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창구 단일화, 어디로 물꼬 트나
교섭창구 단일화, 어디로 물꼬 트나
  • 승인 200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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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노조 가는 길,


안전핀 뽑아놓고 ‘멈칫멈칫’


교섭창구단일화 노사 입장차 좁혀질 가능성 희박


연내 합의 못하면 한번 더 미뤄?


 

노사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보니 현장에서도 갑갑한 마음에 ‘차라리 복수노조 시행 시기를 한 번 더 연기하자’는 얘기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중공업업체 T사의 노무담당 임원은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이 혼란의 시기를 맞느니 시간을 좀 갖다 보면 그만큼 노사 모두가 성숙한 후에 문제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두 번이나 연기된 문제를 또 연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복수노조 시대가 여섯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교섭창구 문제는 노사 모두에게 피해갈 수 없는 1차 관문.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부칙 제5조 3항은 “노동부장관은 2006년 12월 31일까지 제1항의 기한이 경과된 후에 적용될 교섭창구 단일화를 위한 단체교섭의 방법·절차 기타 필요한 사항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법적으로 보자면 교섭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한 복수노조의 설립을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복수노조 시대를 여는 것도 불가능한 셈이다.


교섭창구 단일화, 너무 큰 입장 차이
하지만 노사 모두 1차 관문 앞에서 ‘멈칫’하는 분위기다. 특히 이 문제는 노사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문제여서 쉽게 어느 한쪽의 양보를 점칠 수 없다.
사용자는 하나의 사업장 또는 직종, 업종 내에 속한 다수의 노조들이 모두 교섭을 하자고 나올 경우 교섭비용의 낭비와 복잡한 교섭구조로 인한 혼란을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경영계는 노조 간에 자율적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교섭단위 내 ‘조합원 과반수’가 아니라 ‘노동자 과반수’의 지지를 받은 노조에 배타적 교섭권을 주는 미국식 제도를 채택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계 내부에서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6월 발표한 자료를 통해 “과반수 노조에 특별한 절차 없이 교섭권을 주는 것은 나머지 노조가 단체교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도 걱정은 마찬가지. 특정 노조에만 교섭권이 부여될 경우에는 다른 노조들의 소외 문제가, 모든 노조에게 교섭권을 보장할 경우 노조 내부의 세력 분열과 힘겨루기 등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노동계는 ‘노사 자율’과 ‘모든 노조에 교섭권 부여’를 원칙으로 잡았다. 민주노총은 지난 6월 19일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확정한 ‘민주적 노사관계 방안’에서 모든 노동조합에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되 조합원 또는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하나 이상의 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일반적 구속력을 부여하도록 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한국노총도 교섭창구 문제는 노사 자율에 맡길 문제이지 법적으로 강제할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노사 또는 노노간의 자율적 창구단일화가 이뤄지도록 하되 자율적으로 창구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과반수 노조가 교섭 대표권을 갖도록 하는 방안으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단일화 절차는 두 가지 안이 제시됐다. 첫째 방안은 전체 조합원의 과반수를 보유한 노조에 협상권을 주되 만일 과반수 노조가 없을 때는 조합원 투표를 통해 대표 노조를 뽑도록 한다는 것(다수대표제). 둘째는 각 노조가 조합원 수에 비례해 교섭위원단을 구성하는 방안(비례대표제)이다.


노사 어느 한 쪽의 입장도 양보하기 어려운 선상에 서 있다. 먼저 노동계는 헌법상에 보장된 노동3권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민주노총 김명호 기획실장은 “교섭창구를 법적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은 특정 노조에는 교섭권이 빠진 노동2권만을 보장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며 “노동3권의 문제는 누구 하나가 양보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경영계는 이런 원칙론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외환위기 이후 인수합병의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그대로 승계돼 상급단체가 서로 다른 생산직 노조 두 개에 최근 사무직 노조의 결성으로 세 개의 노동조합과 교섭을 하고 있는 음료업체 H사의 노무담당 임원은 “현재로서도 세 개 노조와 교섭을 하려면 1년 365일 모자랄 지경인데 교섭창구 단일화 없이 복수노조 시대가 열리면 교섭 비용을 감당할 기업이 몇 개나 되겠냐”고 반문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노동계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같은 회사의 생산직노조 김모 정책실장은 “세 개 노조와 교섭을 한다지만 결국엔 메인(제 1공장의 생산직 노조)이 교섭을 끝내면 나머지 노조는 자동 타결되는 관행을 유지해 왔다”며 “이로 인한 다른 노조들의 불만과 회사의 ‘눈치보기’, ‘줄 세우기’ 등이 노노 간의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간부의 말처럼 현장에서는 경영계와 마찬가지로 노조 역시 교섭창구 단일화 없이 복수노조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면서도 딱히 다른 대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노총 김종각 정책본부장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당분간의 혼란은 불가피 할 것”이라면서도 “노동계 스스로 교통정리, 정화를 해나가도록 해야지 미리부터 특정 노조의 교섭권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현장 노사는 중앙만큼 첨예하지 않아
중앙 단위 노사의 입장 차이는 현장에서도 확인되지만 중앙에서처럼 첨예하지는 않다. 지난 2005년 10월부터 한 달간 한국노동연구원이 388개의 사업장 노사대표 690명(노 330명, 사 3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업장 내에 조직 대상이 같은 복수노조가 생길 경우 교섭방식을 묻는 질문에서는 법적 교섭창구 단일화가 47.2%로 가장 많은 답변을 차지했고, 자발적 교섭창구 단일화가 37.8%로 나타났다. 답변자를 노사로 세분해서 살펴보면 노무담당자들은 법적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응답에 55%로 가장 많은 지지를 보였지만 노조대표는 자발적 단일화를 지지하는 입장이 39.1%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법적 단일화로 38.5%, 각각의 노조와 교섭해야 한다는 답변도 21.8%로 나타났다. <그래프 참조>

 

중앙 단위 노사와 같은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각 답변의 차이가 10% 내외로 중앙만큼 첨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교섭창구를 법적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노, 152명 사, 218명)를 대상으로 법적 단일화 시의 노조측 교섭대표 선출 방식을 묻는 질문에서는 다수대표제가 64.3%, 비례대표제가 34.6%로 나타났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노사의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다. 노무담당자의 64.2%, 노동자대표의 64.5%가 다수대표제를 지지한 것.


노동계의 산별노조로의 전환 움직임이 빠른 가운데 복수노조 허용 시의 또 다른 쟁점이 될 수 있는 산별노조의 교섭창구 단일화 대상 포함 여부에서도 노사간에 큰 의견 차이가 없었다. 응답자의 62.3%가 “포함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은 35.8%였다. 노사를 구분해 봐도 큰 차이는 없었는데, 노동자대표의 경우 65.2%가 “포함해야 한다”고 대답해 노무담당자의 59.7%보다 약간 높았다.

 

노사 시계 안개 속, “시간 더 필요하다” 의견도 
하지만 중앙 단위의 노사는 현장의 노사와 달리 입장 차이가 너무 뚜렷해 전망이 밝지 않다. 특히 교섭창구 단일화와 관련해서는 다수노조 지위 부여 기준, 산별노조와 기업노조의 창구 단일화 등 민감하고 복잡한 현안들이 많아 총론에 합의하더라도 각론에서 논란이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정부가 제시한 로드맵 입법시기인 9월 전에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는 “민주노총의 노사정 대표자회의 참여로 비정규직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문제까지 더해질 것으로 보여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처리 전망은 더욱 불투명해졌다”며 “정부가 논의 시한을 지난 뒤 비정규직 법안처럼 독자안을 국회에 제출하거나 현실적인 일정을 감안해 법 시행을 유예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노사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보니 현장에서도 갑갑한 마음에 ‘차라리 복수노조 시행 시기를 한 번 더 연기하자’는 얘기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중공업업체 T사의 노무담당 임원은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이 혼란의 시기를 맞느니 시간을 좀 갖다 보면 그만큼 노사 모두가 성숙한 후에 문제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두 번이나 연기된 문제를 또 연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노총 관계자도 “막판까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면 결국 재유예 외에는 길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복수노조 허용은 십수 년 간 노동계의 숙원사업이었고 수차례의 ILO 권고 등이 있었던 만큼 노동계가 먼저 유예 얘기를 꺼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추진 의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중장비업체 D사의 노무담당 상무는 “정 합의가 되지 않으면 정부가 단독으로라도 입법을 추진해야 하지만 현 정부가 그만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에 국회 구성상 정부 의도대로 처리가 될 수 없다는 점도 연내 처리를 불투명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일단 노사정 모두가 10년 이상 연기되어 온 문제를 재유예하는 가능성은 원칙적으로는 배제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유예에 유예를 거듭해 온 10년 동안 노사정 모두가 아무런 준비도 해오지 못한 현실에서 3개월의 논의 시한은 너무 촉박하다는 주장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어떤 경우가 됐든 교섭창구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복수노조 시대를 맞는 것은 ‘시한폭탄’을 끌어안는 것과 다름없다는 데는 노사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안전핀은 뽑혔고 초침은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노사의 시계는 아직도 안개속이다. 


 

 복수노조 교섭창구, 해외에선 어떻게?

 

미국 : 과반수 노조의 배타적 교섭
연방노동위원회(NLRB)가 결정한 적정 교섭단위에 속하는 노동자의 다수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에게만 그 단위 내의 노동자를 위해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할 권한을 인정하는 ‘배타적 교섭방식’을 택하고 있다.


배타적 교섭권을 획득한 노동조합은 ‘공정대표의무’를 갖고 조직노동자는 물론 미조직 노동자까지 대표한다. 배타적 교섭권이 없는 노동조합 및 개별 노동자의 교섭권은 원칙적으로 박탈된다.

 

일본 : 모든 노동조합에 단체교섭권 부여
노동조합의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조합에게 단체교섭권을 부여한다. 각 노동조합은 자기 조합원에 대해서만 단체교섭권을 갖고 사용자는 각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용자가 각 노동조합과 교섭을 할 때 노동조합 간에 차별을 둘 경우 성실교섭의무 위반으로 부당노동행위가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노조가 교섭권을 갖기보다 사업장 내 먼저 설립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유일교섭단체 협정이나 유니온숍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랑스 : 각 노조 동수로 교섭단 구성
사업장 내에 산업·지역·업종별 노동조합이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지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지부대표가 기업별 단체교섭을 진행한다. 대표성이 있는 노동조합에만 단체교섭을 인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한 사업장 내에 대표성을 갖는 노조도 여럿이기 때문에 사용자는 교섭시기를 통일하는 방식을 취한다. 대표성 있는 한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을 요구하면 사용자는 사업장 내 다른 대표성 있는 노조에게 교섭사실을 통지함으로써 단체교섭을 원하는 다른 노조가 함께 교섭에 참여하도록 하고, 불참하는 노동조합은 교섭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한다.


법이 정하는 일정한 요건 (노동자 대표선거에서 총유권자의 과반수 지지)을 충족하는 노조에게는 단체협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협약거부권을 부여한다.

 

영국 : 노사자율 및 사용자 판단
단체교섭 창구 단일화는 강제하지 않고 노조의 단체교섭권 인정은 원칙적으로 사용자의 자율 판단에 맡기고 있다.


노조의 단체교섭권은 노조 설립과 동시에 자동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고 사용자로부터 단체교섭의 상대방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교섭권을 갖게 된다. 단, 교섭단위 내 전체 노동자 중 과반수가 조합원이거나 40% 이상의 근로자가 노조 인정에 찬성한 경우 사용자의 승인과 관계없이 노조를 교섭 주체로 인정하는 법률은 1998년에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