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집념으로 깨우친 기술은 밥이자 명예다
고집스러운 집념으로 깨우친 기술은 밥이자 명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10.0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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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정신과 안목을 전수받다
반세기 노동 속에 길든 낡은 빗만이 만드는 머리형이 있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 만리재 성우이용원(2)

성우이용원에서는 머리를 비누로 감긴 뒤 사과식초를 떨어뜨린 물로 헹군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마지막 다듬기를 할 때는 감자가루(전분)를 이용한다. 계면활성제나 파우더에 있는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이남열의 노동을 지켜보면 그의 일터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엮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이현석 객원기자

남하는 거 따라하면 자살행위다

이남열에게 머리카락을 맡기면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빠른 속도로 유행하는 스타일의 머리모양을 웅웅웅 또는 싹뚝싹뚝 만드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고객과 이발사가 소통한다. 머리형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돕는다. 잘라야 할 부분과 남아야 할 부분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찾아, 그 경계에 눈에 보이지 않게 자리한 틈을 찾아, 가윗날이 살그머니 스쳤다 나오는 듯하다. 그의 가위소리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1악장을 들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현석 객원기자
“요즘은 기계로 머리모양을 만들고 다듬잖아요?”

“그것은 대만식 방법이에요. (이용)학원하고 교도소 (이발)방법이지. 내가 아는 방법은 아니야. 나는 고집만 피우고 살아. 남하는 거 안 따라가요. 자살행위야. 남하는 거 따라하면 자살행위, 죽은 목숨이야. (다른 방식) 안 해봐. 신경도 안 써. 남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 안 해.”

자신의 노동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늘 주변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에 자신을 갖은 이는 주변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직시한다. 이남열은 시대와 무관하게 이 공간을 지켰다. 오로지 자신의 노동과 싸우며. 유행 따라 돈 벌이 따라 쫓아다녔다면 성우이용원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남열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술과 싸우는 이다. 자신의 이발 기술을 찾는 데만 37년이 걸렸다. 37년을 갈고 닦은 끝에 곱슬머리를 다루는 법, 웃머리를 깎는 법과 같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다. 삼대에 걸친 백년을 이룬 기술은 단순히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법을 아버지가 익히고, 아버지 방식을 이남열이 따르면서 나온 게 아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기술은 가위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깎느냐가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손님들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를 하니, ‘그럼 네가 깎아봐’였다.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를 하며 사람의 머리형과 얼굴에 맞는 머리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눈에 익혔을 것이고, 그렇다면 고객의 머리스타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창조할 것인가는 아들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아버지는 이남열이 깎은 머리가 손님에게 욕을 먹든 말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 교육법은 오늘의 이남열을 만들었다. 단순히 기계를 잡고 머리 모양을 반복해서 익히는 기능이 아닌,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맞으며 그 사람에게 자연스럽고, 그래서 꼭 알맞은 머리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한 것이다. 그렇다, 안목이다. 노예의 노동에서 벗어나려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안목을 지녀야 한다. 안목은 내 노동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고, 내 노동의 현상이 아닌 본질을 찾을 수 있는 눈이다.

남성들이 미용실을 찾으며 이발소는 하나둘 동네에서 사라지고, 인간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아이엠에프를 거치며 이발소는 물론 미용실도 운영이 힘들어졌다. 헤어숍과 남성전용 미용실이 만들어지며 변신을 거듭했다. 한편에선 유명 헤어디자인을 내세운 체인점이 동네 이미용업소를 잠식했다. 반면 성우이용원은 아이엠에프를 거치며 유명세를 탔다. 남들이 어렵다 했지만 이남열의 사람을 존중하는 이용기술은 그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너져 가고 뒤틀린 이용원 출입문은 더 많은 이들이 오가며 닳아져갔다. 한 눈을 팔지 않고, 돈벌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동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려한 옹골진 노동의 뚝심이 빛을 발한 거다.

새 것이 아니라 노동에 길들여져야

성우이용원에 자리한 이발도구는 할아버지부터, 혹은 아버지 때부터 길들여져 왔다. 이가 부러지고, 대가 끊긴 드라이할 때 쓰는 빗은 50년 동안 함께 했고, 앞으로로 함께 할 것이다. 빗이 제 역할을 하려면 최소한 칠 년은 길을 들여야 작은 몫이라도 할 수 있다. 이남열은 새 것이 좋은 게 아니라 노동의 과정에서 길들여진 게 좋은 것이라고 한다.

 ⓒ 이현석 객원기자

“왜 이 빠진 빗을 씁니까? 좀 바꾸시지.”

내 물음에 이남열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바꿀 수가 없죠. 바꾸면 머리 깎는 데 지장이 많아요. 이 빗을 관리하는 것도 기술이에요. 새 빗으론 이런 식(웃머리가 자연스럽게 찰랑이며 내려오면서 머리카락의 층이 진 것을 찾을 수 없게)으로 못 깎아. 이거 길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저 빗 몇 십 년 된 거야. 저 드라이할 때 쓰는 빗은 50년 됐고. 이게 (대가) 부러져 쇠심 집어넣고 실로 감아 접착제로 붙여 쓰는 거잖아. 이걸로 해야 드라이가 잘 돼. 이건 20년 됐는데 (드라이하기엔) 아직 길이 안 났어.”

“그게 그건 거 같은 데요.”

내 눈에는 20년 된 빗이나 50년 된 거나 폐기물처리장에 당장 가야 할 듯했다.

“아냐. 빗을 짝 빗잖아요. 싹 들어가야 돼. 이건 아직 안 들어가. 십년까지는 (빗 끝에까지 착 감기며 바짝) 안 들어가. 그러니까 오래까지 놔 둔 이유가 있다고.”

다 이유가 있었다. 그저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빗 하나도 그 쓸모를 제대로 갖추려면 십년 넘게 노동의 손에 길들여져야 한다. 문득 이발사의 빗보다 대우를 받지 못하는 요즘 노동(자)이 떠올랐다. 더 빠르고,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세상을 향해 누구나 할 것 없이 달려왔다. 그게 산업화였고, 현대화였고, 글로벌시대였고, 세계화였고, 신자유주의였다. 이제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경쟁에서 어떻게든 홀로 살아남는 ‘능력자’를 꿈꿀 게 아니라 우리시대의 노동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우리의 노동이 가치를 찾는 것인지, 고용이 보장되면 우리의 노동이 아름다운 것인지, 대기업에서 일하면 행복한 노동자인지, 공무원이 되면 안전한 삶인지 되물어야 한다. 그 답을 어렴풋하게 성우이용원을 지키는 이남열의 노동과 그와 함께 세월의 더께를 쌓아가는 노동도구에서 헤아린다.

가윗날을 가는 이발사

이남열은 자신의 가위를 갈지 못하는 이발사에게는 머리를 맡기지 말라고 한다. “연장을 제대로 갈아야 기술자가 되는 거예요. 가위도 못 가는 놈이 무슨 이발을 해.”

선반을 배울 때 바이트 날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작업 속도와 질이 달라진다. 날이 제대로 갈리지 않으면 오차 범위 내의 정확한 형상을 만드는 데 애를 먹는다. 또한 만들고자 하는 제품의 형상에 따라 날을 달리 갈 줄 알아야 한다. 날카롭다고 날이 제대로 갈린 게 아니다. 제대로 갈린 날은 오랜 작업을 해도 뭉개지지 않는다. 잘못 갈면 몇 번 쇠(재료)에 닿기만 해도 날이 뭉개져 날 갈기만 하다 작업시간을 보낸다. 날을 자신이 갈아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는 무얼까? 노동도구를 노동자가 장악하고, 명령하지 않는 순간 노동자는 노동의 주체가 아닌 부품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짙다는 경고가 아닐까.

경영학을 배울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테일러는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솔직히 당신들의 두뇌를 사용하기 위해 당신을 고용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인간의 노동행위를 기계동작처럼 산술처리를 했다. 가장한 적합한 동작은 최소의 움직임이고, 그 최소의 움직임이란 가장 빠른 속도를 말한다. 어찌하면 인간의 신체에 맞게 생산을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을 기계처럼 주문한 명령어만 수행하게 해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을 나오게 할지를 찾았다. 컨베이어벨트도 노동자에게 생각하는 노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작업 노동자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손을 들거나 벨을 눌러, 혹은 라인 책임자를 큰소리로 부르는 행위까지가 생산자의 몫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앞과 뒤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조차 온전한 주인의 역할을 빼앗겼다.

가위를 갈 줄 알아야 된다는 이남열의 높은 목소리가 다른 이용기술자를 무시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기초부터 튼튼히 배워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노동자가 되려면 자신이 하는 일의 주인이 되라는 호통처럼 들렸다. 자신의 노동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라는 가르침이다. 학원에서 반복해서 익힌 대로 현장에서 볼트 조립하듯 고객을 마주하고, 머리카락을 손대지 말라는 뜻이다. 머릿결에 따라 쓰는 가위가 있고, 그 가위의 날은 그 머릿결과 만났을 때 다투지 않고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날이 꼭 잘라야 할 그 자리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닿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노동의 순간은 머리 자르는 기술에 있지 않고, 자신의 노동 전체를 주관하는 주인의 마음가짐과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은퇴 같은 건 없다”

 ⓒ 이현석 객원기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노동윤리가 먹히는 때가 아니다. 취업을 못한 까닭은 빽이 없어서고,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한 죄로 삼포세대라 여기는 세태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가만 보니 열심히 알바 뛰며 취업 준비하는 이보다 부모 잘 만나 일하지 않으며 사는 이가 더 잘 먹고 산다는 불온한 시선이 노동시장을 감싸고 있다. 이공대학은 취업은 하기 쉬운데 장시간 노동, 과중한 업무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고, 문과대학은 일자리 자체가 천연기념물이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나는 개같이 일해 돈 벌거라고 다짐하며 취업준비에 열을 올린다. 인간의 노동이 ‘개같이’ 됐단 말인가. 선악과를 따먹은 형벌이 이토록 가혹한단 말인가. 생존의 서바이벌과 같은 일자리 전쟁에 노동의 의미를 찾는 일은 배부른 소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개처럼 일해 보면 안다. 노동은 개처럼 할 수 없다는 걸.

이남열의 하루는 새벽 6시 30분께 시작한다. 성우이용원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면 아침 8시다. 저녁 9시 30분까지 이발소 등은 꺼지지 않는다. 그의 손님들은 대부분 단골이다. 그한테 한 번 머리를 자르고 나면 머리를 잘 자른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게 자연스럽게 잘려진 머리스타일은 한두 달이 지나 머리카락이 길어도 지저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보름만 지나도 머리 스타일이 흐트러져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가 자르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잡아간다. 그게 이남열이 37년 만에 깨달은 기술이다. 그 기술은 예순여섯이 된 이남열의 밥이자 명예다. 자신의 노동에서 경지를 깨우친 순간 ‘돈 안 되는 이발 기술’이, ‘사양 업소인 이발소’가 밥을 주었고, 명예까지 안겼다. 그가 지닌 명예가 무엇인지 이곳에 따로 기록하지 않는다. 명예 이전에 그의 노동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남열은 은퇴를 묻자 은퇴 같은 건 없다며 나를 타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