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밝으면, 그늘도 넓은 법입니다
빛이 밝으면, 그늘도 넓은 법입니다
  • 박상재 기자
  • 승인 2015.06.05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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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엘지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지부장을 만났습니다. 유플러스지부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부장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와 비교해 지부장의 얼굴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삭발한 머리카락은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했고, 이전보다 조금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후련함보단 조금 찌든 표정이 걱정되긴 했지만, 6개월 넘게 진행된 파업이었으니 편안한 표정일 수만은 없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모든 것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이전엔 피곤해도 희망이나 도약의 기회를 엿보는 눈빛이 보였다면, 이제 그의 눈빛은 조합원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본인에 대한 자책감, 장기투쟁으로 이끈 희망연대노조에 대한 원망 등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파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결과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지다 보니, 일각에선 이전보다 나아진 게 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지부장이 짊어져야 할 책임으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기대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장기파업이 진행되며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부부와 자녀관계는 점차 멀어졌다고 합니다. 아직 경찰 조사를 받을 게 세 개나 남았고, 빚만 쌓인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딜까요? 아니, 케이블 설치기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요? 투쟁 종료의 기쁨은 적어도 그에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난 얼마 후 김진숙 홈플러스노조 서울본부장을 만났습니다. 최저임금위원회에 근로자위원으로 들어가 현장 목소리를 전달할 그녀에겐 반대로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선 이런 생기가 어떻게 작용될지 기대가 됩니다.

김진숙 본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2년여 간 마트에서 함께 일했던 ‘여사’님들의 근황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만 해도 묵묵히 일만 하시던 분들이 불과 2년 만에 관리자의 부당한 태도에 저항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얼마 전 취재를 나갔을 땐 직원 유니폼만 입던 당시 신입 여사님이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집회장에서 ‘투쟁’을 외치다가 저와 눈이 마주쳐 둘이서 한참을 신기해했습니다.

한 가지 더. 제가 친하게 지내던 마트 관리자가 노조 탄압에 앞장 선 직원이 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나름 ‘호방’한 성격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뒤에선  여사님들에게 식사 도중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비정규직의 반란’으로 여겨졌던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퍽퍽한 생활고에 짓눌린 채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형마트에서 숨죽인 채 지내던 여사님들은 이제 당당히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고, 항상 당당하던 마트 관리자는 노조 탄압의 주범으로 많은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엔 이면이 존재하는 법이고, 빛이 밝으면 그늘도 짙고 넓은 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고 실수를 연발하며 신입기자 티를 못 벗는 기자가 보는 세상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세상일이 다 그렇지’라며 달관하지 않고, 항상 많은 것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철부지 기자의 무지함을 덮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