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혼돈의 바람? 산별노조 시대가 열린다 1
변화의 바람? 혼돈의 바람? 산별노조 시대가 열린다 1
  • 승인 200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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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은 왜 산별을 택했나


‘안 가면 2007년엔 큰일’ 불안감에


‘딱히 다른 대안도 없다’ 대세론 겹쳐

 

완성차노조들의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앞으로 노사관계에 미칠 여파만큼이나 많은 후문을 낳고 있다. 일단 예상보다 높은 찬성률이 화제가 됐다. 일찌감치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은 회사는 물론이고 노동조합도 대외적인 자신감의 표현과는 달리 부결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현대자동차가 올해 1월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에게 의뢰해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찬성이 63%, 반대가 37%로 전체조합원 3분의 2를 채우기에는 약간 부족한 결과가 나왔다.

 

#1. 6월 초.
부결 확실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

노동계가 산별노조 전환 움직임에 속도를 붙이던 6월 초반.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은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분주했다.
대략적인 분위기 파악이 끝난 후의 결과는 ‘안도’. 대부분 기업의 노무담당부서에서 최소 50%에서 최대 60%의 찬성률을 예견한 것.


낮은 수치의 근거는 대부분 과거 산별전환 투표의 부결 당시와 비슷했다. 현대차그룹 부품사의 한 노무부서 관계자는 “2003년에 비해 조합원들의 이해타산적 성격이 더 강화됐고 비정규직과의 갈등도 심화되는 등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봤다”고 전한다. 이런 ‘자신감’이 있었던 만큼 완성차와 계열사들에서는 산별전환 투표에 대한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일부 기업에서는 “괜한 부당노동행위의 시빗거리를 만들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리라”는 지침(?)이 돌았다는 후문. 간간히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다’는 실무자들의 보고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처리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부결의 가능성에 더 많은 무게를 실었다.


#2. 개표 D-4.
묻지마 산별? 술렁이는 현장
현대차노조의 산별전환 투표를 앞둔 6월 27일. 승용 1공장 대의원회 부대표 명의로 뿌려진 유인물 한 장에 현장이 술렁였다. 유인물은 “아무런 쟁점도 정리되지 않은 채 무조건 산별로 전환하고 보자는 식의 산별전환 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집행부가 산별노조의 단점은 접어둔 채 장점만을 선전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이 얘기도 맞네. 혹시 또 우리만 총대 메는 것 아니야”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마음이 급해진 노조는 민주노총 울산본부 하부영 본부장에게 현장 분위기 파악과 수습을 요청했다. 연락을 받고 승용 1공장에 들어간 하 본부장은 의외의 분위기를 접했다고 한다.

 

“예상 외로 현장이 조용하더라고. 내가 28일 날 들어갔으니까 유인물 뿌려진 지 만 하루인데 ‘사실이가, 대답 좀 해봐라’고 묻기는 해도, 한 세 시간쯤 차분히 얘기해 보니까 ‘안 가면 우짤낀데?’ 이런 분위기였어요” 하 본부장은 이 때 대세를 감지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활동가들이 조합원들의 궁금증이나 의문을 명확히 풀어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서 ‘묻지마 산별’이란 비판도 나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난 그냥 ‘그래, 묻지마 산별이라도 가자’ 그랬어요. 우리가 10년을 논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묻고 또 물어서 나온 게 뭡니까? 그런데 이제 2007년 앞두고 더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이제 논쟁은 그만하고 가자, 그랬죠.”
그리고 이런 예측은 채 닷새가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3. 개표 D-DAY,
되는 거야?…되겠다!…됐다!

6월 30일. 20여 년이 넘게 유지되어오던 기업별 노조체제가 일대 전환을 맞는 날이었다.
외부의 지나친(?) 관심이나 주목과 달리 현대차, 기아차, GM대우차 등 완성차 3사는 차분히 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분함의 원인은 모두 달랐다. 회사는 대체로 ‘가결되지 않을 것’이라거나 ‘가결되더라도 당장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었고 노조는 ‘자신감 반, 긴장감 반’의 심정이었다.

 

정오를 넘어서면서 현대차에서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비스, 판매, 정비, 전주, 남양, 아산 등 5개 본부의 투표함이 개표된 낮 12시께 73%의 찬성률을 보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울산 노조사무실에서는 “이제 됐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울산공장보다 조합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던 남양연구소와 아산공장의 ‘벽’을 넘었으니 이후는 탄탄대로라는 것.


오후 세시에 개표에 들어간 기아차노조에서도 한 시간 남짓이 지나자 60% 정도의 개표율을 보였다. 이때까지의 찬성률이 73% 정도. 반신반의하던 노조간부들의 얼굴에도 확신이 들어차는 순간이었다. 개표 전날까지만 해도 현대차에 비해 현장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노사 당사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부결가능성도 점쳐졌던 상황이라 탄성은 현대차노조보다 더 컸다. 이어 GM대우차노조에서도 찬성률 77%의 ‘낭보’가 전해졌다.


노동조합은 희색이 돌았고, 회사는 차분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회사가 당혹해하고 있다는 일부 시각과는 달리 ‘올 것이 왔다’는 시각이 더 강해 보였다. 공식적 집계 직후 전화 통화를 통해 현대차의 한 노무담당 임원은 “예상보다 높은 찬성률이 놀랍다”면서도 “결과를 놓고 일희일비하기보다 향후 대책을 수립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다른 시각도 있었다. 기아차 노무부서 관계자는 “모두가 부결을 점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시급히 원인 분석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각 단위 사업장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금속산업연맹에서도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면서 “산별노조 시대가 왔다”는 자축이 시작됐다. 오후 일곱 시. 금속산업연맹의 최종집계가 발표됐다. 결과는 ‘절반 이상의’ 성공. 연맹 소속 52개 기업별노조 가운데 20개 노조 10만450명이 진행한 투표에서 13개 노조 8만6985명이 산별전환을 결의했다. 7개 노조가 부결됐다지만 완성차 노조가 모두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후 진행될 투표에서 부품사나 여타 노조들이 무난하게 대세를 좇을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좋은지 나쁜지 모르지만 다른 대안도 없으니까…
완성차노조들의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앞으로 노사관계에 미칠 여파만큼이나 많은 후문을 낳고 있다. 일단 예상보다 높은 찬성률이 화제가 됐다. 일찌감치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은 회사는 물론이고 노동조합도 대외적인 자신감의 표현과는 달리 부결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현대자동차가 올해 1월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에게 의뢰해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찬성이 63%, 반대가 37%로 전체조합원 3분의 2를 채우기에는 약간 부족한 결과가 나왔다. 반대의 이유로는 ‘사업장 단위의 고충처리가 잘 해소되지 않을 것’(38%)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임금 및 노동 조건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33%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조합원들의 ‘산별호’ 선택에는 무엇이 작용했을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유는 복수노조 시대, 노사관계 로드맵, 노동조합 전임자임금 지급 금지 등이 가져올 파장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한 현장조직 간부는 “그런 면에서는 노조의 선전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볼 수 있다”면서 “조합원들이 복수노조 시대에 대해 어떤 뚜렷한 상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노조 활동이 대폭 축소될 수 있다는 불안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비빌 언덕이 더 좁아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차체2부의 김모 조합원은 “뭐가 뭔지는 잘 몰라도 하여튼 산별노조로 가지 않으면 2007년에는 큰 일이 나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TV고 신문이고, 노조 유인물이고 2007년이 되면 큰일이 난다고 떠들어 대니 마음은 불안하지, 그렇다고 누구 하나 특별한 대안을 내기를 하나. 그런 와중에 노조에서는 이게(산별)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니까 특별히 또 반대할 이유도 없었던 거 아니겠어요?”


“개별기업서 풀 수 없는 문제 너무 많다”
하지만 ‘대세론’, ‘분위기’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조합원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더 강해지고 비정규직과의 갈등이 정규직 조합원들의 불만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후상박’의 임금원칙 등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조합원들의 우선순위가 임금·복지에서 고용의 문제로 옮아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대량 구조조정, 그 이후로 등장한 상시 구조조정 체제 속에서 조합원들은 더 이상 일자리가 개별 기업 내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고 개별기업이나 노조가 자신의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도 경험상으로 터득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몇 년간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비정규직 문제, 공장의 해외이전이나 산업공동화 등의 문제가 개별기업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인식은 완성차 사업장보다는 부품사업장에서 더 크게 작용했다. 지난 2003년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금속노조 만도지부 김희준 지부장은 “최근 들어서 조합원들 사이에서 완성차 조합원들이 공장의 해외이전을 막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자주 나온다”며 “완성차의 해외 진출에 따른 부품사의 고용불안 등은 부품사 단독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확산된 것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현대자동차 현장조직의 한 간부는 “당장 물량 조정이 있을 때마다 비정규직을 ‘안전판’ 삼아온 정규직 조합원들인데 고용을 중시해서 한 선택이라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 간부는 “그것보다는 오히려 조합원들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건드린 것이 더 주효했다”고 말한다. 일례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를 설명하면서, 산별노조로 가지 않고 기업별노조로 남을 경우 전임자 임금을 조합비로 대기 위해서는 조합비의 큰 폭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선전이 조합원들에게 먹혔다는 분석이다.


현장조직 한 목소리, 보약? 독약?
2003년 산별 전환 투표 때는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던 현장 조직들이 통일된 목소리를 낸 것도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산별전환 투표 시기가 다가오면서 현대자동차의 경우 11개 조직, 기아자동차의 5개 조직의 공동 명의로 산별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선전물이 나왔다.


현대자동차 승용 5공장의 임모 조합원은 “사소한 사항에서도 늘 으르렁대던 현장조직들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냈다”며 “그만큼의 절박함과 필요성이 조합원들에게 다가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현장조직이 산별노조의 상과 조직체계에 관해 통일된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아자동차 현장조직의 한 간부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다른 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세’와 ‘명분’을 거스를 수 있는 배포는 아무에게도 없었고 결국에는 일단 통과시켜 놓고 세부적인 내용을 정리하자는 데 뜻이 모아진 결과”라고 전했다. 실제로 기아자동차 ‘현장의 힘’은 지난 3월 경 “내용에 대한 논의 없이 일정박기식으로 추진되는 산별에 대해 반대” 원칙을 명확히 했지만 6월이 되어서는 결국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산별노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담은 선전물을 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에도 대의원 개인의 명의로 배포된 유인물 한 장을 제외하면 현장조직들 간의 다른 목소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례가 없는 현장조직들의 ‘단결’은 이번에는 ‘보약’이 됐지만 앞으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임단협 이후 산별노조의 구체적인 형태와 교섭방식 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각 조직 간의 입장 차이가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


노조는 숨 가쁘게, 회사는 숨죽인 채 달려오던 산별전환의 여정이 일단은 마무리됐다. 조합원들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지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데는 노사의 의견이 일치한다. 특히 복수노조 허용과 산별노조 시대가 맞물리면서 노사 모두 혼란을 예상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이 혼란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