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왜 필요 없는가?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왜 필요 없는가?
  • 참여와혁신
  • 승인 2015.05.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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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병기, 초등학생 공부에 어려움만 키운다
한글만으로도 원활한 의사소통 가능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앞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한글 옆에 한자가 적힌 교과서로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교육부에서 2014년 9월 23일에 2018년부터 적용할 새 교육과정 개정 방향을 발표하면서 교과서 한자 병기를 초등학교까지 확대하는 방침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과서 본문에 ‘초등학교(初等學校) 교과서(敎科書)에 한자(漢子)를 함께 적어 단어(單語)의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한자를 적겠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는 1970년부터 한글만으로 적었고 45년 넘도록 이어졌다. 중고교 교과서에는 한자를 병기할 수 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자가 점차 사라져 이제는 찾을 수 없다. 정부가 강제한 게 아니라 교과서 집필진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일어난 일이다.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진 것과 같은 현상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한민국 교육부가 이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고 한다.

교육부에 추진 근거를 추궁하다 보면 “그런 민원이 많았다”는 답에 이른다. 교육에 필요하다는 답을 제대로 내놓지는 않는다. 1990년대 말부터 새로운 사교육 분야로 떠오른 한자 급수 시험 시행업체들이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라는 단체를 만든 뒤 전직 국무총리들 가운데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앞세워 꾸준히 한자 병기나 한자 혼용 주장을 폈다. 이들의 입김이 먹힌 것이다. 사교육업자들의 입김에 이 나라 교육이 놀아나는 건 아닌가 싶어 더 큰 걱정이다.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문제를 놓고 토론하다 보면 이야기가 옆길로 새기 일쑤인데, 이는 사람들이 ‘한자교육이 필요한가’와 ‘한자로 적어 병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자교육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한자로 병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지금도 중학교부터 정규교과의 선택과목으로 정해진 한문 수업에서 이루어진다. 나도 중학교 시절부터 한자를 배웠고, 지금도 중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물론 예전보다 중요도가 떨어진 건 분명하다. 신문이나 문서에서 한자가 모두 사라졌고, 간체자를 사용하는 중국의 성장 때문이기도 하다. 전공 분야에서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으면 미리부터 열심히 익히는 게 좋고, 그렇지 않다면 중학교 때 배운 수준으로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한자교육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국민 대다수가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하여 그걸 강제로 바꾸려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거나 모든 한자어는 한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여기서 짧게라도 한자교육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허황된 주장을 짚고 넘어가겠다. 이들은 한자를 모르면 한자어 낱말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특히 소리와 글자가 같고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는 더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이 헛됨을 증명하기란 간단하다. 우리는 ‘치매’가 무슨 한자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의 뜻은 안다. 한자를 모르면 낱말 뜻을 몰라 의사소통이 어렵다니, 그렇다면 우리나라 만 15세 학생들이 어찌 국제학업성취도평가의 문해력 부문에서 세계 최상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건 한글만으로 적어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음에도, 이들은 말과 글의 기본 관계조차 부정한다.

혹시라도 동음이의어가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우리 생활에서 그런 일은 전혀 없다. 안중근 의사와 산부인과 의사의 ‘의사’가 같은 글자라서 헷갈릴 수 있다고 거품을 물어대지만, 그건 역사를 배우지 않은 아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고 한 번 가르쳐주면 그 다음엔 그런 혼동이 일어날 리도 없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한자마저 같은 수학의 ‘분자’와 과학의 ‘분자’는 어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낱말을 익히고 또 그렇게 사용한다. “흔들리는 배에서 배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다”는 말에서 우리가 ‘배’를 헷갈릴 이유가 있을까? 동음이의어는 그것이 고유어건 한자건 간에 상황과 맥락 속의 쓰임새에서 다 구별할 수 있다.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부모’나 ‘학교’처럼 낯익은 한자어는 그 말뜻을 이해하는 데에 한자 병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반면 ‘파충류’와 같은 전문용어들은 그 말을 이루는 한자도 자주 볼 수 없는 한자라 병기해도 도움이 안 된다. 대부분의 말은 병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어려운 말은 한자도 어려우니 병기해도 소용이 없다. 말로 풀어줘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걸 병기하여 어려움만 키우는 꼴이다.

게다가 한자 병기는 책 읽기를 방해하는 함정일 뿐이다. 한자를 읽을 줄 알아야 뜻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은 문장 전체를 읽기보다는 한자 함정에 빠져 바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자를 모르는 아이들은 병기된 한자 함정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읽기의 맥이 끊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위험한 게 바로 한자 함정이다.

한자는 낱말 뜻 이해의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다. 한자를 꼭 쓸 줄 알아야 하고,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한자가 있고 이런 말은 이런 한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졌겠네 하는 정도를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이면 그런 보조수단으로서 충분한 노릇을 한다. 한문 고전을 읽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이 정도 수준에서 충분히 공부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한글만으로도 매일매일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세상에 한자를 교과서에 병기하자는 발상은 과연 누구를 위해 나왔을까? 아이들일까, 사교육업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