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면해 왔던 乙의 현실들
우리가 외면해 왔던 乙의 현실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5.01.1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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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정규직화 위한 지속적 노력 결실
금융위 제재로 애먼 콜센터 노동자 피해?
[사람] 박영숙 AIA생명지부 지부장

ⓒ김효진 객원기자 kkimphoto@gmail.com
은행, 카드사, 보험사, 증권사, 이른바 금융권의 올 한 해 가장 큰 고비이자 화두는 보안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연달아 터지는 고객정보 유출 사고에 금융당국은 서둘러 방비책을 제시하기 바빴다.

영업정지와 같은 강도 높은 제재도 가해졌다. 박영숙 사무금융서비스노조 AIA생명지부 지부장은 이와 같은 제재 조치들로 금융업종의 ‘乙 중의 을’인 콜센터 노동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고 말한다.

정규직화 위한 집요한 노력

AIA생명지부의 올해 임단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주요 쟁점이 됐던 부분 중 하나는 계약직, 파견직, 아웃소싱 등 이른바 회사 내의 비정규직 문제였다.

“비정규직을 없애는 작업은 벌써 4, 5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해 왔던 거예요. 노사 간 합의를 통해 차별을 두지 않고 점차 없애가기로 정하고, 노동조합은 바로 계약직과 파견직 직원 리스트를 받아서 직무분석에 들어갔죠. 한 사람 한 사람 면담을 하면서 계속 데이터를 쌓아 왔어요. 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3년여에 걸친 작업으로 그동안 100여 명의 직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2013년에 추가로 41명이 전환됐다.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들이다.

남은 과제는 데이터센터, 헬프데스크, 프로젝트 팀에서 일하는 이른바 아웃소싱 직원들이었다. 700여 명 전체 직원들 중 60여 명 가량 되는 인원이다. 본래 취지와 무관하게 이들 인력이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길게는 8년에서 10년까지 일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박영숙 지부장은 이들 아웃소싱 직원들의 처우를 빗대 ‘을 중의 을’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급여의 차이가 크다. 회사에서는 업무를 자꾸 세분화시켜 아웃소싱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일터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지점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녜요. 둘이 앉아 있는데 예를 들어 정규직 직원이 휴가를 가면, 옆에 있는 비정규직이 일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올해 단체협약에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이 6개월 이상 근무를 할 때는 평가를 거쳐 정규직 전환을 한다는 문구를 넣을 수 있었다.

임금 얘기 왜 안 하나?

비정규직 이슈를 노조 한 해 농사인 임단협의 주요 쟁점으로 띄우는 것은 사실 부담이 크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입장에선 당장 내 문제가 더 크게 와 닿는다. 박영숙 지부장도 고민이 컸던 지점이다.

“교섭을 10차 이상 진행할 때까지 일부러 임금 얘기를 한 번도 안 꺼냈어요. 교섭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데, 조합원들의 불만이 나왔죠. 왜 위원장은 임금 얘기를 안 하냐. 단체협약에서 어느 정도 노조가 힘을 받지 못한 채 임금 얘기로 넘어가면, 사실 다른 이슈들은 매몰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외로 압박을 받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조합원들과의 소통, 노조 일상활동 강화를 통해 투쟁에 불을 붙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부 조항들을 패키지로 묶어 주고받자는 사측의 권유를 일축했다.

금융업종을 비롯해 콜센터 노동자들의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고, 간혹 직접고용된 이들도 차별적인 직군제도로 묶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2년 에르고다음다이렉트를 악사그룹이 인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BNP파리바카디프로 재매각을 추진하면서, 돌연 대전 콜센터 직원들을 서울로 발령 낸 사례를 보면 이들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을의 설움’에 시달리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금융위원회는 정보유출에 대한 제재로 콜센터의 영업을 중지시켰습니다. 불똥이 애먼 데 튄 거예요. 진짜 피해를 보는 건 콜센터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고, 또 이들 중엔 가장이 많았어요. 금융위에선 뭘 했나요? 정보유출에 대한 해결책은 나왔나요? 을 중의 을, 콜센터 노동자들이 오만 피해를 다 본 겁니다.”

변화 모색해야 할 시기

박영숙 지부장은 그동안 정규직 노동자들이 외면해 왔던 현실을 지적했다. ‘우리가 다 떠안을 수 있을까?’ 양심에 찔렸음에도 부담스러워 회피했던 현실을 상기시킨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전되고 금융업종을 포함해 노동계 전반이 비정규직 문제, 이른바 ‘을의 고통’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대두되는 요즈음, 변화를 모색하기에 적기라고 말한다. 전면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지부장은 당장 내년도 사무금융서비스노조 여성위원회 핵심 사업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룰 계획이라고 밝혔다. 준비와 실천 과정, 그리고 목표까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또한 사무금융서비스노조와 더불어 콜센터 노동자들을 연계 조직하는 계획을 고민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