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이어온 전파사가 사라졌다
45년 이어온 전파사가 사라졌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12.1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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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해진 홍대 앞, 서민의 애환 어린 점포들은 밀려나다
지뢰에 무너진 열네 살의 꿈, 광석라디오로 세상과 접속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 창전동 옛 삼정전파사(1)

전파사가 사라졌다. 서너 달 전에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은행잎이 노랗게 익어가던 가을날 오후였다. 심한 가뭄 때문일까. 황금빛으로 반짝이지 못하고 푸석하게 말라가는 은행잎들이 유난히 많은 올 가을. 천고마비는커녕 구름이 낀 듯 잔득 찌푸린 하늘만 마주한다. 미세먼지로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하다. 인간의 욕망이 맑은 가을하늘을 앗아간 것일까.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사라진 전파사

신촌로터리에서 동교동로터리 방향으로 걸으면 중간쯤에 창천동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와우산로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핫’한 홍대 거리로 갈 수 있다. 와우산로를 따라 백 미터쯤 가면 오른쪽에 <산울림소극장>이 나오는데, 극장 앞에 서서 대각선으로 바라보면 와우산공원으로 가는 언덕길이 있다. 바로 이 언덕길 축대 아래에 전파사가 있었다. 하루 이틀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다. 한두 해도, 일이십년도 아니다. 무려 마흔다섯 해를 이 자리를 지킨 전파사다. 그 전파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말이 통하지 않은 나라의 어느 거리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아니면 자다가 깨니 타임머신을 탄 듯 낯선 시대에 뚝 떨어진 느낌이랄까. 전파사 가까이에 누이가 운영하는 술집이 있어 익숙한 길인데, 이곳에서 길을 잃다니. 45년 된 창전동 삼정전파사 취재는 여기서 끝이다.

딱 한 달 전에, 그러니까 추석이 지나자마자 삼정전파사는 문을 닫았고, 사업자등록도 말소했다. 한 발 늦었다. 연세도 연세지만 가파르게 오르는 홍대 앞 집세를 감당할 수도 없어 그만두었다는 소리만 취재수첩에 담았다. 돌아서려는데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오랜 노동의 시간이 깃든 곳을 찾는 여행인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구나! 무심코 이 길을 오가다 수첩에 옮겨 적어 둔, 삼정전파사 간판에 새겨져 있던 전화번호를 미련 때문에 눌렀다. 0.2.3.3.8.1.2.9.5. 아홉 번째 숫자 5를 누르면,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세요”라는 안내가 나오겠지. 그런데…… 신호가 간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다. 번호를 누른 내가 당황한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다. 갑작스런 공격에 넋을 잃은 꼴이다. 뭐라 하지. 아니 누굴까? 눈앞이 하얘지며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 저…… 삼정전파사인가요. 혹시나 하고 전화했는데…….”
“어떻게 이 번호로 전화하셨는데요.”

별 수 없다. 사실대로 말하자. 뭐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삼정전파사를 취재하고 싶어 창전동에 왔는데 보이질 않아서 전화했다. 전화번호는 이전에 이곳을 오가다 적어두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취재를 왔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한 거다.

“제 남편이 전파사를 했는데, 얼마 전에 그만두었어요. 지금은 전파사를 안 해요.”
“아, 네……”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오래된 노동이 머문 자리에서 떠난 사람의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찾아 뵈도 되는지, 집이 어딘지를 물었다. 이제 일도 그만뒀는데 무슨 취재냐고 한다. 다짜고짜 주소를 물으며 잠시 얼굴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했다.

“서교동 000의 00이예요.”

그곳은 내가 이리저리 알고 있는 출판사가 많은 동네다. 여기서 걸어가면 이십 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예의상 언제 찾아가면 편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예정에 없던 오래된 노동이 머물지 못하고 사라진 공간은 이처럼 계획되지 않고, 엉뚱한 충동에서 시작됐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황톳길 와우산자락에 문을 열다

만복전파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었냐면, 택시를 타고 “탄탄동 만복전파사로 가 주세요.” 하면 못 찾아오는 기사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파사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너무, 너무 낡았거든요.

『완득이』를 쓴 소설가 김려령의 동화 『탄탄사거리 만복전파사』 이야기다. 택시기사도 척척 찾아오는 만복전파사가 재개발 때문에 떠났듯이 삼정전파사도 떠났다. 삼정전파사가 세든 건물은 ‘너무, 너무 낡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떠나야했다. 홍대거리가 젊은이의 거리, 예술의 거리, 패션의 거리로 탈바꿈하며 상가 임대료가 하늘 높은지 모르게 치솟았다. 홍대거리가 인기를 누릴수록 이곳에서 토박이로 장사를 해온 이들은 하나둘 홍대와 멀어져 갔다. 성장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했는데, 그 열매를 맛보기는커녕 쫓겨나는 신세가 되다니. 오래된 가게가 사라진 자리는 이대 앞 옷가게들이 몰려오고, 대형 카페들이 점령했다. 서너 개 상점이 있던 건물을 통째로 빌려 임대인이 여러 상점을 열고, 가게마다 직원을 채용해 기업처럼 운영하는 건물도 적지 않다.

건물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 말을 한다. 건물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에서

홍익대학이 와우산 자락에 자리한 것은 1955년이다. 1971년에는 수도공대를 인수해 종합대학으로 승격한다. 그해에 서른셋 청년 남상순이 와우산자락에 삼정전파사를 열었다. 4차선 도로가 뚫려 길가로 대형 미술학원이 즐비한 와우산로는 1970년대엔 왕복 2차선의 포장되지 않은 황톳길이었다. 와우산은 판자촌이 자리한 달동네였다. 서울시는 1969년 달동네를 밀어내고 착공 6개월 만에 시민아파트 15개동을 준공하는 속도전을 펼쳤다. 우연일까. 오래된 동네를 찾을 때마다 시민아파트의 흔적이 자리한다. 어찌됐든 6개월 동안에 5층짜리 아파트 15개동을 완공하는 일은 21세기 기술로도 만만찮은 일이다. 70도의 가파른 경사면에 세워진 와우아파트는 준공 3개월만인 1970년 4월 8일 동 틀 무렵에 한 개 동이 와르르 무너졌다. 채 잠에서 깨지도 않은 이들도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자던 이도 주저앉은 아파트 더미에 목숨을 잃었다. 서른네 명이 숨졌다. 부실공사의 대명사가 된 이 와우아파트는 2003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공원이 만들어졌다. 이를 전후로 해서 와우산자락은 비좁은 골목길의 달동네를 탈피해 아파트단지로 변신한다.

삼정전파사의 고객은 시민아파트 주민들과 달동네 주민들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삼정전파사 앞을 지나야 했다.

세상과 차단된 열네 살 소년

표준화된 대량생산이 착착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계화된 전쟁이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야 했다. 기계화된 전쟁이 항상 생산의 증대에 안달하는 체계에서 일시적으로 강장제 구실을 했다는 점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잖은가? 양적 생산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양적 소비가 뒷받침돼야 했다. 그리고 조직화된 파괴만큼 이런 순환을 보장하는 것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국가의 안녕이자 기계의 안녕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대량 소비가 생산의 증가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기계생산의 강화된 능력은 해외시장의 증가, 인구 증가, 수익의 급감을 감수한 데 따른 구매력 증가라는 제한된 방식으로만 손해를 만회할 수 있었다. 해외시장과 인구 증가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술수가 먹히지 않았을 때, 전쟁의 수익의 급감을 막기 위해서 사회 계급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사회를 유지시키는 전체 체계를 위협했다.
- 루이스 멈퍼드, 『기술과 문명』에서

남상순은 다리가 불편하다. 한국전쟁 직후였다. 열네 살 적 친구들과 냇가에서 놀다 지뢰가 터졌다. 동구릉(현 구리시) 쪽에 살았는데, 이곳은 한국전쟁의 접전지였다. 지금도 남상순의 간과 척추에는 지뢰 파편이 하나씩 박혀 있는데, 이 때문에 왼다리는 전혀 쓰지 못하고, 오른다리에만 미세하게 신경이 살아있다. “척수에 박힌 파편이 살짝만 비켜갔어도…….” 야속한 파편은 그의 두 다리를 앗아갔다. 그도 한국전쟁의 희생자다.

“당시에는 장애를 입으면 학교나 사회생활을 거의 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남상순의 지우고 싶었을 과거를 들췄다. 그것도 고통의 기억을.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질 않았다』는 말한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 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일은 두렵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기도 어렵지만 그걸 듣는 일도 쉽지 않다. 고통을 물을 때, 내 스스로가 야만스러워 몸서리를 친 적도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행위를,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내면의 소리와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는 소리를 가만히 맞춰보는 모습.’ 맞다. ‘영혼의 떨림’을 읽어야 한다. 남상순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기다린다.

“거의가 아니라 아예 끝이야. 끝. 끝. 끝이야.” 열네 살에 남상순은 인생의 ‘끝’을 마주했다. “그냥 생명 붙어 있으니까, 밥 먹여주니까 밥 먹고 앉아 있는 거지. 쉬이 말해서 똥 사는 거밖에 모른다고. 옛날엔 다 그랬어. 다친 사람들. 거의…….”

학교에 가는 일은 꿈꿀 수도 없고, 재활과 같은 말은 듣지도 못했다. “재활 같은 소릴 하네. 그땐 꿈도 못 꾸는 소리고, 그땐 있지도 (재활 개념이) 않았어!”라며 목청을 돋운다. 다리를 다치는 순간 남상순은 차단됐다. 사회와 차단되고, 꿈과 차단되고, 자신의 인생과도 차단됐다. 그나마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끼니를 거르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다.

“집 밖에는 나가지 못했겠네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집 밖? 문 밖도 못 나갔지.”

길에서 장애인을 보면 이상한 눈초리로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장애인 지나가면 안 보일 때까지 쳐다봤다고. 그 눈총이 말도 못해.” 그 시선은 남상순의 몸을 쫓아와 발가벗기는 수치를 안겨주었다. 대문 밖은커녕 방문을 열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일단 장애가 되면 절벽에 부딪친 기분이야. 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 깜깜한 거야. 할 일이 없잖아. 완전히 절망이야.” 그저 목숨이 붙어있기에…… 동굴과 같은 방에 웅크리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미래를 설계할 수 없으니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사육되는 짐승과 다르지 않은 10대를 보내야 했다. 스물의 청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경찰관을 퇴직한 아버지는 서울 마포로 식구들을 이끌고 왔다. 시골에서 서울로 간다면 흥분에 휩싸일 때인데, 남상순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에겐 바깥세상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굴 안은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어두울 뿐이다. 차단된 세상, 이미 끝과 마주한 삶을 미련 없이 버리고 싶었다. 목발을 짚고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로 간 적이 숱했다. 

“대흥동에 살았는데, 지금 양화교, 그때 제2한강교라고 그랬는데 거기 보면 유엔탑이라고 여자가 횃불 들고 있는 아치가 있어. 거기 죽으려고 몇 번 갔다 왔어. 거기 밤에 가서 난간 붙잡고 울다가 오고, 한 날은 어떤 젊은 사람이 (자살하려는 걸) 눈치 채고서 날 붙잡고 업고 오고. 몇 번 그랬어. 다 그래. 이렇게 (장애) 된 사람은 다 그래. 나뿐만 아니야. 신체가 그렇게 되면 자살밖에 없는 거야. 희망이 없구. 옛날에 장애인 되면 거기서 끝이야. 배움도 끝이고, 모든 게 끝이야.”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광석라디오로 세상과 접속하다

1950년대 말 서울로 온 남상순은 어머니를 여의었고, 몇 해 뒤에는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바로 밑 동생은 군 복무 중이었다. 그 아래 여동생과 남동생은 아직 학생이었다. 살아야 했다. 끝이라 생각하고, 절벽이라 여긴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다. 어린 동생들을 굶겨죽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고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두 다리와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생존의 욕구가 꿈틀거렸다.

“이제 생활고에 몰리니까 할 수 없는 거야. 그때는 방법이 없잖아. 누이동생, 막내는 학교 다니지, 바로 밑 동생은 군대 갔지. 방법이 없어. 그때부터 다니기 시작했어. 그래 누가 쳐다보든지 말든지, 내가 길 가다 넘어지면, 넘어지는가 보다. 그러면 일어나서 가고, 그런 거지.”

절벽에 몰린 남상순, 사방이 꽉 막힌 ‘끝’만 보던 남상순도 가느다란 선이 있어 세상과 접속 중이었다. 소리였다. 광석라디오(Crystal Radio)에서 나온 사연과 노래. 나무에 연결한 안테나선과 땅에 묻은 전선을 크리스털(광석 검파기, crystal detector)에 접촉하면 주파수가 잡히는데, 이를 군에서 사용한 무전 수화기를 스피커로 이용하면 전원이 없어도 라디오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은 남상순을 차단했지만 남상순은 세상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은 셈이다.

“옛날엔 광석라디오라고 있어. (한 선은) 나무에다 매고 (또 한 선은)지선이라해서 땅에다 파고 묻었어. 군대무전기 있어, 옛날말로 그게 태스킹이라고 그랬다고. 그 수화기가 있었는데, 그걸 하나 사가지고 거기서 줄 두 개 달아가지고, 공중선과 지선을 끌어 와가지고, 광석이라고 있어. 광산에서 뽑아내는 광석인데 반짝반짝 해. 그걸 쇠를 빼쪽하게 만들어가지고 이 사이에다 껴. 그래가지고 이걸 맞추면 소리가 들어와.”

땅과 나무에 매달린 가느다란 전선을 통해 세상을 기웃한 남상순은 라디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당시 텔레비전은 있었지만 국내에서 TV를 생산하는 기술은 없었다. KBS-TV 방송은 1961년에야 개국했고, 1966년에야 금성사에서 국산 TV를 최초 생산했다. 남상순이 서울에 온 1959년에는 텔레비전은 생소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살 형편이 안 됐던 남상순은 당시 라디오 회로 등을 배울 수 있는 <라디오강의록>이라는 교재를 사서 전자기기와 전파에 대해 독학을 했다. 남상순은 광석 대신 다이오드를 이용해 좀 더 안정적으로 라디오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계속 집에서 수리하고 배우고, 부품 사다 만들어 보고 별짓 다했지. 모르면 청계천 나가서 부품 파는 데서 물어보고. 그러면서 배운 거지.”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고에 닥치자 남상순은 세상으로 나섰다. 다행히 독학으로 익힌 전파기술이 그를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

“기능직이 하나 좋은 것은 뭐냐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기능이 없는 사람보다는 편해. 어디 가서 땅이라도 파지 그러잖아. 기능이 있으면 어디 가서 일하면 되지. 그럼 밥 먹고 살아. 내 기술이 있으니.”

남상순은 국내 유일의 가전제품 상가로 갓 세워진 세운상가 옆 예지동에서 책상 하나를 놓고 전자기기 수리를 시작한다. 이때가 1969년이다. 예지동은 당시 대한민국 수리 메카로 불렸다. 세운상가 일대에는 ‘국보급’ 손재주를 지닌 맥가이버들이 몰려들었고, 총이든 뭐든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고 알려졌다. 그곳에서 남상순은 절벽에서 벗어나 끝이 아닌 시작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