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패러독스의 美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패러독스의 美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1.1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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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돋보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워야 하는 표구 미학
나의 노동은 돈벌이인가? 아니면 창조이고, 예술인가?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인사동 표구 거리와 묵호당(1)

돋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아니 아름답되, 돋보이지 않아야 하는 미가 있다. 돋보여야 할 것을 더욱 빛나게 하는 미를 갖추되,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아름답게 지키며 존재하는 패러독스의 미. 그 애매하고, 난해한 미를 찾아 인사동을 찾아 간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일제 강점으로 끊긴 전통 표구

인사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의 거리다. 화랑들이 즐비해 일 년 삼백예순날 언제든 전시회를 볼 수 있는 예술의 거리. 옛 문서와 옛 그림과 같은 골동품을 만날 수 있는 전통의 거리. 외국인이 꼭 들리고 싶은 관광 명소. 이런 곳에서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는다는 생각이 엉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손으로 창조하는 아름다움은 노동, 그야말로 고된 땀으로 얼룩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 인사동 거리를 가득 메운 발걸음과 웃음 너머에는 노동이 있다. 아주 특별한 노동.

인사동 길은 개천이 흐르던 물길이었다. 북악산과 청계천 사이의 너른 평지가 인사동인데, 삼청동에서 흘러내린 물이 관훈동과 인사동을 거쳐 청계천 광통교로 흘러간 개천길이 인사동 거리로 탈바꿈했다.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에 자리한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북쪽에는 관훈동, 동으로 낙원동, 남쪽엔 종로 2가와 적선동, 서쪽으로는 공평동이 인사동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일대가 인사동과 함께 관광 명소로 발전하고 있다. 인사동 거리가 오늘날처럼 전통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다. 화랑과 필방, 표구사와 같은 미술 관련 상점들이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거다. 1988년 서울시는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했다. 화랑들이 인사동으로 몰린 까닭이 상업적 이유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게 이어 온 질긴 인연이 이미 수백 년 후 이곳에 화랑들이 모이게 점지했는지 모른다. 일찌감치 조선시대에 김홍도, 신용복을 배출한 도화서(圖畵署)가 인사동에 자리했다. 도화서는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인사동하면 예로부터 골동품을 먼저 떠올린다. 선조들의 지혜와 노동이 시간과 더불어 낡아갈수록 더욱 빛나는 골동품들이 인사동 거리를 채운 일은 그리 반길 일이 아니다. 골동품 상점들이 인사동거리에 몰려든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옛 서적 및 고미술품을 거래하던 이 골동품 상점들은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수탈하는 창구 역할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골동품상과 화랑들이 인사동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훌륭한 표구 장인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표구사는 인사동 거리를 오늘의 전통문화의 거리로 만드는데 큰 몫을 했다. 서화들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작품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는 표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일이십 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표구사 한 곳 정도는 있었다. 표구를 그저 작품을 꾸미기 위한 부속물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표구를 하는 장인을 ‘장황인’이라 해서 ‘주부’라는 벼슬을 하사하고 궁중 일을 하도록 하는 등 중히 여겼다. 하지만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의 전통 표구의 맥은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 표구사들에 의해 왜곡되어 점차 사라졌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세계 최고의 한지는 어디로 갔나

1910년께에 궁중에서 표장表裝 기술자로 일하며 종육품 벼슬을 지낸 한응엽이 서울 적선동에 차린 <수송표구사>가 있었지만 일제 강점 초창기 대부분의 표구사는 일본인에 의해 운영됐다. 일제 강점 세력에 의해 조선의 문자가 수난을 당했듯, 조선의 소중한 전통 유산들도 식민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닥나무를 주원료로 만든 한지다. 한지는 일본의 종이(화지)보다 우수했지만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한지는 옆으로 찢었을 때 견디는 힘인 ‘인열 강도’(引裂强度)가 세계 어느 종이보다 뛰어났다. 46년째 표구 일을 하는 <묵호당> 손용학은 체험을 통해 한지의 우수성을 확인했다고 증언한다.

“우리나라 종이가 진짜 기가 막힌다는 게 거기서 느껴져요. 백년 넘은, 이백 년 된 종이도 물에 불려 뜯으면 종이 질이 좋아서 싹 분리가 돼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먹기도 힘들 때니, 밀가루를 가지고 풀을 쑤려니 얼마나 아까워. 그러니까 풀을 보면, 밀 기웃이 잔득 있는 걸로 풀을 쑨 ‘깡풀’로 (작품을) 붙여 논 표구가 많이 있어요. 깡풀로 했는데도 종이 질이 좋아서 싹 분리가 돼요. 기가 막히지. 종이가.”

표구한 옛 작품을 물에 불려 작품을 떼어내는데, 밀 기웃이 섞인 강풀로 배접한 작품이 지금도 배접지를 분리하면 종이가 멀쩡하다는 것이다.

1960년 <동양미술표구사>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해,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수리 복원과 같은 굵직한 일을 한 고수익의 자전적 기록 『표구미학개론』에서도 조선시대 종이의 우수성과 그 시대 종이 산업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종이의 품질은 최고였다.

성종 16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경공장과 외공장에 공장의 종류와 소속 인원을 규정하여 관리 통제하였는데, 경공장의 경우 129직종에, 2,841명의 인원이 있었는데, 지장이 77명이었고, 외공장에는 27종에 3,656명의 인원 중 지장을 698명 두어 가장 많은 인원으로 종이의 생산과 책을 만드는 지장들에게 큰 비중을 두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책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종이를 뜨게 하였고, 〔……〕 이미 장서가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지만 임진란 이전에 만들어진 종이는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좀이나 벌레들이 침범하지 못하여 지질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나, 〔……〕

표구 방식도 일본식을 쫓아갔다. 일본이 몰려오고, 일본식 가옥이 세워지며 집안을 치장하기 위한 표구의 수요도 이를 쫓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표구 1세대를 이룬 장인들은 일본 표구사에서 기술을 익혔다. 현재 어머니에 이어 2대째 <태릉표구사>를 지키고 있는 김산호는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화재보존학 석사학위 논문「한국 근·현대 표구기술의 변천 과정」을 통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 당시 표구사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주로 경영하였고, 수요층도 일본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의 전통문짝의 한 형태인 후스마를 많이 제작하였고 표구의 형태도 일본식으로 제작되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일제강점기 열 살 소년 김용복

일제강점기에 표구를 배워 해방 이후 한국 표구업계를 이끈 이로는 김용복(박당표구사), 이상렬(상신당), 여월현(문화사), 김표영(고려표구사)을 꼽는다. 김용복이 세운 <박당표구사>는 아직도 인사동 표구 거리에 자리하며 한국 표구 역사를 증언한다. 김용복은 1984년  세상을 떠났다. 김용복의 생전 구술을 통해 일제강점기 표구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용복은 열 살 때 일본인이 경영하던 표구사에 들어갔다. 조흥윤의 「장황-한국에서의 동아사아 그림 처리법」에 나온 김용복의 이야기다.

“김용복이 그런 어린 나이로 그 일본인 가게에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는 이미 두어 명의 일본인이 일하고 있었다. 일꾼들 가운데서는 고참이 하도 엄해서 그에게 온갖 일을 다 시켰다. 아침에는 초 새벽, 그것도 여름이면 네 시 반에 기상하고 밤 한 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그는 그밖에도 갖은 심부름을 다녀야 했고 선배들의 빨래도 맡아 해야 했다. 당시 이 방면의 신참자가 일 배우는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 먼저 1~2년 사이에 주로 연장을 닦고 그 날을 세우고 풀 쑤는 법을 배우며 선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도맡았다. 요컨대 가정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풀을 쑤는 일은 표구를 배울 때 처음 하는 일이다. 쌀로 풀을 쑤기도 했지만 대체로 밀가루로 풀을 쑨다. 표구할 때 쓰는 풀은 도배를 할 때 쓰는 풀처럼 쑤지 않는다. 풀은 작품의 보존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표구의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표구사에서 쓰는 풀은 밀가루에 있는 단백질을 제거해 정제된 녹말가루로만 쒀야 한다. 조흥윤도 이를 지적한다.

표구에 있어서의 풀의 의미는 그림과 종이와 비단을 서로 붙여 주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풀이 적절한 농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그 각 부분들을 결합시키기 위하여 충분한 접착력을 가져야 하나 풀이 너무 세어서 그림이나 족자에 긴장감이 생겨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밖에 전문적인 방법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풀로 다루어진 그림에는 곰팡이가 슬거나 좀먹을 위험이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통적 처방에 따라 풀을 쑤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표구사가 급격히 늘고, 표구 수요가 많아지자 도배용 풀을 가지고 표구를 하는 ‘날림’도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인사동 표구 거리에서 기술을 익힌 장인들은 전통방식의 풀 쑤기를 배웠다. 표구사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단백질을 제거한 밀가루로 풀을 쑤는 방식은 정석처럼 여긴다. 항아리와 같은 물통에 물을 부은 뒤 그 물에 밀가루를 붓고, 나무막대기로 휘휘 젓는다. 이리 놔두면 다음날 밀가루는 가라앉고 누런 물이 위에 있다. 이 위에 뜬 물을  버리고 맑은 물 붓기를 보름 가까이 되풀이하면 물이 투명해지며 밀가루에 있던 불순물과 전분이 분해되어 빠지고 녹말가루만이 남는다. 이걸 가지고 물을 부어 풀을 쑨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김산호는 제대로 된 풀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작품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일반적으로 파는 도배 풀은 단백질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생물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고 접착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문화재급의 작품을 보존처리 할 때는 적당하지 않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풀을 물에 담가서 직접 쑤어서 표구할 때 쓰는 표구사가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그런 표구사가 없다. 심지어 족자나 책을 만들 때, 공업용 접착제인 바인다(아크릴 에멀젼계 접착제)를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바인다 자국이 남는 경우도 많고 물리·화학적으로 가역성을 해치는 등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공업화로 대량 생산한 도배용 풀이나 접착제는 손쉽고, 빠르게 작업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 결과, ‘작품’을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는 미의 예술을 지녀야 할 ‘표구’가 장인의 손이 아닌 기계로 찍어내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존재함이 드러나지 않게 아름답게 ‘실존’해야 할 표구의 미학이 ‘실종’되는 셈이다. 리처드 세넷의『장인』에 나온 말이 떠오른다.

모든 장인의 내면에는 엄격한 표준을 중시하는 절대주의자도 살고 있고, 생활에 임하는 직업인도 살고 있다. 절대주의자 입장에 서면 완전하지 못한 것은 전부 결함이고 실패다. 이와 반대로 직업인의 입장에 서면 완벽에 집착한다는 게 곧 실패로 가는 지름길로 보인다.

21세기 노동, 일, 직업, 기술이 마주한 딜레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손쉽고 빠르게 밀려나는 장인 정신

풀만이 아니다. 김산호는 종이도 표구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표구사에서는 70년대 이후로 점점 양지의 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액자의 속 틀에 초배, 재배의 2번 붙이는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서 주로 포장지로 많이 쓰이는 크라프트지를 사용하거나 신문지를 초배에, 노루지를 재배에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모두 다 산성종이이다. 〔……〕 이러한 이유로 액자를 제작하고 10년 정도 지나면 빠른 산성화로 인해 작품에 심각한 손상을 준다. 그리고 산성화된 배접지로 배접을 하면 나중에 배접지 제거 시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비록 일본인에게 표구를 배웠지만, 아니 그랬기에 해방 이후 우리 표구의 복원을 위해 힘쓴 이가 있다. 김용복은 한국 표구의 장래를 위해 표구 재료의 국산화를 시도했다. 일제 강점으로 표구에 쓰이는 전통 재료들의 맥이 끊긴 상황에서 해방을 맞이하자 표구에 쓰일 재료를 일본에서 가져와야 할 실정이었다. 우선 김용복은 표구에 쓰일 비단을 제작할 공장을 1954년에 뜻을 함께 하는 이와 흑석동에 세운다. 비단 공장은 해방직후부터 준비를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늦어졌다. 김용복이 개발한 비단은 ‘흑석동비단’ 혹은 ‘서울비단’으로 불렸는데, 서울비단은 당시 좋은 비단의 대명사였다. 또한 표구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종이 생산을 위해 1955년 전주에 종이 공장을 세우는데 애를 썼다. 김용복은 종이 공장에 직접 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도에 힘썼다. 이 한지 공장 <송지방(宋紙房)>은 전통 한지의 맥을 되살린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송지방>은 140년 전 전주에 세워진 제지소인데, 김용복의 노력이 더해져 전통 한지의 맥을 이으며 국내 최초로 화선지를 생산했다. 이처럼 표구는 실존하면서도 좀체 그 정체를 실감하기 힘들지만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일은 물론 비단과 종이의 품질까지 높이는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우리 고유의 전통표구 방식이 사라진 ‘폐허’에서 다시 장인의 정신으로 표구의 미학을 세우려 노력했던 <박당표구사>의 김용복이 단순히 손기술이 아닌 표구 재료부터 제대로 갖추려 했던 노력은 현대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기능인, 혹은 기술자들이 겸손하게 경청할 지점이다. 나의 노동은 돈벌이인가? 아니면 창조이고, 예술인가?

열 살적 일본인 표구사에 들어가 밥과 빨래를 하며 표구를 익힌 게 요새 말로 ‘스펙’의 전부인 김용복은 노동의 의미와 노동을 하는 이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용복은 해외로 진출한 최초의 표구 장인이기도 하다. 1980년 함부르크 민족학미술관에서 소장한 동아시아 그림들이 훼손이 심각해지자 김용복을 초청해 복원 작업을 했다. 김용복은 전주의 김남두와 함께 함부르크로 갔다. 조흥윤의 기록이다.

두 분 한국 표구사가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서 동아시아의 여러 서화를 표구처리하였다. 처음으로 표구되는 것들은 그 각기의 출신 나라와 그림 내용에 알맞은 표구 방법을 사용하였다. 복원 처리되는 것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그 본래의 상태가 유지되거나 재생되도록 애써졌다. 그리하여 같은 박물관의 동아시아 서화 유물들은 이제 조심스럽게 다루기만 하면 150 내지 200년은 무난히 견디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김용복의 구술 기록을 진행한 조흥윤은 “높은 연세에도 늘 배우는 이로 자처”했다고 김용복을 떠올린다. 김용복은 표구를 하는 이들에게 늘 재료를 아끼지 말라고 했고, 뒤도 앞같이 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