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안정돼야 경제발전 이룰 수 있다
사회 안정돼야 경제발전 이룰 수 있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5.04.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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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네트워크 통해 위기 극복한 슈투트가르트
노·사·정·지역 아우르는 공감대 필요
[cover story]_ 위기의 철강산업(3)사회적 대화로 해결방안 찾자

▲ 슈투트가르트 내에 위치해 있는 Mercedes-Benz Museum ⓒ Julian Herzog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현재 위기를 맞고 있다. 중국산 저가 철강제품의 공세로 국내 철강업체들은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직까지는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고 있는 일관제철소가 전기로 업체의 영역에 진출하면서 중소 철강업체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를 극복할 적절한 방안은 없을까?

지역사회 흔든 세계화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기업의 성장과 노동환경 및 사회문화적 환경의 향상을 이뤄낸 사례를 통해 현재 철강산업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지역협력 네트워크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지역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특히 자동차와 기계산업 종사자가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54%를 차지할 정도로 자동차·기계산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지역에는 벤츠, 포르쉐, 보쉬, 지멘스, IBM 등 14만여 개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조업 중심의 지역경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오랜 협력관계는 물론, 이를 지원하는 각종 연구소와 은행, 지방정부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슈투트가르트는 1980년대까지 고부가가치의 품질경쟁과 틈새시장 공략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슈투트가르트 지역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다. 1991년부터 1993년 사이, 슈투트가르트 지역 제조업의 수출은 5%가 감소했고 투자는 무려 31%가 줄어들었다.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 11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1990년대 중반에는 실업률이 9%대로 치솟았다.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가 이처럼 위기를 맞게 된 것은 경제의 세계화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970~1980년대 개발도상국들의 급속한 발전과 1980년대 말의 동구권 붕괴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됐다. 1990년대는 이 같은 경제의 세계화가 가속화된 시기다. 그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졌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빠르게 혁신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는 그런 세계화 속도에 맞추는 데 한계를 보였다. 경제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제품의 수명이 짧아져 제품을 다양하게 하거나 품질을 높이는 정도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충분치 않았다. 후발 국가들의 맹추격으로 고부가가치의 틈새시장은 점점 작아졌고, 이에 따라 고품질의 시장에서도 가격경쟁이 치열해졌다. 관건은 누가 먼저 고품질의 신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느냐 하는 문제였다.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에 필요한 것은 속도경쟁이었다. 세계화에 맞춰 혁신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틀을 벗어나 외부로부터 노하우를 빠르게 도입해야 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거래관행을 해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역경제 내에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온 결과 외부와의 협력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이런 제한적인 협력관계로는 시장이 요구하는 혁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는 경쟁력을 잃고 위기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위기를 맞은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슈투트가르트 지역은 다시 경제성장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 들어서 경제성장률은 4%를 넘어섰고, 9%대까지 치솟았던 실업률도 5%대로 낮아졌다. 2001년 슈투트가르트 상공회의소가 지역 내 1,600여 개의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업 만족도 조사에서는 88%가 긍정적으로 응답했고, 유럽포럼은 슈투트가르트를 경제발전의 모범지역으로 선정했다.

노조, 혁신을 주도하다

이 같은 슈투트가르트 지역의 재도약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조가 혁신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처음 지역경제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기업은 고임금과 복지비용을 문제 삼았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함으로써 고임금과 복지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기업의 문제제기에 대해 노조는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대안 없이 거부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기업의 시도를 거부했다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조의 약화로 이어져 기업의 논리가 관철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노조는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대신 방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경쟁력 강화가 반드시 노동비용의 절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비용 절감이라는 기업의 논리 대신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한 경쟁력 강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노동비용을 절감하려고만 들면 노사간 마찰이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 합리화를 통한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개혁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새로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과 시장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세웠다. 가격경쟁에 휩쓸리기보다 삶의 질과 경쟁력을 결합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를 위해 노조는 제품개발과 연구개발비 확대를 요구했다. 또 정보산업, 생명공학 등 이른바 하이테크 산업에 더 많이 투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노조는 노동환경과 직업구조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노동력의 재교육을 요구했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신제품 개발과 생산과정은 여러 지식이 결합돼야 하는 복잡한 체계로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비용만을 문제 삼는 기업의 좁은 시각을 넘어서는 노조의 대안은 노동과 산업구조의 전반적인 혁신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지역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결국 1993년 기계산업경영자협회와 노조가 공동으로 개별기업과 공장평의회가 추진해야 할 개혁방향의 지침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진 단체교섭에서는 임금문제보다 노동 및 생산조직, 교육과 연구개발 분야 등이 주요한 테마로 등장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1990년에서 199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연구개발비가 50% 이상 증가했고, 부품의 모듈화를 추진해 신모델 개발비용과 생산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 연료절약과 저소음 모터, 유해가스 방지 기술 및 전동차 등 친환경 제품개발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위기상황에서 시민의 참여 빛나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지역 네트워크다. 슈투트가르트는 지역경제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주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주체들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지역경제에 위기가 닥친 이후 기업들은 지역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의 위기 당시 슈투트가르트 지역협의회,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추진회사, 슈투트가르트 지역포럼, 교회 대화포럼, 슈투트가르트 지역문화협회, 슈투트가르트 지역스포츠협회, 슈투트가르트 지역여성협의회 등 새로운 조직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이렇게 새롭게 출범한 조직들은 기업과 노조, 정당, 대학, 연구소, 교회, 스포츠, 예술인 등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을 망라하면서 새로운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특히 슈투트가르트 지역협의회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중심단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협의회는 5년마다 지역 주민의 직접선거로 구성되는 의회를 두고 있으며, 지역 주민 누구에게나 출마 자격을 부여했다. 이 의회를 통해 협의회는 지역 경쟁력 제고는 물론, 교육과 실업, 주택, 교통, 환경 등 지역사회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의 힘을 모으고 정책개발을 지원했다.

경제위기 때 새로 생겨난 단체들은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 지역사회에 대한 정체성 형성과 협동의식 고취, 사회문화적 환경의 향상을 통해 사회 안정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이런 사회적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한 협력 네트워크는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냄으로써 지역경제의 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아무리 값싼 노동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갈등이 심하다면 기업들은 투자를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방정부 역시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의 재도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슈투트가르트시 경제개발청은 신규업체가 진출을 계획할 경우 입지선정 정보 제공에서부터 건축허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적·행정적 절차를 원스톱 서비스로 제공했다. 또 입주한 업체가 빠른 시일 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물론 교통망, 물류 등 신규업체가 필요로 하는 유관기관과의 네트워크 연결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슈투트가르트 지역의 여러 단체들의 활성화에는 기업들의 후원활동도 큰 몫을 했다. 예컨대 벤츠는 ‘후원과’라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지역의 여러 단체들을 후원했다. 후원의 개념도 시혜나 광고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에 통합되기 위한 아이디어를 스스로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변화했다.

요컨대, 슈투트가르트 지역경제가 위기상황에서 주저앉지 않고 재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노조와 시민, 기업, 지역사회와 지방정부를 가리지 않는 ‘참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주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모색했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참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혁신 능력을 높이는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경제위기 상황에서 슈투트가르트가 보여준 것은 기존의 주장을 내려놓고 지역사회와의 대화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슈투트가르트 지역에서 경제위기 때 시민, 사회, 문화 영역의 각종 단체들이 생겼다는 것은 경제위기를 계기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활성화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문화 활동이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안정을 통해 경제 영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슈투트가르트 사례는 세계화 시대의 경쟁에서 사회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슈투트가르트 모델 실험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슈투트가르트와 같은 혁신을 시도하고 있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가깝게는 광주광역시 지역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동차산업밸리’ 사업이 그것이다. 광주광역시는 자동차산업밸리를 조성해 제조업의 발전과 미래 성장산업에 기여하고 성공적인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 제조업 르네상스를 이끈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빛그린 국가산단과 진곡산단에 총 8,347억 원을 투입해 자동차 전용 임대 국가산단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래형 친환경 자동차 핵심부품 등을 생산할 ‘친환경자동차 부품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광주광역시는 조직개편을 통해 자동차산업과와 사회통합추진단을 구성했다. 지난해 11월 7일에는 자동차산업밸리 추진위원회도 출범시켰다.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완성차 공장인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을 중심으로 협력업체 200여 곳과 금호타이어 등 연관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연간 62만 대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산업은 광주 지역경제에서 부가가치의 39.4%, 고용의 22.2%를 차지하고 있어, 광주광역시의 전략산업이라고 할 만하다. 광주광역시 역시 이 점에 주목해 지역경제의 활로를 자동차산업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광역시는 자동차산업밸리 조성을 위해 슈투트가르트 모델을 접목하려 하고 있다. 노사가 노사관계 안정과 생산성 향상, 기술혁신을 통한 고용안정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광주광역시는 세금을 비롯한 각종 규제를 완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광주광역시는 연봉 4천만 원대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자동차산업밸리 조성을 위해서는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광주광역시는 현재 지역경총, 지역상공회의소와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등이 참여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노사민정협의회를 사회통합을 위한 소통의 장으로 운영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슈투트가르트의 지역경제 재도약 사례와 광주광역시의 자동차산업밸리 사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은 해당 지역사회에서의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슈투트가르트가 경제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노사와 지역사회를 망라한 지역 네트워크의 구성이었다. 광주광역시 역시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자동차산업밸리 사업의 핵심 과제로 사회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 극복을 모색하고 있는 철강산업 역시 이런 모델을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철강업체들은 포항과 부산, 함안, 창원을 아우르는 영남권, 당진을 중심으로 한 충청권 등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각 사업장 내에서 노사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위기 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각 사업장이 위치해 있는 지역사회에서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 위기 극복 방안을 이끌어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철강산업의 위기가 어느 한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철강산업 업종협의체를 통한 협력도 필요하다. 지역사회와의 대화를 씨줄이라고 한다면, 업종협의체를 통한 협력은 날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씨줄과 날줄을 엮어 철강산업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철강협회, 전국철강산업노동조합협의회 등 이미 구성돼 있는 단체들 간의 논의 자리를 마련하고, 여기에 고로를 운영 중인 대기업과 정부를 참여시켜 철강산업 재도약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한 가지 길이 될 수 있다. 전국철강산업노동조합협의회가 지난 3월 13일 워크숍을 열어, 현재 우리나라 철강산업이 당면한 상황을 공유한 바 있다. 이 같은 논의를 더욱 확장해 철강산업 업종협의체로 발전시켜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