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품은 가위질소리, 노동이 예술로
세월 품은 가위질소리, 노동이 예술로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10.0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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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삼대가 가위를 잡다
손님 몸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배려의 노동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 만리재 성우이용원(1)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은 노동의 시공간을 찾은 르포르타주다. 산책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노동이 오랫동안 머문 공간과 그 공간을 지키는 인물을 만나러 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여행이다. 이 산책은 노동의 역사와 함께 노동의 인문학을 찾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여행지는 1927년 문을 연 성우이용원이다.

 ⓒ 이현석 객원기자

노동이 예술이 되어 살아나는 공간

‘사락사락 스륵스륵스륵 사락 사악사악사악’

새벽이슬 머금은 풀밭에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릴 닮았다.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울리는 가위질소리.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처럼 머리카락을 건반 삼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1악장을 연주한다. 오페라하우스 VIP석 대신 세월의 더께로 충만한 의자에 앉아 삼대에 걸친 여든여덟 해의 솜씨가 고스란히 손끝에 묻어난 명연주자의 가위질소리는 이발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아직 초가를 이고 있는 공간에 머문 이발사의 가위질이 빚어낸 영롱한 화음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한가위를 열흘 앞둔 가을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촉촉한 눈동자처럼 맑은 가을하늘 아래 공덕동에서 만리재를 오른다. 공덕로터리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빌딩 사이로 직선으로 널찍하게 뚫린 길 대신 공덕시장 족발가게와 전집이 있는 굴곡진 만리재옛길을 따라 고갯마루에 선다. 만리재 아래와 위는 한 세기의 역사가 흩뿌려져 있다. 고개를 오르면 현대는 근대를 향해 시간을 거스른다. 사방이 번쩍이는 유리로 뒤덮인 건물로 들어가는 목에 신분증을 건 와이셔츠의 노동자들을 지나 먼지 낀 환풍기 구멍으로 한 줌 햇살을 받으며 재봉틀을 돌리는 봉제 노동자를 만난다. 이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키보드를 두들기는 노동과 재봉틀을 밟는 노동, 신성장 산업과 사양 산업, 지식 노동과 기능 노동. 어느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는 노동자가 인간의 창조적 사고와 능력을 발휘할까. 컴퓨터의 전원을 끌 때와 재봉틀의 전원을 끌 때 누가 자신의 하루 노동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두 노동의 시간 사이에는 숱한 역사의 풍랑이 있었다. 오일쇼크도 있었고, 거품경제도 있었고, 아이엠에프 구제 금융도 있었다. 서로 상이한 시간을 거쳐 온 공간에서 노동을 하며 오늘을 사는 두 노동자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다를까, 같을까.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이 고갯길을 따라 이어진다.

리처드 세넷이 쓴 『장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현대 산업에서 숙련 기술공들은 기계를 만지며 살아가고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살 수 있지만, 기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니 기술진보가 늘 노동을 지배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 이현석 객원기자

기술의 발전은 노동자의 일(자리)을 잡아먹었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돕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티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자동화와 로봇화는 인간을 일터에서 내쫓고, 일터 안에서 인간의 지위를 기계의 보조역할로 전락시켰다. 인간의 생존권을 쥐고 있는 자본은 인간을 좇는 게 아니라 이윤을 좇아 흘러 다닌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에게 형벌과 같다. 청년들은 바닷물처럼 세계를 넘나드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침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스펙’을 더 높게 쌓아올려 기업에 간택 받으려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청년실업은 이미 전 지구적 문제다. 고스펙으로 무장한 창조적 능력이 필요한 일자리는 극소수다. 현재 존재하고, 새롭게 양산되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인간이 더욱 단순화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갈망과 무관하게 세계를 바람처럼 물처럼 떠도는 신자유주의 강요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새로운 빈곤』 마지막 문장을 패트릭 커리의 말로 대신했다. ‘집단적인 자발적 소박함이 집단적 궁핍화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대안이 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지구적으로 안고 있는 노동의 위기, 양극화의 문제, 빈곤문제는 경기침체가 원인이 아닐 수 있다. 돌파구는 인간의 예상과 정반대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성우이용원을 찾아 만리재옛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부역으로 가는 큰 길을 가로지르면 만리시장이 있다. 본래 이곳은 큰고개시장이었다. 애오개는 작은고개라 불렀고, 만리재는 높고 험하다 해서 큰고개라 불렸다. 큰고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큰고개시장을 진고개시장이라고 했다. 주변에 계곡이 있어서 그런지 땅이 늘 질척거렸다. 그런데 이 만리시장에서 효창공원으로 가는 질척거리는 언덕배기에 갑작스럽게 신작로가 생겼다. 만리재 토박이들은 이 신작로를 ‘박지만길’이라고 부른다. 박정희 대통령 외아들 박지만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입시 대신 ‘뺑뺑이’로 추첨하여 중학교를 가는 제도가 생겼다. 박지만의 미진한 성적 때문에 생긴 제도라는 말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박지만은 뺑뺑이로 만리시장 바로 옆에 있는 배문중학교에 배정됐고, 이에 맞춰 급작스럽게 자동찻길을 만들었다. 때를 맞춰 큰고개시장도 2층 벽돌로 지은 만리시장으로 변신했다. 눈이 내리면 비료포대를 엉덩이에 깔고 미끄럼을 타던 가팔랐던 언덕은 대통령 아들의 자가용 등하굣길을 만들기 위해 굴삭기가 동원되어 경사가 완만해졌다. 만리시장과 배문중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박지만길을 오르다 왼쪽 골목으로 살짝 꺾어지면 ‘우’자가 아래로 쳐져 뭔가 엉성한, 그래서 정겨운 성우이용원이 있다.

살아있는 역사박물관

 ⓒ 이현석 객원기자

성우이용원 나지막한 계단 좌우로는 여러 빛깔과 모양의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화초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오늘은 노란 국화가 웃고 있다. 철마다 다른 꽃이 이용원 입구에 서 있을 거다. 사람의 손끝이 닿지 않은 풀숲처럼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자라며 낡아가는 집을 지키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밑에는 1950년대에 마지막으로 올렸을 볏짚으로 이엉을 한 초가지붕이 아직도 지붕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아래에는 수수깡과 함께 황토를 이겨 바른 흙집의 흔적도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과 산업화의 역사가 왼쪽으로 살짝 기운 성우이용원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칠이 벗겨진 낡은 나무창틀과 너덜해진 네 귀를 지닌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하다. 창문 아래로 수도꼭지가 있고, 푸른 고무호스가 내려진 시멘트를 발라 만든 물통에 앞에는 타일로 만든 세면대가 있다. 드문드문 깨진 타일에는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세월이 함께 있다. 세면대 앞에 놓인 두 개의 푸른 플라스틱 물뿌리개는 머리를 감길 때 쓰는 샤워기이자 세면할 물을 뜰 때 쓰는 바가지 역할을 한다.

성우이용원은 역사박물관과 다름없다. 1927년 처음 문을 연 이곳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이남열 씨가 3대째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젖을 떼고, 걸음마를 배운 이남열은 칠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둘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이 있다. 일제강점기를 버텨낸 성우이용원 식구들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생채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인민군은 만리재를 넘어 서울로 진격했고, 인천상륙작전을 벌인 미 해병대도 만리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처 피난을 가진 못한 가족들은 만리재에서 인민군과 국군을 번갈아 맞이하며 이념의 칼날에 맞았다. 그래서 지워지지 않은 ‘연좌제’라는 흉터가 생겼다.

“나 살아오면서 내 형제들 취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다 취직들이 안돼요. 우리가 육이오 때 피난을 못 갔어요. 인민군한테 협조 안 한 사람 어딨어. 안 하면 죽는데. 전쟁 끝나고 나니까 연좌제에 걸려.”

외할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일하던 이발사가 사위가 되어 성우이용원을 물려받았다. 형들은 이발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다섯째인 이남열만이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었다. 형들은 취직이 되지 않았다. 연좌제 때문이다. 결국 위험한 길로 빠져들었다. 큰형은 후암동 남산 일대를 주름잡은 주먹패의 행동대장을 하다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자 군대를 자원해 들어갔다. 하지만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 장교를 때려 영창을 가는 바람에 ‘짝대기 두 개’를 달고 제대를 했고, 취직을 하지 못하자 남들이 꺼려하는 고압선 철탑공사장에서 일하다 추락사를 했다. 둘째 형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다 일찍 세상을 떴다. 결국 성우이용원은 이남열의 몫으로 남았다.

고등학교를 마친 이남열은 1967년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하는 일을 배우며 이용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밥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옛날엔 진짜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어.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형들을 보며 이남열은 이발을 배웠을 것이다. 연좌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형들의 삶 속에서 충분히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기는 그른 노릇이라는 걸 몸으로 깨친 이남열은 남에게 고용되지 않고 내 기술로 살아야 한다는 경각심이 들었을 테다.

내가 의자에 앉자 이남열은 화장지를 끊어 반을 접어 내 목둘레에 감은 뒤 분홍수건을 두르고 흰 천으로 내 몸을 감싼다.

“목에 화장지는 왜 둘러요?”

내가 물었다.

“머리카락이 덜 들어가요. 이걸 두르면 거의 안 들어가. 약간 귀찮더라도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용사들이) 잘 안 해.”

모든 노동의 과정에는 이유가 있다. 목지를 두르는 까닭도 이발을 하는 손님의 몸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배려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경제적 노동’인데, 이남열은 이 ‘경제’의 논리를 무시한다. 자신의 고객은 단순히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수적이지 않은 공정이라고 불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윤을 중심에 놓으면 꼭 있어야 할 것이 아니면 불필요한 것, 쓰레기처리장으로 분리수거할 것으로 취급한다. 소수의 정규직을 남기고, 기간제, 시간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듯.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목지를 두르는 공정은 비생산적, 비경제적 방법이다. 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있으면 드라이기 바람으로 휙휙 불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래도 남은 것은 머리를 자르는 일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폐기물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