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라는 것은 내 몸의 뼛속에 배어야 해”
“기술이라는 것은 내 몸의 뼛속에 배어야 해”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12.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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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더미를 생산하는 소비사회에 맞선 반역의 기능공
닳고 닳아도 다시 고쳐 쓰는 물건에는 이야기가 흐른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창전동 옛 삼정전파사(2)

또한 매일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바다로 쏟아진다. 쓰레기의 대부분은 플라스틱이다. 국제연합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바다 1제곱킬로미터 당 4만 6천 개의 플라스틱이 떠다니고 있다.

대기오염과 이산화탄소 누적 같은 변화에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이것의 정점에 사망·질병·기아·기후로 인해 이주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닿아 있다. 기후 때문에 이주하는 사람들만 해도 2050년까지 2억 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한다.
- 마인하르트 미겔, 『성장의 광기』에서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영점 영영영의 오차를 잡아라

세운상가 인근에 ‘녹음기 수리’하면 남상순을 꼽았다. 카세트테이프가 나오기 전에 사용했던 진공관 릴 녹음기를 남상순만큼 만지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카세트가 나오기 전에는 전부 릴 녹음기였거든. 거기에 전축으로 말하면 바늘 있죠? 릴 녹음기에는 헤드가 있어서 테이프가 지나가면 자장에 의해 소리가 나는데, 이걸 쓰다보면 닳아. 이걸 재생하는 거야. 요즘 헤드는 분해를 못하는데, 옛날 것은 분해를 하게 되어 있거든.”

헤드는 얇은 철판들이 층층이 겹쳐진 형태다. 이게 눈으로 보면 하나의 판 같은데 좌우로 나눠져 있다. 테이프가 지나가면 자장에 의해 이 판들이 울리며 소리를 내는데, 오래 사용하면 닳아진다. 남상순은 이 헤드의 판들을 일일이 분해해 재생하는 기술을 익혔다.

“이걸 재생할 줄 아는 사람은 전국에서 현재는 나밖에 없을 거야. 청계천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 허금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김기사라는 사람이 있었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는데, 다 그만 뒀어. 그만둔 지 오래됐고, 나만 남았지. 이 헤드가 어떻게 되어 있냐면 쇠가 납작한 철판으로 착착 되어 있는 것을 (요즘 헤드를 보여주며) 이렇게 붙여놨는데, 이 앞으로 테이프가 지나가는데 이 사이가 붙으면 안 돼. 아무튼 최소한도로 가깝게 붙어야 돼. 그니까 영점 영영영 몇 밀리(mm) 차로 붙어야 돼.”

‘영 영 영’에 힘을 주며 말한다. 그야말로 간극이 없이 딱 붙은 것처럼 보여야 하는데, 절대 붙어서는 안 된다.

“그걸 사람 손으로 어떻게 해요?”
“그치. 이거 갖다 되면은 거의 다 붙는다. 그래가지고 그걸 어떻게 했냐면, 옛날에 껌 종이 있죠. 껌 종이에 알루미늄 판이 있어요. 그거를 불에다 살짝 대면 종이는 떨어지고 알루미늄만 남아. 지금은 알루미늄 호일도 있지만 옛날엔 그런 거 없었어. 이걸 짝짝 펴가지고 최소한으로 얇게 만들어. 그걸 가운데다 놓고 댄다고. 대. 그래가지고 보드(나사)를 딱 조여 가지고 갈아. 그러면 최소한으로 들러붙어요. 요게 완전히 닿으면 안 돼. 소리를 감지를 못해. 그런 식으로 재생하고 그랬다고.”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닳고 닳아도 다시 고쳐 쓰고

베트남전쟁과 이어진 중동 건설 붐으로 전파사는 199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렸다. 파병된 군인들과 건설현장에 나간 노동자들이 외제 전자제품을 한국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제작사의 에이에스센터가 따로 있지 않은 때라 제품이 고장 나면 동네 전파사를 찾아와 수리해서 썼다. 텔레비전이 집안의 가보처럼 여겨졌던 시절이라 고장이 났다고 지금처럼 ‘신상’으로 바꾸는 일은 없었다. 방송국 장비들도 미국에서 만들어진 암펙스를 많이 썼는데, 고가에다 수입품이라 고장이 나면 청계천을 찾아야 했다.

“그때는 부품이 잘 나오질 않아요. 어떻게 기계 하나 들여와 쓰면 진짜 망가져서, 닳고 닳아도 또 만들어 쓰고, 또 만들어 쓰고, 그렇게 썼다고. 옛날에는. 내가 그때 일한 거야.”

요즘은 고장이 나서 버리는 전자제품보다는 새로운 상품에 밀려 버려지는 제품이 많지 않을까 싶다. 부품을 구해 고치는 일은 어리석어 보일 정도다. 수리비가 새 제품 가격보다 비싼 경우가 많다. 제작업체 이외에는 수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부품이 공급되지 않아 수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소비가 미덕인 시절이다. 고쳐 쓰고, 재활용하고, 아껴 쓰고, 오래 쓰는 것은 현대 산업사회에 맞지 않은 ‘미개’한 소비자로 취급받을 수 있다. 삼 개월이 멀다하고 신제품을 쏟아내어 소비자의 맘을 훔쳐 지갑을 열게 한다. 소비가 애국이다. 저축은 우매한 일이다. 빚을 얻어서라도 새 제품을 쓰는 사람이 문명인이고, 현대인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상품 이상으로 무수한 쓰레기를 생산한다. 아파트단지에 가면 버려진 가구, 전자제품, 상품 포장지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생산 이상으로 소비가 중요한 사회고, 그 소비의 뒷골목에는 버려진 쓰레기들이 쌓인다.

생산자 사회(생산 라인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에서는 아무리 실업자들이 불쌍하고 비참하다고 하더라도 사회에서의 그들의 자리는 의심할 바 없이 확고했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 투입될 수 있는 강력한 예비군의 필요성을 생산 전선에 있는 어느 누가 부인하겠는가? 소비자 사회에서 미완의 소비자는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들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일한 게임에서 탈락하면 더 이상 선수로 뛸 수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잠재적 생산자라는 것만으로도 생산자 집단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소비자가 되겠다는 약속과 소비자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만으로는 소비자 집단에 들어가기에 충분치 않다. 소비자 사회에는 흠이 있고, 불완전하고, 미완인 소비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에서

상품만이 아니다. 노동을 통해 생산된 제품이 멀쩡한 상태에서 버려지듯 사람들도 버려지고 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일상화되어 정년이 되기도 전에 일터 밖으로 내팽개쳐진다. 비정규직으로 분리 수거되어 일이 년 일하다 정규직과 분리되어 쫓겨난다. 버려진 생산물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버려진 인간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버려진 생산물과 버려진 인간이 문제가 아니다. 생산물과 인간을 버리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지구 곳곳을 헤집어 병들게 한다.

남상순은 지구를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무수하게 버려져야 했던 물건이 그의 손을 거치며 다시 살아난다. 소비가 중심이 된 21세기에 맞서 ‘반역’을 하는 셈이다. 서교동 주택가 한 빌라의 반지하가 그가 10년 전에 마련한 자신의 첫 집이자 유일한 집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기능을 지닌 그가 반세기를 쉼 없이 일한 보금자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하다고 여겨진다. 버려진 것을 소중하게 재탄생시킨 그의 손을 물질문명이 질투하는 듯싶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물건에는 이야기가 흐른다

요즘 남상순은 ‘골동품’을 수리하고 있다. 최근의 전자제품은 ‘수리’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고장 난 부품을 찾아 바꾸는 게 아니라 피씨비(인쇄 배선 회로 기판, printed circuit board)를 통째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고장도 비싼 수리비가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리가 가능한 제품은 그야말로 ‘골동품’ 취급을 받는 제품이다. 엊그제는 외발산동에서 사는 사람이 오래된 샤프 녹음기 커다란 것을 들고 왔다. 아버지의 유품이라 고쳐서 쓰려고 한다며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서 서교동 반지하를 찾아온 거다. 그렇다. 아무리 낡아도 버릴 수 없는 물건이 있다. 누구에게는 쓸모없는 폐기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떤 이에게는 값비싼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전이 빨라서 그런지 물건에 애착이 많지를 않아요. 애착이 없으니까 수리라는 게 없는 거야. 무조건 버리고 사는 거야. 외국 사람들 보면 아직도 오래된 물건을 쓰잖아. 아주 오래된 사진기로 사진 찍고 그러더라고. 그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물건에 애착이 있어서 쓰는 거지. 그게 편하고 좋아서 쓰는 것만은 아니거든. 쉬운 말로 눈만 껌쩍하면 다 자동으로 되는 게 많은 세상이잖아. 애착이 있어서야. 솔직히 그런 애착이 우리에겐 없어. 그러니까 무조건 버려. 사. 그게 만능시대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이라 하더라도 다 같은 물건은 아니다. 그 물건이 어떤 개인의 것이 됐을 때는 그 물건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물건을 지니는 순간부터 숱한 이야기로 그 물건만의 역사를 쓰는 법이다. 그래서 더 편하고 좋은 제품이 있더라도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는 누구와 만나 차츰차츰 인연을 쌓아가는 과정을 앗아갔다. 겉의 화려함만 있을 뿐 내면의 깊이는 중요시하지 않는다.

내겐 세 대의 선풍기가 있다. 두 대는 언제 샀는지조차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됐는데 아직도 신나게 돌고 있다. 산요에서 만든 선풍기는 1970년 이전인 듯싶으니 최소 45년은 됨직하고, 골드스타 상표가 새겨진 금성사 제품은 1980년대가 아닌가 싶으니 30년은 너끈히 쓴 듯싶다. 마지막 한 대는 삼사 년 전에 산 제품이다. 난 골드스타를 애용한다. 산요 선풍기는 어머니가 아직도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삼사십 년 쓴 제품 둘은 아직 멀쩡하고, 바람도 시원하다. 그리고 소음도 없다. 그런데 그보다 십분의 일도 쓰지 않은 선풍기는 바람도 별로고, 소음도 있고, 그새 모가지도 부러졌다.

“옛날 게 지금도 잘 돌아가죠. 그게 왜 그러냐면 요즘 것은 모터가 좀 작아. 그니까 소리가 나요. 윙윙윙 바람 소리가. 요즘 선풍기는 백 프로가 중국제야. 모터가.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도 모터는 중국제야. 이 중국 모터는 일 년 쓰면 굳어. 우리나라 초창기에 나온 금성 것은 모터에 뿌싱이라고 있어요. 베어링처럼 요만한데 선풍기 날개를 돌려주는 심보(샤프트)를 양쪽에서 붙잡고 있는데, 요게 문제야. 옛날 거는 신주(황동)를 가루를 내어서 찍은 거야. 그러기 때문에 스펀지처럼 안에 숨구멍이 있어. 그게 뭐냐면 이 뿌싱이 오일을 머금고 있게 한 거야. 오일을 머금고 있다 뜨거우면 오일을 뱉어내고, 식으면 다시 머금는 거지. 그런 작용을 하니 잘 돌아가고 고장도 안 나. 지금 나온 중국제는 제딴에 흉내를 내긴 냈지만 쇠야. 그러니까 기름이 없어가지고 닳든가 떡이 되어가지고 붙어버리거든. 스위치 넣으면 안 돌아가고 우웅 하는 거지. 쇠로 그냥 만드니 단가는 조금 먹지만 빨리 망가져. 빨리 망가져야 제품을 새로 팔아먹을 수 있잖아. 옛날처럼 육칠십 년대에 나온 것을 아직도 쓰면 공장은 다 망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소비를 위해 제품 겉만 화려하지, 내막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해서 발전이 안 되는 수가 더러, 그러니까 그런 거는 발전이 후퇴하는 거예요. 더 나쁘게 만들어 놓으니까.”

더 많이 팔리게 하는 기술은 발전시키지만 더 오래 쓸 수 있고 튼튼하게 만드는 기술은 후퇴하고 있다는 남상순의 말은 오늘의 세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뼛속에 새겨진 기술

삼정전파사는 사라졌지만 전파사에 있던 손 때 묻은 공구와 작업대는 고스란히 살아있다. 비좁은 반지하 살림집에 옮겨놓았다. 방 한 칸을 독차지하고. 작업대를 밝힌 불빛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들이 쓰던 전등이다. 남대문 고물상에서 구했는데. 부러진 지지대를 전기용접을 해 아직도 작업대를 지키게 했다. 1941년생인 남상순과 거의 같은 세월을 산 셈이다. 비좁은 집 방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해도 작업대와 공구들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 있다. 이제 팔순을 앞둔 나이지만 자신만이 지닌 기술을 아직도 필요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애착을 지닌 물건을 낡았다는 이유로, 장편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담겼을 제품을 수리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버릴 수밖에 없는 이의 아픔을 모른 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홍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찾아왔다. 삼정전파사가 사라지자 물어물어 남상순의 집을 찾아온 거다. 유럽산 낡은 전축을 한국에서 쓰려면 주파수가 맞지 않아 애를 먹는다. 유럽의 전원 주파수는 50사이클인데, 한국은 60사이클이다. 이 주파수의 차이를 잡아주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모터는 주파수로 돌아가는 거라 유럽에서 가져다 우리나라에서 돌리면 빨라요. 그걸 개조해야 해. 그런데 모터를 개조할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해. 레코드판을 돌려주는 심보(스핀들)를 깎아야 돼. 판 회전수가 심보 굵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걸 한국 주파수에 맞춰야 된다고. 이 심보를 깎는 바이트 같은 쇠가 있는데, 이걸 가지고 몇 시간을 깎아야 해. 아무리 노기스(버니어캘리퍼스)로 재어 깎아도 제 속도가 안 나와.”

“노기스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해야 한가요?”
“그렇지. 노기스로 2미리(mm)다 그래서 딱 2미리로 해도 안 나와. 왜냐면 이게 기어로 돌아가는 거면 자기 회전이 딱 나오는데 모터 심보가 고무롤러 이만한 거를 대서 돌아가거든. 그러니까 미끄러지는 게 있잖아.”

남상순은 그림을 그리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척 정밀한 작업임은 분명했다. 단순히 원리를 배워 안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그야말로 몸으로 숙련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뼛속에 새겨진 기술.

“기술이라는 것은 내 몸의 뼛속에 배어야 하지 그냥 배워서 이렇게 해서는 안 돼. 기능직이란 건 하루아침에 배워지는 게 아녀.”

부러진 도장을 버리지 못하다

기능을 지닌 이가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질 못하는 걸 남상순은 안타까워한다.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기능이 사라져가는 것도 서럽다. 전축을 들고 온 어느 교수는 남상순 같은 이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전파사 문을 닫고 집에서 쉬는 걸 ‘국가적 손해’라고 아쉬워했다.

“기능은 국가의 큰 자산이야. 우리나라가 발전된 게 무엇 때문에 그래. 기능직 때문에 발전된 거예요.” 남상순은 자신의 기능을 인정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기능을 지닌 이를 소중히 여기고 대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나라가 튼튼해진다는 말을 한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이런 소리를 들었어. 어떤 나라에서는 대학교수보다 보일러 기술자가 돈을 더 받는다고. 이게 (우리나라는)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그렇게는 안 되도 ‘동등한 인간적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하는 거야. 아직도 사회에서 그렇게(하찮게) 대접을 하니까 기능직이라는 자부심이 별로 없는 거야.”

남상순은 ‘모가지’가 부러진 도장을 늘 몸에 지니고 있다. 자신이 직접 새긴 도장이다. 평생 자신의 인감으로 사용한다. 장애를 입은 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도장 새기는 일밖에 없다 해서 잠깐 도장 새기는 일을 배웠다. 그때 새긴 도장이다.

“옛날에는 그게 뭐라 그래야 될까. 제일 먼저 다리 못 쓰고, 못 다니면은 도장부터 배우라고 그래. 그게 기본이야. 해먹을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어. 그래서 내가 처음엔 그걸 좀 했어. 도장 배워서 1호가 이거야. 아직도 내 도장이야. 50년 넘게 썼는데 모가지가 부러졌는데 버리지 못하고 남은 꼬타리에다 구멍을 뚫어 고리를 만들어가지고 지금도 이렇게 가지고 다녀.”

부러진 도장을 버리지 않고 몸에 지닌 까닭은 자신의 첫 노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힌 그가 태어나 처음 한 노동의 기록이 도장에 붉게 새겨져 있다. 남상순은 오래 써서 부러졌다고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러졌다고 버려진다는 게 어떤 아픔을 주는 지를 남상순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때 절은 드라이버, 니퍼를 간직한 까닭도, 고장 난 제품의 부품을 버리지 않은 이유도……. 그의 창고에는 아직도 남들이 고장 났다고 버린 제품들이 한가득 있다. 동굴에 갇혀 보냈던 남상순의 십대와 함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