있고, 쥐가 특정 좌표를 통과할 때마다 하나의 뉴런이 활성화된다는 걸 알아냈다. 뇌가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비밀이 한 겹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격자세포는 어둠 속에서도 일정한 패턴으로 활성화됐고, 쥐가 움직이는 속도나 방향과는 무관했다. 장소세포는 벽의 색깔이 바뀌는 것처럼 작은 변화만 있어도 활성화되는 속도가 달라지는데 비해 격자세포의 활성화 속도는 일정했다.

크기가 작고 간격이 좁은 격자를 만드는 세포들은 내후각피질 윗부분에, 반대로 큰 격자를 만드는 세포들은 내후각피질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와 방향성이 같은 격자를 만드는 세포들은 뭉쳐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이들은 내후각피질을 따라 단계적으로 배열된다. 이런 여러 종류의 격자세포가 상호작용하며 쥐가 이동할 때 무의식적으로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사람의 격자세포도 마찬가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예상이다.

이런 연구결과는 ‘동물의 뇌 안에도 공간에 관한 추상적 지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행동과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육각형이라는 패턴은 최소의 격자세포로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공간적 해상도라는 점도 큰 의미가 있다. 육각형을 활용함으로써 우리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며 효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 년간 철학자와 과학자를 사로잡아온 문제, ‘뇌가 어떻게 주변 공간의 지도를 만들고, 우리가 어떻게 복잡한 환경에서 길을 찾는가’는 장소세포와 격자세포의 발견으로 해결됐다. 이 결과를 보면서 뇌 메커니즘뿐 아니라 ‘인생에서 길 잃지 않는 법’까지 생각하게 됐다. 어디에 있는지 위치부터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꼼꼼히 기억해두는 뇌의 위치 처리 시스템을 참고한다면 우리 삶에서도 웬만해선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