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멈춰 있고 텔레비전은 작동하지 않았다

[골목예찬] 서울 황학동 만물시장

2013-02-06     이가람 기자

‘장은 오래 묵어야 맛있고, 친구는 오래 돼야 좋다.’
세월이 지날수록 어떤 물건들은 그 진가를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 취급을 당할 케케묵은 잡동사니들이 모이는 골목이 있다. 옛 사람의 정이 그립고 고즈넉한 맛이 담긴 골동품들을 찾는 사람들에게 황학동 만물시장은 천국이다.

1970~80년대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문정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는 황학동 만물시장도 비껴갈 수 없었다. 마트나 백화점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게 황학동은 낯선 지명이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탄 물건들, 황학동에서도 이제 골동품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은 찾아보기 드물다.

‘만물’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란 뜻이다. 만물시장엔 물건만큼이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가 물건에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물건이 새로운 주인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는 만물시장 상인들이 있다.

성동공업고등학교 앞엔 주방용품, 신발 가게들이 있다. 신발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면 왼편에 허름한 골동품들을 모아 놓고 파는 골목이 나 있다. 가게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40년 전만 해도 리어카를 이끌고 나와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건물들이 들어서고 하나둘씩 상인들이 모여 이 골목이 형성됐다. 그들이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고물을 정비하고 옆 가게 주인과 담소를 나누느라 할 일이 많다.

골목 입구 옷가게는 이 골목 사랑방이다. 새색시처럼 곱게 화장한 주인 아주머니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생강차 한 잔 하고 가” 라며 붙잡는다. 못 이기는 척 생강차를 받아들었다. 철사 줄에 달아 놓은 털모자, 옷걸이에 걸린 외투들은 골목 상인들의 패션 트렌드를 대변한다. 꾸미기 좋아하는 아주머니답게 꽃 장식들이 가게 군데군데 달려있다.

“옛날엔 골동품 가게가 많았는데 지금은 줄었어. 텔레비전보고 구경 온 손님들도 실망해서 돌아간다고. 그런 거 보면 속상해.”

정말 골동품 전용 가게는 몇 군데 없었다. 김경구(67) 아저씨의 ‘벨소리’가 살아남은 가게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 때 썼다는 ‘모시모시’ 전화기부터 미닫이문이 달린 텔레비전, 시계, 타자기 등이 진열 되어 있다. 시계는 멈춰 있고 텔레비전은 작동하지 않았다.

“골동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서 고치지 않아.” 

당신은 나의 동반자

손님이 없는데도 가게 문 밖에서 청소기를 고치는 아저씨가 계신다. 승원전자 대표 정상철(70)씨다. 가게 앞에 다가가자 옆 가게 주금안(65) 아주머니가 더욱 흥이 났다. 아저씨는 묵묵히 청소기 수리에 집중하신다. 허연 먼지와 기름때가 검정색 외투를 덮었다. 장갑도 없이 고치느라 손가락이 트다 못해 갈라졌다. 수리에 방해가 될까 손톱은 바짝 잘랐다.

“아저씨는 약주 안 잡수시고 담배도 안 펴.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니까 아직까지 장사하시지. 성실하다고 소문나신 분이야.” 남편 자랑에 신이 난 아주머니는 한참 뒤에야 부부사이임을 밝혔다. 아주 애부가가 따로 없다.

“우리 아저씨가 깨끗하게 새것처럼 만들어 주시니까 단골들도 있지. 식당하려는 사람들이 중고 사러 잘 와. 밥솥 없이 밥 만들겄어(웃음).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들도 많이 와. 알뜰 시장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도 오고.”

청소기를 다 고친 아저씨가 서랍 속에서 무언가 꺼내신다. 30년 된 미제 연장이었다. 그동안 이것으로 고쳐온 전자제품들은 셀 수없이 많다. “시대가 변하면서 손님들이 원하는 게 바뀌니까 우리가 맞춰나가야지.” 하지만 이 연장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저씨 곁에서 40여 년을 함께한 아주머니가 승원전자를 지켜온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노부부는 서로가 인생 최고의 동료이자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