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것도 재주다? 구조조정 일상화
버티는 것도 재주다? 구조조정 일상화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5.02.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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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 잃어버리고 일하는 화이트칼라
고용불안·실적 압박, 스트레스의 이중주
[커버스토리] 빛바랜 화이트칼라 (1)

“할머니는 옛날식으로 사농공상에 대한 뿌리 깊은 선입견이 남아 있으셨어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요즈음은 생산직들이 월급도 많이 받고 훨씬 더 전문가라고 말해도 통 듣질 않으셨어요.”

사회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직업의 세계는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비슷한 계열의 일들을 서로 묶어 편의상 가리키는 호칭도 각양각색(色)이다. 전통적인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대비를 꼽을 수 있다. 전자는 생산직,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주로 사무직, 정신노동 종사자를 말한다.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직업군의 통폐합으로 생산직인지 사무직인지 경계가 모호해진 직종도 있다. 두 색을 섞은 그레이칼라로 지칭한다. 골든칼라는 최고의 전문기술직 종사자들을 일컫는다. 실리콘칼라는 컴퓨터 실력으로 무장된 인력을, 그린칼라는 최근 유망직종으로 떠오르는 환경·에너지 분야 전문 인력을 가리킨다.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든 저임금 미숙련 여성 노동자를 의미하는 핑크칼라라는 표현은 어쩐지 애틋한 느낌이 든다.

옷깃(collar)의 색이 한 사람의 행복한 삶을 얼마나 반영하겠는가만, 산업의 추이와 그를 반영한 현실 세태를 읽어내는 데에는 유용하다. 한때 화이트칼라는 좋은 시절을 누렸다. 블루칼라에 비해 상대적인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은 어떨까? 만만치 않다. 화이트칼라의 애환을 다뤄 인기를 끈 <미생>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직장은 전쟁터”다. 아차, 하는 순간 스러지거나 밖으로 밀려난다. “직장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언젠간 밀려날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화이트칼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블루칼라가 지금의 산업화시대를 일구었다면, 화이트칼라는 현재를 버티고 있다.

2014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화이트칼라에 속하는 관리직, 사무직 종사자들의 규모는 987만6천 명이다. 블루칼라 노동자는 865만1천 명이다. 이미 1980년대 후반 즈음부터 우리 사회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규모는 블루칼라를 넘어섰다.

하지만 화이트칼라가 내몰린 현실은 엄혹하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의 구조조정은 일상화됐다. 고용이 불안해졌지만 대우가 월등히 높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블루칼라와 비교해 임금의 역전 현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4년 발표한 노동시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34세 이하 노동자들 중 고졸 평균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이들은 1980년 2.4%에서 2011년엔 23.4%까지 늘었다.

아슬아슬한 일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화이트칼라는 회사가 요구하는 스펙에 매달리며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한다. 열정과 에너지, 그리고 헌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말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망이 없는 이들이라도 자리보전을 위해 끊임없이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

미국의 시민운동가 바버라 에렌라이크는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라는 부제를 단 저서 <희망의 배신>에서 화이트칼라들은 “일자리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잃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기업의 요구치에 부응하기 위해 자아를 억누르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해도 언젠간 밀려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다만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덜 충격적으로 ‘뒤통수를 맞는 것’이다. 조금 덜 아프든, 더 아프든 충격은 충격이고, 배신은 배신이다.

일상이 된 구조조정 … 2015년 심상찮다

화이트칼라의 지상 목표가 된 ‘버티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업마다 가장 만만한 구조조정 대상으로 ‘사무직 과장급’을 꼽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래서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끊임없이 짓누르는 가운데, 치열한 경쟁이 일상처럼 돼 버린 민간 기업에서 정년까지 버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5년 현재의 사정은 더욱 안 좋다. 외환위기 대량 해고의 광풍 이후 15년여 만에 화이트칼라들은 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교해도 상황은 더 암울하다. 중소기업, 대기업 할 것 없이 경영실적 악화로 생산직보다는 사무직들을 우선적으로 내보내고 있고, 또 내보낼 계획이다.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업종이라고 볼 수 있는 금융권의 경우 지난해 2만 4천여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1962년 창사 이래 한 번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던 대신증권은 지난해 6월 전 직원의 14.7%인 302명을 희망퇴직 형태로 구조조정 했다. GS칼텍스도 창사 이래 최초로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임원은 15%를 축소했고, 사업본부도 7개에서 5개로 줄였다.

정초부터 대두된 현대중공업의 구조조정 계획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3분기까지 3조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조직 슬림화를 내세우고 있다. 전체 사무직 과장급 6천여 명 중 1,500명 규모의 희망퇴직을 실시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모회사인 현대중공업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하이투자증권 역시 지난 1월 28일 전체 48개 점포 중 20개 폐쇄, 250명 규모의 희망퇴직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직이냐 창업이냐,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길

“내보낼 때까지 악착스레 붙어 있는 게 좋다”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넋두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구조조정으로 일터에서 내몰린 화이트칼라들은 이직과 창업 두 갈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 쪽도 쉬운 길은 아니다. 경기 침체로 자영업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2013년부터는 자영업 창업자보다 폐업자가 더 많다는 통계도 나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1월 29일 ‘자영업자 진입-퇴출 추계와 특징 보고서’를 냈다. 여기에 따르면 전체 자영업자 수는 2000년 779만5천 명에서 지난해 688만 9천 명으로 줄었다. 2012년 자영업 창업자 수는 72만 7천 명이었고, 폐업자는 58만 7천 명이었다. 2013년에는 창업자와 폐업자 수가 역전돼 58만 2천 명이 자영업에 뛰어들었던 반면, 65만 6천 명이 폐업했다.

보고서를 발간한 현대경제연구원은 “2011년과 2012년 자영업자가 과다하게 진입했다가 경쟁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퇴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40대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심각한데, 전체 자영업자의 25.6%를 차지하고 있는 40대 자영업자가 전체 폐업자의 45.3%를 차지한다. 자영업을 그만두려는 이유로 ‘사업부진’을 꼽는 비중도 2011년 19.3%에서 2013년 39.5%로 높아졌다.

이와 같은 통계 분석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창업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현실이다. 직장 생활을 접고 자영업에 뛰어들려는 이들이 ‘준비된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폐업한 이들이 다시 임금 노동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 마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내 헤드헌팅 전문업체 ‘HR코리아’는 2014년 상반기 1,124건의 구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공적인 이직을 위한 주요 포인트를 제시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조건 이외에도, 해당 산업분야와 기업의 규모, 정서에 따라 채용공고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까지 전략적으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처럼 준비를 아무리 철저하게 했더라도 어지간히 눈에 띠는 성과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직이나 구직은 헛수고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겉으로 드러난 ‘스펙’이 중시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기업들은 대기업 출신 인재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이미 대기업 출신 이직 희망자들은 시장 수요를 넘어섰다는 게 헤드헌팅 업체의 시각이다.

화이트칼라의 순례 코스처럼 돼 버린 이직이라든지, 퇴출과 재취업을 위한 구직 과정에서 개별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대상화된다. 스스로를 팔아야 할 ‘상품’처럼 느끼게 된다. ‘희망의 배신’의 저자 바버라 에렌라이크가 언급한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내몰린다. 직장에서 쫓겨난 것도, 이직이나 구직이 쉽지 않은 것도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요”된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이와 같이 기업이 원하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현실의 상황이 암울하고 간절한 만큼 문제를 찬찬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여유는 없다.

스트레스 완전노출

치열한 경쟁과 실적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 속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월요병’에 대한 경험담이 이야기되는 건 애교 수준이다. 취업 전문 사이트인 ‘잡코리아’는 자체 설문조사를 통해 직장인 10명 중 8명이 출근만 하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우울증으로 악화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심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흔한 두통, 어깨결림, 소화불량, 피로감 등의 신체적 문제도 우울증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이 의료계의 주장이다. 국내 한 의원은 지난해 이명환자 29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사무직 종사자가 42%(122명)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고 보고한 바도 있다.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는 어떤 모습일까? 시중은행 노동조합의 한 관계자는 곁에서 목격한 안타까운 사례를 이야기했다. 40대 중반에 관리직이 된 한 은행원은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은행의 인수합병 과정에서 실적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매일 저녁 늦게 퇴근해야 했고, 휴일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음주나 골프 접대가 이어졌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가족들을 남겨두고 자살을 택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은행 차원에서 예금 유치액, 예금 대비 대출률, 신용카드 확장이나 보험 판매액, 주택청약통장 건수 등을 수치화해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연거푸 두 차례 달성하지 못할 경우 본부 후선대기로 발령을 내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또 “간혹 까다로운 고객들의 불평불만을 상대하다보면 애가 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도 덧붙였다. 만약 자신이 피인수된 은행 출신이거나 비정규직이었다면 이와 같은 스트레스는 더욱 심할 것이라는 얘기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