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김영필의 낡은 세탁소’가 있다
대한민국에는‘김영필의 낡은 세탁소’가 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11.0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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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미닫이문을 열다
시간에 쫓기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노동을 지배하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 충신동 일광세탁소 (1)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에는 여든아홉 살 장 프랑수아가 운영하는 오래된 세탁소가 있다. 45년간 이 자리를 지킨 <장 프랑수아의 낡은 세탁소(A French Laundry, 엘리자베스 보글러 감독, 2014)>는 제12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EIDF 2015 월드 쇼케이스’를 수상하며 한국에 소개됐다. 한국에는 장 프랑수아의 세탁소보다 오래된 세탁소가 있다. 서울 종로구 충신동 일흔여섯 살 김영필이 운영하는 일광세탁소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이름 없는 용사를 만나다

동대문에서 율곡로를 따라 옛 이화여대부속병원 터에 자리한 서울디자인지원센터를 지나 이화로터리 방향으로 백여 미터를 더 가면 충신약국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비탈진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왼쪽 길모퉁이에 충신동 일광세탁소가 있다. 3층 건물 아래에 짓눌린 채 비탈길 모서리에 낀 듯싶은 일광세탁소의 미닫이문을 옆으로 살짝 밀면 칼주름이 잡힌 바지를 입고 다림질을 하는 이를 만날 수 있다.

에둘러 일광세탁소를 가는 길도 있다. 창신동 쪽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서울성곽을 따라가면 암문(暗門)이라 불리는 개구멍과 같은 조그마한 통로가 성벽에 뚫려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사대문 안이고, 곧바로 충신동이 나온다. 충신동과 창신동은 이처럼 성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문 안과 밖은 신분과 삶에서 큰 차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한국전쟁 이후 충신동과 창신동은 서로의 경계가 사라진 채 둘 다 달동네로 불렸다. 암문을 통과해 충신동에 들어서면 아직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다. 혼자 걷기도 비좁아 보이는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고, 근대사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집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나는 주로 이 길을 통해 충신동 일광세탁소를 찾는다. 이 좁은 길들을 통해 걸으면 사라져가는 노동과 역사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숨은 주인공들이 살았던 동네가 이곳이지 않는가. 옷을 만들고 옷을 팔던 이들, 도로를 깔고 빌딩을 세우던 일꾼들이 이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을 기억하는 걸 껄끄러워한다.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권력에 이용당하고 소외당한 이들이다. 역사의 패권자들은 이들을 감추고 싶어 불도저로 밀어버리기도 했다.

전쟁 이후 충신동 위에 자리한 지금의 낙산공원 주위(충신동,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로 판자촌이 만들어졌다. 하루 열서너 시간씩, 때론 사나흘씩 잠 오지 않는 약(타이밍)을 먹으며 잔업, 철야를 하며 재봉틀을 밟던 노동자들의 삶터인 이곳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1969년부터 서울시는 판자촌 등이 있는 32개 지구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2002년 동숭동 시민아파트를 헐고 낙산공원과 서울성곽 동측 탐방로를 만들었다)가 들어섰다. 완공한 지 넉 달 만에 무너져 세계적 웃음거리가 된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도 그 당시 판자촌을 밀고 들어선 시민아파트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개발과 발전 ‘과정’의 실질적인 주역이자 희생자였던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의 삶터는 권력자의 의지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결과’를 쥔 승리자들만이 역사에 기록될 특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역사는 정당할 때가 없다. 역사는 냉정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결과만을 헤아릴 뿐,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을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은 거대한 망각의 구덩이 속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내던져져 있다. 십자가도 없고 화환도 없다. 희생의 행위가 헛되이 끝나고 말았기에 십자가도 화환도 이 잊혀진 자들을 찬양하지 않는다.”

충신동 일광세탁소 김영필은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인’ 혹은 ‘명장’의 호칭도 지니지 않았다. 동네마다 한두 곳씩은 있을 ‘세탁소 아저씨’다. 하지만 김영필을 오늘 만나러 가는 까닭은 이런 ‘이름 없는 용사들’의 삶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삶이자 보편적인 삶이고,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김영필은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나은 기술자도 있고, 더 좋은 설비를 갖춘 세탁소를 갖춘 곳도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말했다. 반백년 가까이 이 네 평도 안 되는 일터를 지켜온 당신의 삶이야말로 꼭 기록으로 남아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그렇게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끝에 김영필은 인터뷰에 응했다.

“땟물(때) 빼먹고 산다”며 부끄럽게 여겨야 했던 47년 ‘김영필의 낡은 세탁소’ 인터뷰는 “세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질 인물이 될 사주팔자였나”로 끝맺었다. 일흔여섯 김영필은 세탁소와 함께 살아온 자신의 삶이 속마음으로는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이제껏 자신의 삶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할 공간이 없었다.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는 숱한 ‘성공신화’가 우리시대의 ‘진짜 영웅’을 잊게 했다. 손에 쥔 돈과 권력의 크기로 성공을 측정하는 한 역사는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승리한 자만을 기억할 거다. 대한민국 근대화와 산업화가 군사쿠데타세력의 전취물인 것처럼 기억하려는 음모가 끊임없이 진행되지 않는가. ‘역사가 정당할 때가 없다’는 슈테판 츠바이크 말이 무섭게 다가온다. 일광세탁소에서 취재하는 2015년 10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가 뉴스 1면을 장식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솔질하고 삶고 빨고 풀 먹여 다리기

김영필이 충신동에 온 때는 1969년이다. 1940년에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나온 김영필은 여수의 상가에서 점원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당시 처남이 여수에서 함께 살았는데, 이 처남이 세탁기술을 배운 뒤에 서울 신당동으로 올라와 세탁소를 차렸다. 처남은 세탁소가 자리를 잡자 매형인 김영필에게 서울에 한 번 찾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신당동에 세탁소를 차렸다고 편지가 왔어. 그때는 전화도 없을 때야. 당시 여수는 읍에서 시로 승격이 될 짝인데, 서울은 여수와 문화수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거야. 날을 받아 신당동으로 가서보니까 기사까지 두고, 지(처남)가 주인이야.”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있는 세탁소가 드문 시절이었다. 동네 세탁소들은 마장동의 공영 드라이클리닝 공장에 세탁물을 위탁했다. 그곳에서 오전에 세탁소마다 돌며 세탁물을 대바구니에 담아 수거해 세탁을 한 뒤에 오후에 갖다 주는 식이었다. 이런 시절에 처남은 기계 설비를 갖추고 세탁소를 운영해 큰돈을 벌고 있었다. 이를 본 김영필은 점원을 하며 월급생활을 하느니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여수로 내려가 사직서를 냈다.

세탁기술을 배우려면 세탁소에 취업해 기사 보조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는데, 어떤 기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기술을 빨리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사들은 다림질을 주로 하는데, 다림질 순서에 오기 전까지의 대부분의 공정은 기사 보조가 할 일이다. 손빨래하기, 삶기, 기계 돌리기, 와이셔츠 풀 먹이기, 세탁물 널고 걷기 등 새벽부터 쉼 없이 세탁소의 궂은일을 보조가 도맡아했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서 기사가 다림질을 할 때 옆에 서서 눈여겨보며 기술을 익혀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사의 온갖 잔심부름을 해야 했는데, 담배를 사다 바치는 일은 기본에 속했다.

“기술을 배우러 오면 절대 빨리 가르쳐주지 않아. 일을 시켜먹어. 빨리 가르쳐주면 기사가 손해니까. 기사 담배 같은 것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해. 그래야 한 가지라도 빨리 가르쳐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가르쳐 줘.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런 합섬이 아니니까 와이셔츠 150장이다 그러면 전부 솔질을 해가지고, 들통에다 두어 시간 삶아 가지고, 그것을 빨아가지고, 완전히 비눗물을 제거해가지고, 빨랫줄에다 쭉 널으면 150장이니까 굉장히 많지. 마르면 걷어다가 풀을 멕(먹)이는 거야. 탕수육 할 때 쓰는 감자풀이라고 그걸 가지고 앞, 에리(옷깃), 팔 이렇게 풀 멕여. 풀 멕일 적에 잘 부벼야 전분이 안 붙어 있어 다림질이 잘 돼. 풀 멕여 덕석 말듯 말아서 여기에(다림질 판 앞에) 쌓아놓으면 한 시간 쯤 뒤에 기사가 하나씩 끄집어내서 다림질을 해. 그런데 실렁실렁(설렁설렁) 짜 놨다, 그러면 다림질할 때 물이 많으니까 (다림질이) 잘 안 되잖아. 또 전분이 뭉쳐 있어도 다림질이 안 돼. 그러면 죽살나게(죽도록) 터지는 거야. 새로 해 와라 그러면 되는데 (풀 먹인 와이셔츠를) 이런 바닥에 내팽개쳐버려. 그럼 (더러워졌으니) 새로 빨아야지. 그렇게 고약스러웠어.”

그런 생활을 꼬박 1년을 해야 기술자가 되어 기사라 불린다. 옷이 사시사철 다르니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1년을 기사 보조 역할을 하며 배워야 홀로 다리미를 잡고 일할 수 있다. 손님들은 옷을 세탁해달라고 말하지만 김영필이 볼 때 옷은 수만 가지다. 사시사철 입는 옷이 다다르고, 원단마다 세탁과 다림질 법이 다르다. 같은 옷이라도 그 옷에 묻은 오염물도 수십 가지다. 드라이클리닝은 땟물만 뺄 뿐, 옷에 묻은 숱한 오점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커피, 생선기름, 돼지기름, 오렌지, 잉크 등등 옷마다 온갖 얼룩들이 있고, 이 얼룩들을 없애는 방법도 갖가지다. 그러니 한 철 기사 보조 생활해서는 기술자 노릇을 할 수 없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그렇다고 봄여름가을겨울 옷 다루는 법을 익혔다고 다 배운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옷 재료는 물론 생김새도 달라지고, 얼룩도 끊임없이 새로운 걸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이클리닝 해서 다림질을 해놨다고 끝이 아니다. 옷의 미세한 얼룩마저도 놓치지 않고 다룰 줄 알 때 기술자가 되는 법이다.

김영필은 처남이 세탁소 사장이었기에 이곳에서 큰 어려움이나 설움을 겪지 않고 사시사철 옷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설움이나 구박은 없어도 할 일은 다 해야 했다. 빨래도 하고, 풀도 먹여가며 수만 가지 옷과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1969년 충신동의 한 세탁소에서 기사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처남에게 전해졌고, 처남은 매형에게 한 번 이곳에 가보라고 했다. 김영필은 충신동 일광세탁소에 들어선 순간, 이곳은 자신이 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설비까지 갖춘 신당동 세탁소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했다. 살림방 한 칸을 포함해도 4평이 되지 않은 가게에서 열심히 일해도 돈을 버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뒤돌아 나오려는데 김영필의 소매를 세탁소 주인 부부가 잡았다.

“나를 깍듯이 대해 주더라고. 내(주인)가 배려해 주겠다고 그래. 어떻게 배려해줄 거냐고 하니 월급도 다른 곳보다 많이 주고, 일은 많지 않지만 하다보면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그래. 이 분이 동대문시장에서 수건 가게를 하는 이북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세탁소를 돈 벌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내게) 물려줄 거니까 그리 알고 하라는 거야.”

2년쯤 뒤인 1971년 김영필은 일광세탁소를 인수한다. 거의 거저에 가깝게 자신의 세탁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김영필과 충신동 일광세탁소는 인연을 맺게 됐고, 그 인연이 반세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기사가 된 김영필이 첫 일터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일 수도 있지만 주인의 첫눈에 들 만큼 김영필의 성실성이 온몸에서 풍겼을 수도 있다. 숱한 세월이 흘러 칠순이 넘은 김영필에게서 여전히 청년의 열정을 느낄 수 있고, 내 소중한 옷을 맡겨도 되겠다는 신뢰를 첫눈에 예감할 수 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육하원칙 알면 눈 감고도 다린다

충신동 일광세탁소는 풍수로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끝자락에 자리한다. 세탁소의 출입문은 196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무틀에 유리가 달린 낡은 미닫이이다. 문을 밀고 들어서면 왼쪽에는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있고, 오른쪽에는 다림질을 하는 작업대가 있다. 천정에는 세탁을 끝내고 주인을 기다리는 옷들이 빼곡하게 서로 어깨를 부딪친 채 걸려있다. 출입문 밖에는 세탁을 마친 옷들이 가을햇살에 한껏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운 김영필은 건조된 와이셔츠 한 장을 걷어 다림판에 펼친다.

“옛날에 우리(세탁) 풍습에 등부터 다림질이 안 나오면 말을 빼 먹는다 그랬어. (다림질) 육하원칙의 제일 위에가 등이야. 그 다음에가 팔이야. 그러면 전혀 구김이 없이, 두 번 다시 다림질 할 필요가 없이 딱 나오지.”

와이셔츠 등 상단 솔기를 좌우로 다려 각을 잡는다. 김영필은 ‘육하원칙’이라는 표현을 쓰며 작업의 기본이나 순서를 말한다. 이 ‘육하원칙’을 지키면 다림질을 하다 정전이 되어 깜깜해지더라도 작업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한다. 김영필의 다림질 모습을 지켜보면 서두름이 없다. 바지에 칼주름을 잡을 때도 어깨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스팀을 뿜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 김영필은 있는 듯 없는 듯 가을하늘에 한가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여유롭다. 그런데도 구겨져 걸려있던 세탁물들은 어느덧 한 장 씩 사라지고 짝 펴진 옷들이 옷걸이에 자리한다. 김영필은 노동의 시간에 쫓기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지배하고 있다. 자신의 작업장에서 김영필은 절대자다.

노동과 시간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노동자에게 자신이 일한 시간은 수입(임금)과 직결되기에 시간은 곧 자신의 땀이요, 밥줄이다. 회사에서 직원에게 월급 계산할 때 출퇴근 타임카드가 주요근거이자 전부이기도 하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의 달력에 자신의 잔업시간을 기록해놓았다가 급여명세서와 대조하기도 한다. 내가 공장에서 일할 때 한 동료는 임금이 덜 나왔다며 자신의 집에 걸려있던 2절지짜리 달력을 떼어와 총무과에 항의하기도 했다. 노동이 시간과 밀접해지고 시계로 정확하게 측정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임금노동자가 양산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지을 때야 해가 뜨고 지거나 작물의 주기에 따라 노동시간이 늘었다 줄었다 했다. 하지만 공장이 들어서면서 해가 뜨고 지고에 따른 자연에 맞춘 인간의 노동을 인위적인 기계인 시계에 꿰맞추기 시작했다. 리처드 던킨의 『피 땀 눈물』에 공장에서 양면 시계를 사용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력으로 기계를 움직였던 공장들은 양면 시계를 사용하곤 했다. 한 쪽 면은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다른 면은 개인이 일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공장 시간’은 강물의 흐름에 의해 조절됐기에 강물의 흐름이 느려지면 생산도 더뎌졌다. 강물의 속도에 맞추어진 시계는 급료를 지불하는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계산하는 데 이용됐다.”

시계를 누구나 가질 수 없었던 시절에는 공장장들이 시계를 아침에는 빠르게 밤에는 늦게 맞춰놓아 노동자들을 속였다고 한다. 그 공장에서 유일하게 시계를 지녔던 이는 공장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동의 지배하는 절대자가 시계라는 ‘절대반지’를 지닌 공장장인 셈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루이스 멈퍼드는 “시계는 단지 시간의 진로를 쫓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수단”이라고 했다. 그래서 멈퍼드는 “산업 시대의 핵심적인 기계 장치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였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