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사 꿈을 꾸다
아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사 꿈을 꾸다
  • 홍민아 기자
  • 승인 2015.09.1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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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10명 중 8명은 여성
북한 아이들을 위한 인권 문제 심각
[사람] 여성 탈북 노동자

올해 6월 기준으로 집계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넘어오는 탈북민 중 10중 약 8명이 여성인 것으로 집계됐다. 평균 연령대를 보면 30대가 가장 많고 20대, 40대, 10대 순이다. 해마다 여성 탈북민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에는 북한 남성들의 군복무기간이 10년에 달하는 이유가 꼽히기도 하지만, 90년대 식량 배급이 끊기고 장사활동에 나선 여성들이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경제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탈출하는 경우도 많고,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인식이 바뀌면서 탈출을 결심하게 되는 여성들도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양강도에서 중국으로 탈출했고,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는 이제 4년차가 된 박진주(가명, 20대 후반) 씨도 평양에서 돌격대 활동을 하면서 지도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결국은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 통일교육원
북한에서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머니는 전문대학교수, 아버지는 농업대학 교수를 하셨다. 남한에 와서 교수 집안이라고 하면 잘 사는 줄 아는데, 그렇지도 않다. 대학 교수지만 돈을 더 받거나 그러지 않고, 똑같이 배급을 받았다. 92~3년도, 내가 6살 때쯤 고난의 행군(90년대 중ㆍ후반 북한이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 등의 어려운에 처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당 구호)이 시작됐다. 4가족 기준 한 달에 쌀이 5kg만 배급됐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 그래서 어머니가 교수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92년에 기차에 치여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몇년뒤에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고아원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꿈은 뭐였나?

“북한은 17살까지 의무교육이다. 유치원 1년, 인민학교 4년, 중학교 6년을 다녔다. 나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부모님도 일찍 돌아 가셔서 그림의 떡과 같았다. 북한은 대학등록금의 개념은 없지만, 돈이 없으면 못 다닌다. 이야기 듣기로는 한 달에 얼마씩 돈이 필요한데 교수님한테 잘 봐달라는 식으로 예물을 바친다. 공부를 못해도 잘 보이면 성적을 높게 주거나, 4년 학교를 꼭 안 다녀도 돈 주면 대학졸업증도 딸 수 있다.”

배급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고, 먹고 살기 위해서 성인이 된 후에는 무슨 일을 했었나?

“돌격대 생활을 2년 했다. 보통 아침 8시에서 저녁 8시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했다. 북한에는 아파트나 건물을 지을 때 장비가 많지 않다 보니 기계들이 하는 일을 사람들이 다 해야 했다. 군대에는 그런 일을 하는 조직이 따로 있고, 일반 청년들을 모아서 돌격대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전국을 합치면 10만 명도 넘을 꺼다. 3년을 일하면 당증 준다는 이야기에 회사원들도 돌격대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당원은 시켜주지 않는다.

도로도 사람이 내고 건물도 사람이 짓는다. 나도 통나무도 지고 나르고, 흑마대도 20키로 짜리를 하루에 5~60번씩 날랐다. 나중에 취사원으로 일했는데 하루에 세시간씩 자고 일했다. 물 긷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35명 음식 준비하는 시간만 3시간이 걸렸다.

돌격대에서 따로 보수를 주지는 않지만 대신 세끼 밥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준다. 힘들어도 다른 곳은 갈 데가 없었다. 북한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이미 시장 개념이 생겼다 엄마들이 장사에 뛰어든 경우도 많다. 남자들은 회사에 나가긴 하지만 정부에서 따로 받는 건 없다. 그냥 각각 회사가 자기들이 알아서 장사하는 개념? 고난의 행군 지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북한에서 제일 손 꼽히는 직업이 취사원이다. 그러면 최소한 쌀이나 음식을 집에 가져갈 수는 있으니.”

돌격대에서의 생활이 힘들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나?

“꼭 그렇진 않다. 평양에서 돌격대 일을 했는데 난생처음 에어컨 달린 버스를 탔다. 평양은 고향이랑 완전 다른 도시였다. 돌격대를 환영 해 준다고 김정일이 없는 돈을 들여 특별 버스를 보냈다고 했다. 우리 어릴 때는 김일성이 죽만 먹고 쪽잠 자면서 현장지도 다닌 다고 했고 그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평양가서 보니 진짜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 나무가 무성한 특별 별장들이 많더라. 다 김정일, 김일성 별장이다. 그런 곳을 볼때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그냥 미래가 안 보였다.

그러다 휴가를 받아서 고향에 갔는데 처참했다. 내가 너무 한심한 거다. 힘들게 일하다 와도 고향에서 반겨 맞아줄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고향이 감옥 같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자는 생각으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 넘어가서 장사밑천이라도 벌어 오려고 했다. 남동생 군대 가고 6개월 정도 있다가 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다 운 좋게 선교단체 도움을 받아서 1년 동안 중국, 동남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뭐가 가장 하고 싶었나?

“2012년 9월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한달간은 적응하느라 이곳저곳 다녔다. 그리고 10월부터 부산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일을 했다. 하루에 11시간씩 일 했는데 80만 원밖에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일한 것에 대해 보수를 받은 것이 처음이어서 좋았다. 북한에 아직 남동생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돈을 마음 편히 못 썼다. 북한에서 동생을 데려오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 아직 연락이 닿지 않지만, 남동생이 군대 간 지 5년이 지났으니 좀 더 기다려 보고 있는 상태이다.”

지금은 어떻게 생활하고 계신지?

“ 작년에 대학에 진학해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낸다.”

사회복지를 선택한 이유는?

“지금 배우는 게 조금 어렵다. 외래어들도 많고, 그런데 복지를 꼭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도 어릴 적부터 고아원 생활을 해 봐서 아는데, 북한 자체가 애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의무교육제도는 있지만, 지금은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북한 아이들 중에는 한글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들을 보호해 줄 제도, 사회복지라는 개념이 없다. 성인이 된 이후에 돌격대에서 일을 하면서 봤는데, 일하다가 다쳐도 치료를 제대로 해 주는 경우가 없다. 거기서 복지제도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통일이라도 되면 그런 애들을 좀 보살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오히려 공부보다는 학교에서 사람관계가 좀 힘들다. 젊은 학생들이 아직은 북한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니 우리도 다가가기 어렵고, 나이차이도 좀 있고.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올해 휴학을 할 까 고민도 했지만 잘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