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노동자, 공장 자주관리에 나서다
해방정국 노동자, 공장 자주관리에 나서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1.1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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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공장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접수 자주관리 운동 전개
전평, 한국 노동운동 최초의 전국적인 공개 합법적 노동조합
왠 노동?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1)

지난해(2015년)처럼 ‘노동’ 혹은 ‘노동조합’이 언론의 주요 뉴스를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차지한 적은 21세기에 들어 없는 듯하다. 공무원 연금을 시작으로 한국노총의 노사대타협, ‘소요 사태’라 불린 민주노총의 집회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도록 한 해 내내 ‘노동’이 빅 이슈다. 여기에는 박근혜 정부의 몫이 크다. 2015년 벽두부터 개혁을 국정과제로 부르짖은 박근혜 대통령은 그 맨 첫 자리에 ‘노동’을 내세웠다. 국정 홍보를 위한 방송 광고도 온통 ‘노동’이다. 다양한 주제로 광고하는데 마지막은 매 한 가지다. 청년 일자리 문제도, 여성 일자리 문제도, 노년 일자리 문제도, 불안한 일자리 문제도, 공정한 기회나 정당한 보상의 문제도. 결국 ‘노동 개혁’만 하면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세밑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노동 개혁’의 절박함을 호소한다. 그 ‘진정성’이 대통령이 즐겨 본 <동물의 왕국>의 교훈처럼 ‘배신’이 아니기를 ‘노동(자)의 배신’이 아니기를.......

왠 노동운동사?

뻔히 속을 줄 알면서도 누군가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우선 팩트 자체를 진정성을 갖고 충실히 읽으려는 자세가 진실로 가는 길이라 여기며 취재하고 글을 쓴다. 팩트의 진정성에 무수한 ‘배신’을 당했지만 어떤 사건을 탐사할 때 ‘초심’처럼 간직하는 원칙이다. 만의 하나, 아니 억의 하나 경험이 내게 씌운 색안경으로 사실 자체를 스스로 왜곡하며 다가가는 오류를 겪고 싶지 않아서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그래서 아전인수 혹은 정략에 희롱당하며 허공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노동 개혁’이라는 단어. 그 단어의 팩트를 읽기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노동’과 관련된 철학, 역사, 경제학, 미학, 경영, 자기 계발, 소설, 심지어 과학과 의학 관련 책까지 마포의 한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읽었다. ‘도대체 노동이 뭐 길래 개혁을 해야 하나’, ‘왜 노동을 개혁해야 하나’ 이 두 가지 질문이 시작이었다.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발자취>는 ‘노동 개혁’ 팩트 읽기를 하며 어지러이 적어 둔 공책들에서 가려서 새롭게 이은 글이다. 그래서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보다는 ‘공부’일 뿐이다. 다 아는 내용일 수 있고, 이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읽을 때마다 새롭게 해석되고, 다르게 읽히는 법이다. 60년 전 이야기가 마치 오늘과 다르지 않게 읽힐 수 있고, 몇 년 전 이야기가 까마득하게 오래된 이야기나 꿈이나 신화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좬조선왕조실록좭이 끊임없이 읽히며 새로운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잉태해 세상에 내놓지 않는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쓴다니 요샛말로 ‘왠열’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연재를 마무리할 쯤 ‘왠 노동 개혁’의 긍정이든 부정이든 답을 찾으리라 믿는다. 2016년은 한국노총을 설립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라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해 노사대타협 이후라 그 60년이 다의적 해석으로 다가온다.

해방직후 노동운동의 흐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여기서는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이후부터 발자취를 더듬는다. 물론 일제강점기는 물론 개항 이후 근대적 산업이 들어서며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고,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다. 이 흐름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했고, 사회주의 운동과도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해방 직후 노동운동을 이끈다.

칠흑과 같은 밤에는 새벽을 의심하다. 과연 동이 뜰까 싶을 정도로 어둡지만 새벽은 눈을 뜬 이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스멀스멀 밝는다. 8.15해방도 그렇지 않을까.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실감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되자 뿌리조차 말라 영원히 사라졌을 거라 여겼던 노동운동이 봄날 고사리 돋듯 고개를 내밀었다. 일제강점기 수차례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경성트로이카 김삼룡, 이재유, 이현상이 주도했던 노동운동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해방이후 3개월도 채 되기 전에 김삼룡, 이현상의 주도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결성된 것이 증명하듯 칠흑 같은 한밤중에도 새벽을 맞이할 노동자는 죽지도, 잠들지도 않았다.

경성트로이카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성부(현 서울)에서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을 핵심으로 조직한 조직이다. 일제에 맞서는 운동은 물론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이 지식인 중심으로 이론과 주도권 다툼, 소비에트나 코민테른의 인정에 애를 쓴 반면, 경성트로이카는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을 조직하는데 애쓰며 일제에 강점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노동자, 공장을 접수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인 기업주들은 공장 문을 닫는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은 셈인데, 크게 두 방향으로 대응한다. 갑작스런 해고에 대해 생계유지를 위한 해고수당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인이 철수한 공장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접수해 관리하고 운영하는 자주관리 운동이다. 일본인 기업주에만 맞선 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빌붙었던 악덕 관리들이 국가 소유의 공장의 관리권을 따냈는데, 노동자들은 이런 악덕 관리인과 투쟁해 공장을 접수해 운영했다. 이원보는 좬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좭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의 발생 원인을 아래처럼 말한다.

자주관리가 실시되는 데 가장 큰 바탕이 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리며 일해 온 공장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노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생필품이 부족하여 당장 물건을 만들어 내야했던 것도 자주관리가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던 조건이었죠. 해방과 함께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도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하도록 축진했습니다. 당시 노동자 자주관리는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고, 남한에 있는 대부분의 사업체에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주관리 운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하려고 공장 단위로 공장위원회, 자치위원회, 관리위원회를 꾸렸다. <한국노총 50년사>는 자주관리 운동을 1930년 이후 축적한 혁명적 노동운동이 대두했다고 의미를 둔다.

거의 전국적인 범위에서 발생한 자주관리운동은 전평이 결성되기 전에 노동자대중의 자발적인 운동의 주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이후 축적되어 온 혁명적 노동운동이 해방정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이 경영한 기업은 물론 친일 자본가 기업들도 해방직후에는 대부분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에 들어갔다. 소림광업, 인천 알미늄공장, 조선중기, 조선해륙운수, 김천목재공업, 선경직물, 화신산업, 경성방직 등이 공장 관리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점차 경영에서는 배제되고, 노동자들의 권익옹호기관으로 후퇴한 경우가 많았다.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운동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1945년 12월 6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33호를 공포한다. 일본인의 재산은 군정청에서 임시로 소유하고 한국인 가운데 적당한 관리자가 나타나면 그 경영을 맡긴다는 관리인 제도를 신설한 것이다. 미 군정청은 공장 관리인을 파견했다. 이 관리인들은 공장의 정상 조업보다는 공장 재산의 반출하는데 정신없었다. 노동자와 충돌은 불가피했다. 노동자들은 원료 등을 팔아 없애고 공장의 자산을 빼돌린 뒤 공장 문을 닫으려는 관리인에 맞서 공장 폐쇄 반대와 해고 반대 투쟁을 벌였고, 관리인을 배척하는 싸움도 전개했다. 1945년 11월 기준으로 16개 산별노조에 728개의 공장 관리위원회가 구성됐고, 이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8만 8천 명에 이르렀다고 좪해방선언좫 제8는 기록했다. 자주관리 운동은 미 군정청의 정책에 맞선 노동자의 저항으로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군정청 취득 일본인 재산의 보호 및
재산의 경영, 점유 및 사용에 관한 건
-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 관제령 제2호

모든 상업, 공업, 금융, 농업, 주택상 및 기타의 재산 또는 기업은 조선군정청 관리인의 ①재산관리 혹은 ②기타 조선군정청 국과 또는 기관의 관리를 통하여 인가한 현행 또는 장래의 협정 또는 절차 하에 경영, 점유, 사용할 것

최초의 전국적 노동조합 출범

해방 직후 노동운동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이들이 주축이었다. ‘주로 일제하에서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비합법 지하운동을 했던 노동운동가’라고 이원보는 말한다.

노동조합은 전평 결성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결성됐다. 1945년 11월 1일 조선광산노조, 2일 금속, 철도, 출판 노조, 3일 섬유, 토건, 화학, 봉급인, 식료, 목재, 전기, 조선 분야에서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이 기세로 11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서울 중앙극장에서 전평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1,194개 노동조합 30만 노동자를 대표한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평 위원장으로 허성택, 부위원장은 박세영과 지한종이 뽑혔다. 전평의 성격은 명예의장으로 추대한 박헌영, 김일성, 마오쩌둥, 레온 주오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다. 레온 쥬오는 세계노동조합연맹 서기장이다. 안재성은 좬한국노동운동사좭에서 전평을 전국적인 공개합법적 노동조합이었다고 규정했다.

산하에 16개 산별노조와 11개 지방평의회, 그리고 북한 전역의 노조를 담당하는 북한 총국을 둔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초의 전국적인 공개합법적 노동조합의 출범이었습니다.

남북을 아울러 ‘전국’이라고 본다면 사상 최초일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유일했던’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인 셈이다.

전평의 실천요강은 아래의 세 가지인데, 이에 따르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민족적 성격과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① 조선의 완전독립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하는 민족통일전선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

②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 협력하여 산업건설을 함으로써 부족공황, 악성인플레의 극복

③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을 교육 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 강화한다.

전평의 일반 행동 강령은 19개 조항이다. 전평은 한 달 만에 1757개 노동조합, 55만 조합으로 급속하게 성장한다.

전평 결성은 김상룡, 이주하, 이현상, 이인동과 같은 일제하 노동운동을 이끈 경성꼼그룹 출신들이다. 김삼룡은 전평 결성대회에 영등포와 인천 노동자 800여 명을 참석하게 했고, 이현상은 단상에 걸린 현수막을 썼다. 이날 채택된 결의문도 이현상이 썼다.

전평의 출범 초기 미군정은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전평도 미군정과 직접적으로 맞서 자극하는 행위는 자제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노동정책이 서서히 드러나며 노동자의 공장 자주관리 운동과 어긋나자 충돌은 불가피했다. 특히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탄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46년 전평과 미군정의 한 판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전평 일반 행동 강령

1. 노동자의 일반적 생활을 보장할 최저임금제를 확립하라.
1.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1. 성.연령.민족의 구분을 불문하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급하라.
1. 7일 1휴제와 연 1개월간의 유급 휴가제를 실시하라.
1. 부인 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간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1. 유해 위험 작업은 7시간제를 확립하라.
1. 14세 미만 유아 노동을 금지하라.
1.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 도서관, 의료기관을 설치하라.
1. 부인 노동자를 위한 공장설비(탁아소, 수유소, 환착소 등)를 고용주 부담으로 즉시 실시하라.

1.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을 확립하라.
1. 공장폐쇄, 해고와 살인은 절대 반대한다.
1.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 반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노동자는 그 관리권에 참여하라.
1. 실업, 상병, 폐질 노동자와 사망자의 유족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하라.
1. 착취를 본위로 한 일체의 청부제를 반대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1. 농민운동을 절대 지지하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자.
1. 조선의 자주독립 만세
1. 세계 노동계급 단결 만세