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비’로 여름을 식히는 사람들
김경아 기자 kakim@laborplus.co.kr
뜨겁다. 그 정도로는 모자라다.
뜨거운 기운이 ‘훅’ 하고 와서 안긴다. 그러면 숨이 ‘턱’ 막힌다.
“일년 내내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게 이골이 나지 않냐”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그 놈의 열기는 쉬이 친해지지 않는다”는 것.
바깥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도 ‘더워서’ 땀을 흘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여름은 ‘사우나 속 사우나’다.
이만한 이열치열이 또 어디 있을까.
펄펄 끓는 쇳물 앞에서, 유리를 녹여버리는 가마 앞에서, 초강력 가스불 앞에서 여름과 씨름하는 사람들의 여름 속으로 들어가 본다.
# 1. 인천 현대제철, 용해부 조작실
이제 막 고철을 녹이는 작업을 시작한 전기로.
살아 움직이는 공룡 같은 불꽃들이 한참을 고철 위에서 춤춘다. 고철 더미가
모두 쇳물이 되어 넘어간 뒤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하나 둘 조작실로 들어선다.
노동자 1 (안전모와 마스크를 벗으며)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도 저녁 먹자고.
노동자 2 (받아치며) 그러자구. 마누라는 죽었다 깨도 이렇게 일하는지 모를 거야.
노동자 1 그거 알면 뭐해, 괜히 속만 쓰리지. 어여 밥이나 먹자구.
팔뚝에 핀 ‘열꽃’, 철강산업 지켜낸 ‘훈장’
사람을 집어 삼킬 듯 뿜어 나오는 불길 앞에서 사람은 차라리 성냥개비만 하다. 작업자 곁에 다가서기도 전에 고철을 녹이고 있는 전기로의 불길이 얼굴에 ‘확’ 옮겨 붙는 듯하다.
취재진이 찾아간 시각, 한 차례 출강(고철을 모두 쇳물로 녹여 다른 로에 붓는 작업)이 끝나자 땀도 식히고 저녁도 먹을 겸 노동자들이 하나 둘 조작실로 들어선다.
전기로가 보이는 위치에 있는 조작실은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도 바깥 열기가 워낙 뜨거워 간신히 열기를 피할 수 있는 정도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전기로 온도가 1600℃요, 그 가까이에서 작업하는 공간이 90℃에 육박하고 좀 떨어져 있어도 40~50℃는 족히 된다.
전기로 근처에서 보수 작업을 하는 김모씨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이곳이 얼마나 뜨거운 곳인지 짐작케 한다.
“어느 날 일하다가 보니 가슴께가 따끔하더라고요. 잠깐 그러고 말기에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퇴근할 때 보니까 일회용 라이터가 터졌더라고.”
제철소는 워낙 고열 사업장이기도 하지만 작업장 안에 수북이 쌓인 먼지들 때문에도 더욱 곤욕을 치른단다. “잠깐 쉬러 와서 보잖아, 그럼 보호 안경 썼던 데만 하얗게 된다니까. 안대 쓴 것처럼”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되어 전기로와 맞붙어 씨름하다 보면 자연히 제일 좋은 시간은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샤워할 때. 초등학생, 중학생 두 아들 크는 재미로 일한다는 이모씨는 하루 중 언제가 제일 기다려지냐는 물음에 당연한 것을 묻는다며 ‘퇴근 시간’을 꼽는다.
“사고 없이 일마치고 집에 갈 준비하는 시간이 제일 좋은 게 당연한 거 아니오. 거기다 퇴근길 삼겹살에 한 잔 걸치면 그거야 말로 최고죠.”
쇳물을 녹이는 일터에서 수십년. 이제 정년퇴직을 3년 남겼다는 모성국 기장은 여기저기 덴 자국이 있는 팔을 내보인다.
“열 앞에 오래 일하다보면 사람 피부가 달라져요. TV프로그램 같은 데 뜨거운 열에 오래 버티는 별난 사람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런다니까” “그래도 여름이 조금은 더 견디기가 어려워. 그래도 지나고 나면 다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신입사원 100명을 뽑으면 10명도 남지 않는다는 제철소는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팔뚝에 얼기설기 덴 자국은 우리 철강산업을 지켜낸 ‘훈장’에 다름없다.
“우리가 하는 일이 소위 3D업종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잘 안하려고 해. 그래도 우리가 국가 기간산업을 지키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애국자’라고 불러”
# 2. 경기도 S유리, 유리병 제조업체
도자기 가마같이 생긴 탱크로 앞에 한 노동자가 서서 3초에 한 번씩 탱크로와
후속 작업을 하는 노동자 사이를 오간다.
유리를 마는 사람과 자르는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기 자 (교대하고 나오는 노동자에게) 이렇게 더운 사업장에서 일하시면 땀도
많이 흘릴 텐데요. 특히 여름에는 더요. 여름 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노동자 ‘밥심’이죠. 뭐 다른 게 있나요?
유리 녹이는 열기도 넘는 ‘가족사랑’
유리는 모래다. 모래(규산)가 시뻘건 물이 되고 나서야 말간 유리로 태어날 준비를 마친다. 유리는 스스로도 열기를 품고 태어나지만 유리를 만드는 사람 역시 열기를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유리병 제작이 한창인 경기도 광주시의 S 유리.
주말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넓지 않은 작업장은 입구부터 벌건 불덩어리를 품은 도가니가 입을 벌린다. 규산과 파유리, 화학원료를 녹이는 도가니의 컨트롤 박스 온도계 눈금이 1700℃를 가리킨다.
도가니를 지나 가마라고 할 수 있는 탱크로에 유리가 녹은 물이 모인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온도. 1259~1287℃가 잡힌다.
“로 앞에서 일할 때는 긴 팔 입어야 되요. 너무 뜨거워서 맨살이 버티질 못해. 살이 익는다고 할까?” 유리 일을 한지 25년이 됐다는 임종선(45) 씨는 “사계절 다 그렇지만 여름에는 특히 교대해서 쉴 때 밖으로 나오면 시~원하다”며 얼른 땀을 훔친다.
탱크로를 떠난 유리물은 순식간에 굳기 때문에 작업에 속도를 붙여야 한다. 그러니 비 오듯 흐르는 땀은 따로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펄펄 끓는 탱크로를 품고 있는 작업장에 에어컨은 이미 소용없기도 하거니와 에어컨이 있어도 켤 수가 없다. 유리가 급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2월부터 선풍기만 틀어놓고 더운 바람에 ‘급한’ 더위만 끈다.
“급하게 일하다보면 데기도 많이 데요. 그래도 일이 많을 때는 일하는 맛이 난다니까요.”
더운 작업장에서 20년 넘게 일한 임 씨는 여름나기 비결은 별게 없다. “비결 같은 게 따로 있나요. 가족들이랑 맛난 것 먹으러 다니고 하는 게 힘이죠.”
유리를 녹이는 열기도 가족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 3. 서울 영등포구, R 중화요리 주방
주방에 있는 가스불마다 끓고 있는 육수.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육수 옆 가스 불에서 음식을 볶고 있는 한 요리사가 보인다.
조리장 (살짝 웃음 띠며) 역시 제일 좋은 때는 손님들이 음식을 깨끗이
다 비울 때죠. 내가 만든 게 맛있었구나 싶은 게. 안 그래?
주방장 (끄덕거리며) 한국 사람들은 단맛, 신맛, 매운맛이 강한 자극적인 맛을
좋아해서 그런 입맛 맞추는데도 한참 걸렸잖아~
중국집 주방은 ‘고온다습’ 경보 중
여름을 ‘이열치열’로 나는 사람들은 공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화 한통이면 허기를 달래주는 중국집. 중국집 주방의 기상도는 언제나 ‘후덥지근한 한여름 장마’다.
좁은 공간에 벽을 타고 뺑 둘러있는 가스불은 모두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를 달구고 냄비에는 육수가 펄펄 끓고 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도 주방을 달구는데 한 몫 거든다.
“점심시간에 보통 한 시간 동안 200그릇 넘게 주문이 들어오는데, 그 때는 정말 주방에 불이란 불은 다 켜놓고 해야 되요. 거기다가 튀김 요리하는 기름온도는 180℃까지도 되니까. 뭐 식사시간 때 되면 아주 전쟁이죠.”
대형 음식점이야 주방 시설을 들이기 전에 냉방시설을 설치하지만 동네 상가에 자리 잡은 음식점들은 따로 냉방시설을 설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위를 무던히 버텨야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절로 나오는 주방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내 일이니까. 내 직업이니까.”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주방장을 하다가 2년 전 한국에 왔다는 김상도 주방장은 서툰 우리말로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김 주방장과 2년 전 한국에 함께 들어온 이승남 조리장은 “열심히 일해 내 가게를 갖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여름을 나는 비결을 ‘정신력’이라고 표현하는 이 조리장에게 그 ‘정신력’이란 바로 ‘꿈을 향한 마음’인 듯 보였다.
특별할 것 같았던,
하지만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그들의 여름
뭔가 재미나고 특별한 여름나기 비결을 기대하고 찾아간 일터들. 하지만 그들에게 여름은 ‘조금 힘든’ 계절일 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타는 목을 적셔주는 음료수병을 집어들 때, 차가운 금속성의 철문을 밀칠 때, 전화 한통에 뚝딱 배달된 자장면의 랩을 벗겨낼 때 한번쯤은 그 속에 담긴 이들의 열기를 느껴봄이 어떨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일터로 향하는 그들이 있어 오늘도 대한민국의 ‘열정지수’는 끝없이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