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삶을 연기하다
내가 아닌 삶을 연기하다
  • 이상동 기자
  • 승인 2015.04.1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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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위한 10분의 짧은 일탈
즐거움을 위한 변신이 시작된다
[일.탈_ 나만의 힐링을 공개한다] 연극

대사를 틀렸다. 미리 약속된 상황이 맞지 않아 애드리브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무대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연습에 많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비싼 소품과 넓은 공연장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즐겁다. 대본을 외우고 배역을 점검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삶이 시작된다.

▲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2013 시민연극제’<강령의 페르소나>의 한 장면 ⓒ 오당춤

10분 동안의 일탈, 어른들의 놀이

연극은 NG가 없다.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조금의 실수는 슬쩍 넘어간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집중력은 더 높아진다. 연습 때 부끄러워서 잘 하지 못했던 연기도 공연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된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실전에선 찾아 볼 수 없다. 틀렸다고 멈출 수 없는 것이 연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이 시작되면 자신의 100%를 발휘해 연기를 한다.

“연습 때 자기 실력의 100%를 해야지 공연 때 퀼리티를 높일 수 있는데, 아마추어는 그걸 잘 못하니까 완성도를 높이기가 쉽지 않아요.”

성종택(30) 씨는 ‘일상연극단 오당춤’의 대표다. 무용단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연극을 취미로 한다. 오당춤은 세종문화회관 시민연극교실 3기 구성원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극단이다. 2011년 처음 공연한 ‘오해는 당신을 춤추게 하지’의 첫 글자를 따서 ‘오당춤’으로 지었다. 연극이나 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모여 함께 즐긴다. 극단 구성원은 직장인부터 주부, 학생까지 다양하다.

오당춤은 ‘10분 연극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물론 직접 참여해 공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긴 시간의 연극이나 한 시간이 넘는 공연을 하게 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연습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주 모여야 한다. 배역에 맞는 인원도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정해진 연습시간에 모두 모이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이 10분 연극제를 기획하고 공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연극의 기본은 배역에 맞춰 연기를 하는 것이다.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 타인이 돼야 한다.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반복된 생활로 삶은 고정된다. 틀에 맞춰 살아가다 보면 탈출구가 필요하다.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연극은 역할 변신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한다. 평상시의 얌전한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내보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는커녕 즐거움을 주는 일탈이 되는 것이다.

“직장을 다녔을 땐 퇴근해도 집으로 안 가고 바로 연습을 하러 온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 오면 저녁 11시가 훌쩍 넘기도 했죠. 그렇다 보면 가끔은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뭐지 싶기도 했어요.”

교직 생활을 하다가 퇴직한 서상희 씨(56)는 시민연극교실을 통해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에 빠져 퇴근 이후에 연습을 하러 가는 게 일상이 된 적도 있다고 했다.


작은 투자로 큰 재미 뽑아낸다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10분 연극제의 경우엔 대부분 창작극이다. 연극을 위한 극본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기승전결 혹은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간 완성된 극본을 창작해야 한다.

극본이 만들어지면 필요한 소품도 구해야 한다. 주로 집에 있는 물건들을 가져와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혹은 길을 가다가 소품으로 사용할만한 물건이 보이면 미리 사뒀다가 연극에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극단은 제작비도 많이 들여서 소품도 하고 무대 세팅도 하는데 우리는 저렴하게 해요. 돈 안들이고 간단하게 해서 재밌게 하는 게 목표죠.”

극본 창작과 소품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연습장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큰 규모의 극단은 연습실과 극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취미로 하는 작은 극단의 경우엔 연습실을 구하는 일부터 신경 써야 한다.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로 섭외해야 하고 크기도 너무 작으면 곤란하다. 적당한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대여료도 저렴하진 않다.

▲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연습 중인 모습

19일, 은평구평생학습관을 연습 장소로 섭외하고 저녁 7시에 모여 연습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직장이 먼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어렵다. 8시를 넘겨서야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회사 출장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일이 끝나고 일산, 강남, 강북 등에서 출발한 단원들이 연습 장소로 모였다. 하지만 이용시간이 9시까지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짧게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엔 연습실이 있어서 거기서 할 땐 부담이 없었죠. 아무 때나 모여서 연습할 수 있었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연습실을 뺐어요”

성종택 씨는 단원들의 연습 장소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말한다. 팀원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를 섭외하고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해 연습시간을 정한다. 사전에 조율이 충분히 이뤄져도 야근과 출장이라는 변수는 직장인들에게 항상 존재한다.

연습 장소를 대여할 경우엔 대부분 시간제한이 있기 때문에 딴 짓(?)을 할 틈 없이 연습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했다.

배역을 맡고 대본을 외운다. 한 마디의 대사에도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다. 내가 연기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맡은 배역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완벽한 공연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타인이 되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작은 규모의 극단이기 때문에 많은 배역이 필요할 경우엔 1인 2역은 기본이다. 장면이 전환 되면 준비한 소품을 가지고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배역에 맞는 인원이 부족한 경우는 다반사. 정말 급하게 사람이 필요할 땐 친구를 불러 배역을 맡기기도 한다.

힘들게 공연을 준비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봤으면 좋겠지만 홍보에 큰 비용을 지출할 여력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찾아오는 관객은 주로 지인들이다. 2014년 여름 홍대에서 진행된 독립예술축제 ‘서울 프린지 페스트벌’에 참여했을 땐 제법 홍보가 이뤄져 일반 관객들도 많이 찾아와 공연을 즐겼다.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닌 관객과 함께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극단 그리고 각 지역의 평생학습관 등에서 진행하는 연극 교실도 많다. 또한 요즘에는 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진행되는 시민연극 활동도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연극을 접하기 쉬운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민연극에 대한 홍보는 그리 많지 않다. 지역마다 이뤄지는 프로그램도 그렇지만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하는 시민연극교실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분야에 있던 사람들이 연극을 취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매년 나오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만 다양한 영화를 접하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문화생활만 향유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문화의 다양성은 점점 줄어든다.

소규모로 운영되는 극단과 소극장도 어렵다. 대학로의 오래된 소극장들이 경영난을 이유로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문화산업의 호황기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90년대의 이야기인 듯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즐겁기’ 때문에 연극을 한다.

“연기를 하는 나도 만족하고, 연극을 보는 이들과 공유할 수 있어요.”

송기영 씨(47)는 연극이 다른 취미와 다른 점을 공유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하면서도 결국은 그 연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연기를 보러온 사람들과의 공감대 형성도 연극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맡은 역할을 연기해요. 이제는 타인의 시선이 두렵지 않아요.”

고1 학생인 정수지 양(17)은 연기를 하고 나서 사람을 대하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연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연습하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워요.”

이상화 씨(50)는 무대를 위한 연습 과정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 ‘일상연극단 오당춤’의 대표 성종택(30) 씨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된다

연극은 평소보다 과장된 몸짓이나 얼굴 표정을 내보여야 한다. 더 크게 웃고 손짓 발짓도 더 과감하게 한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도 더욱 적극적으로 연기에 몰입하게 된다.

공연이 끝나면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서서 관객들의 갈채를 받는다. 무사히 끝마쳤다는 뿌듯함과 진한 성취감을 얻는다.

직업재활사로 일하고 있는 박정민 씨(42)는 7년째 연기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맡은 배역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직장을 다니며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는 점도 큰 어려움이다. 그렇지만 연극을 하는 것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

“자신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연극이 최고의 연극입니다. 아무리 좋은 연극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내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연극을 보는 게 좋아요.”

영화는 동일한 영상을 반복 상영하기 때문에 언제 봐도 같다. 하지만 연극은 한 번의 공연으로 끝이 난다. 같은 내용을 공연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공연과 다른 연극이다.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도,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느끼는 감정도 매번 다르다.

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극에 직접 참여해 연기를 해보는 것도 좋다. 삶은 한 번이지만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평소에 금기시 되던 행동도 연기를 통해서 마음껏 저질러 볼 수 있다. 일상의 금기는 연극으로 해방된다. 경험이 쌓이고 무대 위에서 경험한 배역이 늘어날 때 마다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무대 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직장인들의 일탈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