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도 이겨내는 단단한 삶의 뿌리
말기 암도 이겨내는 단단한 삶의 뿌리
  • 백민호_파이뉴스 기자
  • 승인 2006.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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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담는 도시락에는 ‘목숨’이 담겨 있다

▲ ⓒ백민호 파이뉴스 기자 mino100@pimedia.co.kr

“아프고 나니 다른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그전에는 내 삶이 고달파서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보여요. 돕고 싶은 사람은 너무 많은데 돈으로 도울 수 없으니 몸으로 도와야죠.”

대전 ‘사랑의 도시락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박병두(51·가명)씨. 근 20년 동안 건축현장에서 일한 그는 2003년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수술도 어려웠다. 의사는 “3개월에서 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며 남은 시간 가족과 함께하며 편안히 삶을 정리할 것을 당부했다.

“담담했어요. 정말, 담담했어요. 가슴이 막막하지도 않고…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도 않고…”

▲ ⓒ백민호 파이뉴스 기자 mino100@pimedia.co.kr

두 딸을 향한 기도
지난 세월이 병에 대해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박 씨의 아내는 1997년 뇌종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막내딸을 임신했을 때 결혼 전 앓았던 뇌종양이 재발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버리고 아내를 살려야 한다’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생명을 버렸다. 수술을 받다가 아내는 과다출혈을 했고 4년 여의 투병생활을 뒤로 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금슬이 좋았던 부부. 싸울 일이 없었다. 평화롭고 단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13년 전, 큰딸 정희(16·가명)에게 닥친 사고 때문이었다. 당시 두 살이었던 정희가 이웃집 아이들과 싱크대 위에서 놀다가 뒤로 넘어졌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점점 둔해졌고 이후 정희는 정신지체 4급 판정을 받았다. 현재 정희는 장애인학교에 다닌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박 씨가 병원에 있는 사이 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정희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스스로 식사조절이 안 돼, 중1인 여자아이가 70kg이 넘게 나간 적도 있었다. “집에서 언니와 소꿉장난을 하고 잘 놀아주는” 작은 딸 선희(13·가명)는 아직까지 어리광을 부리며 막내티를 낸단다.

▲ ⓒ백민호 파이뉴스 기자 mino100@pimedia.co.kr

“저는 알아요. 제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박병두 씨는 ‘사랑의 도시락’ 봉사활동을 통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고 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아이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정을 알고, 이웃에 사는 이가 월드비전 대전 한밭종합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도시락을 집으로 꼬박꼬박 배달해준 게 계기였다.

“낯을 가리는 정희가 집에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분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정도로 고마웠나 봐요. 제가 없는 사이 주변 분들의 도움에 더욱 감사했죠.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저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차례 결식아동과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사랑의 도시락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200개가 넘는 도시락을 씻고, 닦고 밥과 반찬을 정성스레 담는다. 도시락 지원을 받는 가정에서 도시락 봉사를 하는 흔치 않은 일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자원봉사자의 손이 모자랄 경우 하루 종일 일할 때도 있다.

겨울이면 차가운 물로 설거지를 해야 하니 손가락 감각이 없어지고, 여름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퍼 담으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활동, 3개월이라던 의사의 예상과는 다르게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몸속의 종양도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 상태다. 목숨을 다해 사랑의 도시락을 담고 있는 그에게 ‘생명력’이 깃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끝까지 살아야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큰 아이 문제며 마냥 말괄량이인 막내 딸, 그리고 제 앞에 놓인 걸림돌까지…, 할 일이 많습니다.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저는 알아요. 제가 살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몸이 더 좋아지면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해야 겠다”며 운전면허까지 딴 박병두 씨.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밝게 살아가는 그에게서 삶의 단단한 뿌리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